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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반납 여행 (아미노 요시히코, 글항아리,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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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반납 여행 (아미노 요시히코, 글항아리, 2018.)

Dog君 2018. 7. 9. 18:48


1-1. 나는 덕후였다. 삼국지 덕후. 삼국지 게임도 많이 했고, 시중에 나온 삼국지연의도 버전별로 얼추 다 읽은 것 같다. 어지간한 등장인물의 자(字) 정도는 기본 소양에 속했고 프로필도 어느 정도는 꿰고 있었다. 어찌나 몰입했던지,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도 멀리서 누가 삼국지 이야기만 한다 싶으면 곧바로 눈이 떠지고 막 그랬다.


1-2. 나는 덕후다. 역사 덕후. 대학 진학을 앞두고 ‘평생 해서 질리지 않을 전공을 골라라’는 아버지 말씀에 사학과를 선택한 이후로 지금껏 단 한 번도 역사가 재미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능력부족을 탓한 적은 있어도, 재미가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그러고보면 역사학 언저리에서 먹고 사는 지금 처지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재미있는데 보람차기까지하고, 거기에 매달 꼬박꼬박 봉급까지 챙겨주니 와... 내가 늘 말하고 다니는 거다만은, 이 앞에서 부동산 대박이 어쩌고 비트코인 수익률이 저쩌고 할 게 아니다.


1-3. 나는 덕후가 되어야 할 운명인 듯 하다. 사료 덕후. 사료 관련 업무를 주 임무로 하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료를 많이 접하게 된다. 학교에 있을 때는 사료에 어두운 것이 늘 컴플렉스였는데, 이제는 도리어 사료가 넘쳐나서 허덕허덕한다. 사료를 접하다보면, 이게 또 의외로 꽤 재미있다. 난삽하게 흩어진 사료들을 나름의 체계에 따라 분류하고 앞뒤를 맞추어 정리하는 지난한 작업, 정말 별 것 아닌데 의외로 재미있다. 카오스의 세계에 있던 사료들을 코스모스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슈퍼히어로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2-1. 솔까말, 이 책의 내용이 아주 대단하고 재미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연구를 위해 각지에서 수집한 고문서들을, 어찌어찌하다가 제때 반납하지 못하게 됐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것들을 다시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떠난 출장 이야기... 정도다. 특별히 극적인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물콧물 쥐어짜는 사연이 극적으로 밝혀지는 것도 아니다. 굳이 특이한 점을 말하자면, 연구의 특성상 해안이나 섬이 주무대라는 것 정도인데, 그렇다고 그게 뭐 대단한 조건인 것처럼 묘사되지도 않는다.


2-2.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은 역사 연구를 위해 흔쾌히 자료를 제공한 소장자들에게, 뒤늦게나마 사죄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한 어느 성실한 역사학자의 기록이다. 학문적으로는 연구윤리의 문제이고, 개인적으로는 성실성의 문제이다.


  사전에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자료관 연구원 쓰노에 도쿠로津江篤朗와 만난 우리는 책상 위에 보자기를 두고 인사를 나눈 뒤, 그간의 사정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키가 크고 딱 벌어진 체격의 쓰노에는, 엄숙한 얼굴로 팔짱을 기고는 아무 말 없이 내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마 심한 질책을 들으리라 각오하고 있던 내가 설명을 끝내자, 쓰노에는 천천히 팔짱을 풀고 무릎을 크게 치며 “아미노 선생, 이것은 미담입니다. 쾌거입니다. 이제까지 문서를 가져갔다가 반납하러 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라고 말했다. (p. 47.)


  마침내 자리로 안내된 우리와 이미 모여 있던 원로들 앞에 놓인 조바코에 등을 돌린 위치에서 가미시모를 차려입은 촌장은 본인 앞의 바닥에 손을 모으고는 엄숙히 제안하셨다. “도쿄에서 수산청 일로 우노 씨, 아미노 씨, 나카자와 씨가 와서 이 공용문서를 빌리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 말이 끝나자 원로들은 “모처럼 먼 곳에서 왔으니” “쓸모 있다고 하면 빌려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라는 식으로 각자 찬성의 뜻을 표하셔서, 우리는 만장일치로 문서를 빌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후 술자리가 벌어졌다. 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전복으로 만든 회가 맛있었다. 조바코에 끈이 붙어 있기에 용도를 여쭸더니, 불이 나면 다른 것보다 먼저 이 상자를 짊어지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라고 촌장은 답하셨다. 이런 경험은 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미야모토 쓰네이치의 『잊혀진 일본인』 가운데 「쓰시마에서」를 읽었을 때, 나는 이때의 기억이 분명히 떠올랐다. 쓰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1950년 사도섬에서도 문서는 공공의 것으로서 그렇게 마을 원로들에 의해 소중히 소중히 보관되고 있었다. (pp. 196~197.)


