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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휴전 (김보영,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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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휴전 (김보영,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6.)

Dog君 2018. 6. 2. 19:00


0. 읽은지 시간이 상당히 지났기 때문에 느낌만 간단하게 정리하기로.


1-1. 두터운 학술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단연 서론과 결론이다. 그 중에서도 책의 전체 주제를 던지고 본론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요약하여 제시하는 서론이 특히 중요하다. 서론을 잘 쓰고 잘 읽어야 방대한 본론의 바다에 들어가서도 항로를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론만 잘 파악해도 본론에서 좀 헤매더라도 책의 전체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는 건데, 이게 바로 학교 가서 제일 먼저 배우는 책 읽기의 스킬이라고나 할까.


1-2. 안 그럴 거 같은데, 수십여년 간 이어진 동북아 냉전체제에도 서론으로 삼을만한 사건이 있었다. 2년 남짓 이어진 한국전쟁 휴전회담이 바로 그것인데, 그 과정에서 보여준 당사자들의 좌충우돌은 이후에 이어진 동북아 냉전체제의 전체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가늠자처럼 느껴진다.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군사적 제압이 불가능해지면서부터는 이데올로기적인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거나(그래서 포로 송환 문제가 그리도 길어졌던기라...) 남과 북 공히 휴전회담 이슈를 국내정치용으로만 써먹었다는 점이 딱 그렇다. 아, 또 그것 때문에 남과 북이 동북아 정세의 당사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정작 코피 터지고 강냉이 나가면서 싸웠던 애들이 막상 문제 해결 상황에서는 깍두기 취급이나 받는 이 아스트랄한 상황.


  그리고 스탈린의 직접 조언을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에게는 중국 정부와 논의하여 중국과 합동으로 제안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 지침은 휴전협상 전 과정에서 북한과 중국, 소련 간의 관계를 규정했다. 스탈린의 지시는 중국이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라는 것으로, 북한은 모든 문제를 먼저 중국의 동의를 받은 다음에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협상에서 중국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하는 한편, 북한의 지위와 역할은 명확하게 제한했다. 또한 소련의 역할도 제한함으로써 스탈린은 구체적인 협상 과정에 개입되는 데에서 오는 책임과 부담을 최대한 회피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이후 전개된 회담은 공산 3국 간의 긴밀한 논의 구조 속에서 스탈린이 최종 재가를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중국은 협상 지휘 체계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도 거의 매일 서한을 통해 스탈린에게 협상 과정을 보고하고 그의 지시를 구했다. 공산군 측 협상 지휘 체계는 이러한 공산 3국 간의 역관계를 반영한 구조로 형성되었다. (후략) (p. 52.)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이래 유엔군의 이름으로 미군이 참전하고,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 이후 전쟁의 실질적인 주체는 미국과 중국이었다. 한국전쟁이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전환된 후 남과 북은 더 이상 전쟁의 주체가 아니었다. 물론 전쟁 당사자였지만, 결정권을 갖지 못한 남과 북은 전쟁의 한 부분이었던 휴전회담에서도 보조적 위치에 머물거나 아예 배제 당했다.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넘겨받으면서 맥아더가 말했듯이, 이 전쟁은 더 이상 한국의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휴전을 할 것인가, 휴전의 조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남과 북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심지어 미국은 이승만이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될 경우 그를 축출할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적어도 중국이 북한의 김일성을 갈아치울 생각을 하거나 그러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북한 정권의 입지는 나았다고 볼 수 있을까.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중국군의 참전으로 기사회생한 북한 역시 조중연합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중국군의 지휘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북한을 사회주의 형제국으로 대우하려고 했으며, 형식적이나마 회담에서도 북한 대표를 전면에 내세웠다.

(중략) 한국 측 대표는 유엔군사령관이 선임하였고, 한국 정부나 이승만의 지시를 받거나 보고를 하는 제대로 된 ‘한국 대표’가 아니었다. 한국 대표는 발언권이 없는 옵서버(observer)에 부로가했다. 공산군 측이 북한 측 대표를 수석대표로 내세운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 것으로 한국의 불만이 컸지만, 미국은 이러한 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구조는 한국을 협상장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왔고, 회담장 밖에서 한국의 휴전 반대 시위를 격화시킨 한 요인이었다. 미국은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이양 받았고, 한국이 미국 도움 없이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노골적으로 이용했으며, 한국에 대해 배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민족적 감정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전쟁 당사자나 주체의 측면에서 더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대표단 구성은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 중국과 북한을 일방으로 하고, 한국이 배제된 채 유엔군을 읿아으로 하는 휴전 협정문을 남기는 결과를 남겼으며, 현재의 정전체제의 불안정성과 한국의 애매한 지위로 이어졌던 것이다. (pp. 76~77.)


  자원 송환 원칙은 한국전쟁을 심리전으로 전화시킨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포로 송환 협상에서 자원 송환 원칙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전쟁은 실질적으로 이념전이자 심리전으로 변모했다. 유엔군 측에서 자원 송환 원칙을 제기한 첫 번째 이유는 양측이 보유하고 있는 포로 숫자의 엄청난 차이였다면, 포로의 복잡한 성분도 한 요인이 되었다. 남북한 포로의 출신 성분뿐 아니라 국공 내전을 거쳐 공산화된 중국군 포로까지 결부되어 문제는 더욱 복잡했다. (중략)

  결국 미국 정부는 도덕적 측면, 국내정치, 국제정치, 반공적 입장 등 모든 요소를 고려한 결과 강제 송환이 비인도적이며 부당한 처사라고 결론 내렸다. 여기에 공산군 포로들이 본국 송환을 거부했을 경우에 나타날 선전 효과도 고려하여 최종 확정된 기본 원칙이 ‘인도적 자원 송환 원칙’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 강제력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포로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어떠한 협정도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통해 자원 송환 원칙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pp. 232~238.)


