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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想나부랭이

인문학협동조합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 후기

Dog君 2018. 8. 5. 18:45

○ 와. 결국 줄글 완성 성공. 완성도를 떠나서, 일단 썼다는 것만으로 스스로가 대견하다. 고생했다. 잘했어.


  내 전공은 역사학이다. 비록 잘 하지는 못 하지만 공부하는 것은 여전히 즐겁기 때문에(물론 글 쓰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다)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운 좋게도 그 언저리에서 밥벌이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어찌 됐건 앞으로 한참동안 ‘역사학’을 가지고 지지고볶아야 할 팔자라고 하겠다.


  뉴미디어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학은 아마도 전통legacy에 좀 더 가까울 것 같다. 역사학이라고 하면, 갓 쓰고 수염 기른 할아버지가 퀴퀴한 냄새 풍기는 문서를 한 장씩 들춰가며 진작에 죽고 없어진 사람들에 대해 ‘엣헴-’하고 한 말씀 보태주시는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나. 물론 2018년의 역사학이 이런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2018년의 역사학이 2018년의 미디어 환경을 충실히 잘 따라가고 있나 하면, 또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상언어(유튜브 등)와 짧은언어(SNS)가 텍스트를 압도하고 있는 요즘 시대와, 깊고 치밀한 논증을 미덕으로 삼는 역사학 사이에는 쉬이 넘기 힘든, 거의 뭐 아마존강 수준으로 벌어진 간격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격을 좁혀보려는 역사학의 호소는 절절하다. 인문학은 위기입니다, 인문학을 사랑합시다, 인문학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책을 읽읍시다, 깊이 생각합시다, 지적으로 부지런해집시다...


  이들 주장은 다양한 맥락과 형태로 전개되지만 작금의 세태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하지만 나는 영상언어와 짧은언어로 대변되는 작금의 환경을, 일종의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쪽이다. 인문학의 힘으로 바꿔내야 할 병리적인 세태가 아니라, 인문학이 적응해야 할 환경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내가 뉴미디어 비평 스쿨을 수강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역사학이 처한 조건/환경이 대체 무언지 궁금했다. 과천에서 퇴근하고 제기동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내려오는 강행군을(집에 오면 다음날이 된다;;;) 기꺼이 감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한 수고를 감수하고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간격은... 아니, 그건 간격이라 말할 수도 없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그냥 완전히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아니, 너 임마 그걸 이제 알았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는데, 적어도 나한테는 굉장히 큰 깨달음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질서가 다르다는 말은, 온라인을 오프라인의 확장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되고, 오프라인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온라인에 접근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당장 관계를 맺는 방식만 해도 엄청 다르다. 2강의 권보연 선생님에 따르면, 이미 00년대 중반부터 ‘소셜’미디어/‘소셜’네트워크를 ‘게임’의 문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2강에서 권보연 선생님이 말한 "게임적 구조"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다소 모호하다. (손 들어 질문할걸... ㅠㅠ 왜 이런건 다 끝나고 나서 생각나는 걸까...) 일단 “게임적 구조”를 (내 마음대로) 1) 상대와의 승부, 2) 상대에게 표현, 3) 미션클리어(=업적달성) 정도로 정의해 보자. 얼핏 봐서는 그냥 현실에서 우리가 수천년 간 해왔던 것처럼 보이지만(다시 말해, 오프라인에서의 놀이를 온라인에서 반복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중간에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피드’의 도입이다. 권보연 선생님에 따르면, 싸이월드는 각자의 공간을 방문하는 구조(오프라인의 인간관계와 유사)이지만, 페이스북은 내용을 전달해주는 공간인 ‘피드’(어쩐지 ‘푸시’ 개념이 더 친숙한 나는 아재;;;)를 도입하여 온라인에서만 구현 가능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치지 아니할 수 없었다.)


* 여기서 잠깐, 정말 쓸데없는 잡생각 하나 더하자면. “SNS will be a more long lasting MMORPG.”라는 Allen Barney의 언급을 실은 웹진의 표지그림은 아타리2600의 컨트롤러이다. (살짝 스쳐지나간 거라 확실치는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와, 이거 꽤 의미심장하지 않나(...고 묻기 전에, 그걸 알아챈 나는 대체 얼마나 아재인 건가...). 1스틱 1버튼으로 이뤄진 게임컨트롤러의 원형이자 아날로그 방식으로 움직이는 바로 그 컨트롤러. AVGN식으로 표현하자면, 컨트롤러에 괴상한 XX랄 해놓지 않은 바로 그것. SNS의 게임화를 예언한 2006년 웹진의 표지에 여전히 아날로그 컨트롤러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그 당시 시점에서 가장 주목받는 SNS였던 싸이월드의 아날로그적 구조와 기묘하게 연결되는 듯 해서 보는 순간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그게 아타리 2600의 컨트롤러가 아니라면, 이 모든 이야기는 말짱꽝...)