3-1. 책 중간중간에, 각 사료의 의미 같은 것을 짚어주기도 하는데 일본의 역사와 지명에 대해 까막눈에 가까운 내 입장에서는 그냥 글자만 읽으면서 ‘아, 그런갑다...’하고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정도였고,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딱히 뭐라고 코멘트를 붙이기도 좀 애매하다.


3-2. 자 그러니까 내 독후감도 이걸로 끝...


3-3. …일리가 없잖냐.


4-1. (저자의 집필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엉뚱하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사료와 연구자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좀 더 정확하게는 전국 각지에서 여전히 햇볕 못 보고 있을 수없이 많은 사료들 생각이 났다.


4-2. 이 책에 나오는 ‘고문서 반납 여행’ 같은 것을 앞으로 할 일이 있을까. 없을 확률이 100%에 가깝다고 본다. 당장 갖고 있는 가장家藏문서도 어떻게든 어디에 기증하고 싶어서 고민이 많은 것이 2018년의 실정인데, 몇십 년씩이나 지나서 고문서를 애써 돌려주는 여행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나 싶다. 


4-3. '고문서를 반납하는 여행'은 아마도 없을 것이지만 그 대신 ‘문서를 찾는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 ‘문서’라는 것이 수백 년씩 된 고문서일 필요도 없다. 불과 몇십 년전에 생산된 문서도 그 자취를 찾기 힘든 일이 다반사 아닌가. 내가 공부하는 현대사분야만 해도 어딘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을 문서들이 어디에 얼마나 흩어져 있을지,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당장 나한테 관심 있는 분야에서만 예를 찾아도 1)각급 군부대에서의 (정훈)훈련 내용을 담은 문서들, 2)각 지역에서 미 공보원(USIS)이 생산한 공보물과 활동 내역을 담은 기록들, 3)민간기업들이 소장하고 있는 기업사企業史 자료들 등등인데, 이거 봐라, 나 같은 역사 덕후로 하여금 듣는 것만으로도 콧구멍이 벌렁벌렁하게 만드는 자료들이다.


5. 그래서 나는 사료 덕후가 되고 싶다. 재능도 성실함도 부족한 탓에 '사료를 (많이) 읽는 덕후'는 못 되겠지만, 발품 파는 것은 그나마 잘 하는 편이니 ‘사료를 찾는 덕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더 많은 사료를 찾아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다. 어딘가의 창고(혹은 캐비넷) 속에서 잠자고 있는 사료들과, 또 그 사료들이 세상에 나와서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들과, 또 그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열어줄 가능성이 얼마나 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막 좋아진다.


  나 역시 앞서 말한 발견 외에 이와쿠라사에 소장된 성교聖敎(경전류)의 지배紙背에서 가마쿠라 시대의 문서를 발견하는 등 귀중한 공부를 했다. 이와 동시에 수많은 실패를 통해, 필설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10년간 고문서를 정리·연구하고 현지 조사하면서 오쿠노토 지역과 도키쿠니 가문에 대한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 근세사와 일본 사회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일본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p. 131.)


ps. 이와 관련하여 지역의 어느 기관과 접촉하여, 그 기관의 창고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자료를 보러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내가 요새 그 생각만 하면 두근두근해서 잠도 잘 안 오고 막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기분은 아주 좋은 상황이다. 오예.


ps2. 아래 부분은 읽다가 재미있어서 메모해둔다. 그 시절에는 연구자에게 그림실력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ㅎㅎㅎ


(전략) 그리고 고미가 니시즈에 간 반나절 동안, 나는 자전거를 타고 염원하던 다라노쇼를 찾았다. 조용한 산골 촌락의 경관을 서툰 솜씨로 스케치했는데 지금은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사진기가 없던 그 시절에는 이런 능력이 요구됐다. (pp. 198~199.)


교정.

45쪽 4줄 : 아질Asyl

175쪽 18줄 : 아질(도피처) (45쪽과 175쪽의 설명 방식이 다름)

142쪽 각주1번 : 난보쿠초시대南北朝時代

238쪽 각주1번 : 남북조 시대 (142쪽과 238쪽의 표기가 다름)

210쪽 18줄 : 깃카와 도시타다(가나가와대학 법학부 교수, 일본상민문화연구소장) : 틀린 것은 아니지만, 처음 등장한 인명이 아니므로 굳이 괄호 안에 설명을 넣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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