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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탐정 용담 (이문영, 웃는돌고래,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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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탐정 용담 (이문영, 웃는돌고래, 2017.)

Dog君 2018. 1. 12. 17:20


0. 폴 오스터와 J. M. 쿳시가 주고받은 서한을 모은 “디어 존, 디어 폴”이라는 책에서, J. M. 쿳시는 핸드폰이 등장하는 바람에 소설적 상상력이 제약되고 있다고 푸념한다. 이놈의 핸드폰 때문에 A와 B가 아슬아슬하게 엇갈리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상황 같은 것을 전혀 상상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연출하려면 핸드폰을 잃어버리거나 통화권 이탈 지역으로 한 사람을 보내거나 하는 식의 상황을 굳이 구구절절이 만들어야만 하게 됐으니까. 그런데 폴 오스터는 반대로 휴대폰이 등장한 덕분에 소설적 상상력에 보탬이 된 측면도 분명히 있다고 답한다. 예컨대 응급 사태나 사고가 터졌을 때 완전히 새롭고 좀 더 기민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실세계의 사실fact이 소설세계의 상상력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자극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1-1. 순전히 내 취향만으로 역사학을 전공으로 택했고 결국에는 역사학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는 그 자체로 재미있게 즐기지를 못하는 편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픽션이란 것이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머리가 어지럽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극적dramatic’인 면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소재로 삼고 있는 역사는 전혀 ‘극적’이지 않거든. 그래서 그런가, 역사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픽션들이 단지 기초적인 설정 정도만 역사에서 빌어온 다음에는 픽션으로서의 재미만을 위해 내달리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창작자 역시 역사적인 사실fact들을 극적 상상력을 제약하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처럼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역사를 가지고 그야말로 ‘소설을 쓰는’ 처지에 이르게 되고...)


그리고 이런 '소설'은 버젓이 테레비에까지 나오고...


1-2. 역사를 소재로 한 픽션은 결국 그 중간 어딘가에서 타협점을 찾기 마련인데, 그 애매한 타협의 지점들 속에서 갈피를 잡기가 참 어렵다. 고증이고 나발이고 모르겠고 단지 상상력만으로 질주하는 결과물을 보면 팩트를 소홀히 다룬 것 같아서 당장 반감이 들지만, 또 반대로 역사적 픽션에 대해서 역사적 고증만 엄격하게 따지고 드는 논평들(대체로 학자들이 이러지)을 보면 아니 그럴 거면 논문을 쓰지 픽션을 왜 쓰겠냐 싶어서 또 반감이 들고... 뭐 암튼 그 사이에서 갈대처럼 흔들리고 막 그러고 있다.


제 마음도 같이 흔들리네요.


2. 그런 점에서 이 책이 특별해 보인다는 거지. 애초에는 순전히 저자에 대한 궁금증만으로 골라든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전혀 의외의 곳에서 생각의 새싹이 돋아난다.


3-1.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혹은 역사학/고고학의 연구성과들)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갈등구조나 트릭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미승 용담과 화랑 연문덕의 버디무비(표지는 좀 브로맨스...) 형식을 큰 기둥으로 세운 다음, 당대의 사회구조와 ‘국제'관계 등으로 골격을 짜고, 당시의 생활문화와 작가의 상상력으로 내용을 채워넣었다고 하면 대충 정리가 될랑가... (추리소설이다보니 혹시나 스포일러 될까봐 뭐라 말을 덧붙이기가 영 조심스럽구만.)


3-2. 그러니까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당대의 역사상을 (거시적으로든 미시적으로든) 쉬이 그려볼 수 있다... 뭐 그런 말씀. 당장 이 책 그대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보완하는 용도로 쓸 수 있겠고, 약간의 가공만 더하면 어린이/청소년 대상 콘텐츠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 교양교재로도 괜찮을 것 같고, 삼국시대 생활문화사 입문서로도 딱히 손색이 없겠다. 다시 말해, 역사 공부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시중에 쌓인 역사책을 읽자니 좀체 엄두가 안 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권할만한 책이라는 겁니다.


4.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역사학의 대중화를 고민하는 연구자에게, 역사적인 사실이 상상력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 도리어 상상력을 자극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수 있겠다. 역사적 사실이 픽션의 상상력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터 역사연구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각자의 영역에서 각기 분투할 일이지만은, 뭐 암튼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첫 단추는 잘 꿴 셈이다. (물론 마음 한켠에 어딘지 모를 약간의 아쉬움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부분까지 논평할 능력도 없을 뿐더러, 지금은 제초작업보다는 비료뿌리기가 더 필요한 시점 아이겠습니까.)


ps. 가끔 그런 소설이 있다. 책을 덮을 때 "뭐여, 왜 여기서 끝나?!?!”하는 생각이 드는 소설. 아니, 결말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뭔가 더 길게 써도 될만한 세계를 구축해 놓고선 그냥 끝내버리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어릴 때 봤던 SF소설들이 대체로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당장 기억나는 건 존 윈덤의 ‘트리피드 침략(The day of the triffids)’이나 로버트 하인라인의 '방황하는 도시 우주선(Orphans of the sky)’ 정도... 하지만 그건 업자들이 원작을 청소년 버전으로 제멋대로 각색하면서 상당 부분을 삭제해버린 탓이라고 한다...;;;) 이 책을 덮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더라. 아니 이 정도 캐릭터면, 셜록과 왓슨...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두치와 뿌꾸라도 되도록 후속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보면 안 될랑가.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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