  그러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이러한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1강의 이재현 선생님이 사용했던 ‘탈구dislocation’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90년대 말 이후 우리가 온라인에게 거는/걸었던 기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모든 최종이용자들이 동등하고 자유롭게 연결되리라는 초연결/집단지성이라는 이데아적 상상, 다들 하지 않(았)나? 일세를 풍미했던 ‘web 2.0’ 개념만 해도 그렇다. (나는 왜 이렇게 아재스러운 표현만 자꾸 떠오를까)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는 완벽한 쌍방향 네트워크의 꿈, 권력이나 해커 같은 ‘악마’가 인위적으로 개입하지만 않으면 평화롭고 평등한 온라인 생태계가 만들어질 거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전국민이 손바닥에서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게된 지금 이순간까지도 그런 이상향은 도래하지 않았다.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제약/문제를 극복하기는커녕 분절/분단/폐쇄라는 오프라인의 문제를 온라인에서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이재현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소셜’미디어/‘소셜’네트워크는 사회적이지도 교호적이지도 않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재현 선생님은 ‘소셜’미디어/‘소셜’네트워크/온라인 관계망이 사람사이[人間]를 수량화/계량화/물신화하고는 있지 않은지, 온라인 관계망에 의해 오프라인 관계망이 ‘식민화’되고 있지는 않은지(그는 이를 “소셜리티의 위기”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되물었다. (이 지점에서 이재현 선생님과 권보연 선생님의 전망은 비관과 낙관으로 엇갈리는 듯 하다.)


  이재현 선생님의 진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보니, 내 스스로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아니, 아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서로 다르고, 온라인이 오프라인의 단순한 확장도 아니라매... 그런데 왜 다시 두 가지를 연결시켜서 이해하려고 하는 거냐... 그에 대한 답은 3강의 오영진 선생님이 짤에 접근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짤방의 사회학/시대정신을 논하는 오영진 선생님은, 짤을 당대의 현실과 망딸리떼를 반영하는 일종의 ‘사료’로 간주한다. 이 전제를 수긍하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전혀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별개의 세계이되, 서로 영향을 주고 받거나, 혹은 서로가 서로에게 반영되기도 한다...라는 답변이 가능해진다. 아니 뭐... 그건 너무 당연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주체’는 같으니까. 온라인에 있는 것도 ‘나’고, 오프라인에 있는 것도 ‘나’니까.


  그런 전제 위에 쌓아올린 ‘짤방의 사회학’이란,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대하는 태도라고 받아들여도 무방하겠다. 자, 그러면 짤방에 반영된,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대하는 태도란 무엇인가. 오영진 선생님에 따르면, 짤의 핵심은 ‘(맥락을) 자른다’에 있다. 전체 맥락에서 잘라내고, 더 나아가 (인문개가 그러하듯이) 다른 맥락과 이어붙여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오영진 선생님은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덧붙이는데, 짤은 패러디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짤에는 원본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뜻이다. 원본이 가지고 있던 맥락을 완전히 제거하여, 결과적으로는 원본의 아우라까지 없애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터 벤야민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는 벤야민을 1도 모르기 때문에 그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 안 됩니다.) 원본에 대한 존중이 없는 시대, 과연 텍스트의 권위는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텍스트에 대한 권위를 빼면 절대 안 되는 게 역사학인데... (역사학의 미래를 찾으려고 여기까지 온 저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구 울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미래는 없구나 싶어서.)


  맥락에 대한 거부, 그리고 권위에 대한 반대. 이 두 가지에 관해서 4강의 류진희 선생님과 6강의 이길호 선생님은 놀랍도록 비슷한 결론을 도출한다. (두 분이 미리 짰나...싶을 정도) 온라인 페미니즘의 계보와 디씨인사이드의 역사를 각각 살핀 두 강의 모두 온라인 커뮤니티의 공통 특징으로 스스로에 대한 해석을 거부하는 것과 스스로의 맥락을 삭제하는 것을 꼽는다. 역사와 맥락,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해석조차 거부하기 때문에(따라서 사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절대 금해야 하는 일이 ‘친목질’이다. 이는 오프라인의 위계를 (어떤 식으로든) 재현/반복하는 것이고, 그러는 순간 익명성과 평등성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의 그것과 적극적으로 절연하고,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든다...는 게 온라인이다, 마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워마드가 오프라인에서 행동을 조직하는 방식이 온라인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고.)