  휴전회담은 전쟁을 군사적으로 종결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전후 체제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휴전회담의 구조와 성격, 협상 전략과 협상 주체, 의제 선정과 쟁점 등은 한국전쟁과 전후 정전체제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남과 북이 회담과 협정 체결 과정에서 처했던 지위와 역할을 전후 정전체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은 협정 체결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공산군 측에서 북한과 중국이 대등하게 협정문에 서명한 것과 대조적이어서, 전후 ‘당사자’ 문제가 제기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pp. 387~388.)


2. 그러니까 이 책이 그리는 휴전회담 과정은, 국제 이슈를 국내 이슈로만 써먹다가 정작 큰 틀에서의 ‘플레이어’가 되지 못했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결정적인 체제 전환의 시기에 국제 이슈를 국내 이슈로만 써먹었던 휴전회담의 결과는 수십년 간의 깍두기 생활이었다. 저자가 결론에서 정전체제의 변화 시기에 남과 북이 온전한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당부를 덧붙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3. 2018년 현재, 분단체제의 변화가 심상찮다. 한반도 상황이 이렇게나 급격하게 변화했던 것이 휴전회담 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을 통해서 2018년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큰 교훈은, 입 벌리고 멍청하게 있다가는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사실 아닌가 싶다. 지금처럼 결정적인 시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오답노트가 바로 이 책 아닐랑가.


(전략) 이승만의 휴전 반대와 북진통일론은 회담에서 배제된 이승만이 불리한 내정의 위치를 만회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적 조작’이었다. 미국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이승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이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것은 대내외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중을 선동하는 데에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재집권에 성공하고, 반공포로석방이라는 무리수를 둠으로써 회담과 전쟁에서 배제되고 불확실했던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김일성 역시 중조연합사 성립으로 지휘권을 상실했지만 국내 정치에 눈을 돌릴 여유를 가졌으며, 당내 숙청을 통해 정치적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국내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다. 전쟁 중 보조적 지위로 전락했던 남과 북의 지도자는 제한적 지위 덕분에 전쟁을 주도할 부담감 없이 국내 정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데 전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휴전과 그 결과로서의 정전체제에서도 남북한이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황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도 했다. (pp. ??~??.)


  1953년이 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출범하고(1953.1), 소련에서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자(1953.3.5), 휴전회담은 급진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여론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제한적이었다. (중략)

  소련 새지도부의 회담 종결 전략에 따라 속속 공산군 측의 조치가 나오기 시작했다. 공산군 측은 3월 28일 상병포로(부상포로-옮겨쓴이) 송환에 동의하는 회신을 보냈다. 스탈린 사망 후 3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중략)

공산군 측의 일련의 의사표시는 상병포로 교환뿐 아니라 포로 문제 전반을 해결하기 위해 휴전회담을 재개하자는 분명한 신호였다. 자원 송환 원칙을 수용한다는 명확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송환 거부 포로를 중립국에 넘기는 방식을 제안한 것은 이미 자원 송환 원칙을 수용한 분명한 양보였다.

(중략)

  몇 차례의 서신 교환 후 4월 6일 쌍방 연락장교들이 상병포로 교환을 위한 첫 회의를 가졌다. 상병포로 교환협정문 작성에는 불과 5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후략) (pp. 316~323.)


  미국은 공산군 측과 마지막 협상을 벌이는 상황에서 한국 측의 노골적인 반대가 협상에 영향을 미칠까봐 한국을 더 철저하게 따돌렸다. 유엔군사령관은 해리슨 수석대표에게 휴전회담과 관련된 정보가 한국 측 휴전회담 대표에게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유엔군 측 휴전회담 대표단에서 한국 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아침 열리는 대표단 내부참모회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수석대표 주재하에 열리는 참모회의에서 한국군 대표는 다른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참모’였으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기회인 참모회의에서도 미군 대표와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미군 대표들은 참모회의가 열리기 전에 상부로부터 특별한 회의 자료를 제공받았지만, 한국군 대표에게는 회의록과 그날 공산군 측에 제시할 문건 외에는 아무런 자료도 제공되지 않았다. 새로 한국군 대표로 교체된 최덕신은 ‘보안규정 준수’ 약속을 거부하고, 유엔군 측 제안 정보를 미리 이승만에게 알리기도 했다. (pp. 339~340.)


(전략) 비록 정전협상과 협정 체결 과정에서 남과 북은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했지만, 전후 정전체제 이행과 준수의 당사자인 남북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는 명실상부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60년 전 정전협정 체결 당시와는 달라졌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성숙된 자세를 갖춰야 한다. 적어도 60년 전보다는 남과 북이 당당한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p. 398.)


교정.

75쪽 표 : Henry I Hodes -> Henry I. Hodes

84쪽 표 : Sawrence C. Craigie -> Lawrence C. Craigie

84쪽 표 : 분과위윈회 회의 -> 분과위원회 회의

133쪽 4줄 : 학보하고자 -> 확보하고자

375쪽 9줄 : 최덕신 소장은 물로 -> 최덕신 소장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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