  근데 이 ‘맥락이 없다’는 거, 생각보다 머리 아프고 무서운 일이다. 약간 말장난처럼 되는 것 같긴 하지만... 머 암튼 내가 이해한대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 내용은 6강에서 빌어왔다.) 먼저, ‘맥락 없는 위트’조차도 그것이 만들어진 ‘맥락’이 따로 있다는 점을 전제하자. 달리 말하자면, ‘맥락 없는 위트가 통용될 수 있는 맥락’이 따로 있다는 거다. 따라서 그 ‘맥락 없는 위트’란 통상적으로는 어떤 특정한 ‘맥락’ 위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근데 내가 뭐라 그랬냐. ‘맥락이 없다’고 그랬잖아. 그렇기 때문에 ‘맥락 없는 위트가 만들어진 맥락’조차 생략된다 이거다. (와, 쓰고 보니 정말... 진짜 말장난 같다;;;) 모든 맥락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게 뭐냐, ‘맥락 없는 위트’만 남아서 이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보편적인 문법이 된다는 거다. 온라인의 위트가 하위문화로 남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법이 된다는 것. 나는 이게 그렇게 무섭다 이기야.


  역사가 뭐냐.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맥락’ 아이냐. 근데, 이 ‘맥락’이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는 거다. 어... 그러면 이제 역사학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엉엉, 우리 망했어요. (역사학의 미래를 찾으려고 여기에 온 저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한 번 마구 울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주 그냥 좆됐구나 싶어서.) 자, 이렇게 뉴미디어 시대에 역사학이고 나발이고 우리는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안녕, 역사학. 끗.


  …일뻔 했으나, 물에 빠져 숨 넘어가기 직전인 나에게 던져진 지푸라기가 5강에 있었다. 5강의 강신규 선생님은 인터넷 방송을 둘러싼 담론을 1)윤리, 2)산업, 3)표현과 연결의 매체라는 세 가지로 정리했는데, 이 중 지푸라기(;;;)는 세 번째였다. 그는 아즈마 히로키(뉘신지;;;)의 논의를 빌어, 인터넷 방송이 큰 이야기보다는 작은 이야기를, 그리고 개별적이면서 평범하고, 잊혀지거나 소외된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는 큰 의미가 없고 그 대신 일상을 보여주는 텍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연결감’이 더 중요하다는 거다. 우리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통적인 미디어가 하지 못하던 것이다. 전통적 미디어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구르님의 소회도 이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니, 이 분들도 서로 짜고 나왔나...)


  자, 여기까지 오니 얼추 결론이 보이는 것도 같다. (우오오오오...) ‘뉴미디어’를 추동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무엇인가. 아마도 소통과 연결의 욕구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 구조의 측면에서는 더 많은 소식을 효율적으로 접할 수 있는 ‘피드’가 살아남았을 것고, 2) 관계의 측면에서는 평등하고 고른 관계맺음을 위해 ‘맥락’과 ‘친목질’을 거부하는 것일테며, 3) 소재의 측면에서는 작은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것일테다. 그러면 “역사학이라는 전통적 콘텐츠legacy contents는 변화하는 플랫폼에 어떻게 적응할 건가”라는 나의 애초 고민은 “역사학은 소통과 연결의 욕구에 과연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결론에 가까이 간다 싶더니 결국 또 돌고 돌아 질문으로 온 것 같아서 좀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불과 6강 만에 여기까지 온 건 쫌 대단한 것 같다. (자뻑. 우훗.) 과천-제기동-수원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을 6번 반복한 끝에, 콘텐츠가 어쩌고 플랫폼이 저쩌고 하는 낯선 질문을, 소통이 어쩌고 욕구가 저쩌고 하는 그나마 친숙한 표현으로 번역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또다시 내 앞에는 질문이 남았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러 또 길을 떠난다... (네, 이것은 열린 결말입니다.)


ps. 하지만 감상문을 이렇게나 길게 쓴 것을 보니(짧은언어의 시대라매...) 이 시대에 완전히 적응하려면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다;;;


ps2. 줄글을 쓰기 위해 정리해둔 강의별 메모는 아래와 같다.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 1강 메모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 2강 메모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 3강 메모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 4강 메모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 5강 메모

뉴미디어 비평 스쿨 제2기 6강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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