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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은행나무,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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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은행나무, 2016.)

Dog君 2018. 8. 13. 07:34


1. 세다 세다 하더니 정말 세네.


2. 덱스터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덱스터처럼 끝나다니.


  닭이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웃음이 터졌다. 이후로도 종종 키득거렸다. 제 패거리들을 속이고 호텔로 뛰어들어간 리틀 제가 신나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에선, 낄낄 소리까지 내서 웃어댔다. 웃다 문득 웃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서 검은 물방울처럼 반짝이는 두 눈은 내게 묻고 있었다. 뭐가 우습니?

  어머니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영화가 끝난 후,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해진도 앞만 보며 걸었다. 나는 또 두 사람의 궁둥이만 보며 뒤따라갔다.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어 골이 아팠다.

  “찜찜하다.”

  어머니는 차에 도착해 시동을 건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게 실화라는 게 무섭고, 산다는 게 슬프기도 하고......”

  비로소, 어머니가 영화관 안에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 이유가 이해됐다. 내겐 신나고 짜릿했던 영화가 사실은 찜찜하고 무섭고 슬픈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어느 지점에서 무서워하고 슬퍼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해진은 나와 시선을 맞대왔다. 그렇지?라고 묻는 눈이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 얘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다만 녀석의 덩치가 나보다 두어 뼘쯤 커 보였다. 나와 불과 한 살 차이였건만, 열 살쯤 차이가 나는 형 같았다. 심지어 어머니와 대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해진은 다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 (pp. 66~67.)


  일기인지 메모인지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을 펴서 새삼스러운 심장으로 들여다봤다. 뼈 스물일곱 개, 관절 스물일곱 개, 인대 백스물셋, 근육 서른넷, 감촉을 읽어들이는 열 개의 지문. 밥 먹고 씻고, 물살을 가르고, 사랑하는 것들을 만지던 손, 하룻밤 새에 살인 도구가 된 내 손.

  나는 생각을 해보려 애썼다. 난파당한 스물여섯 해 내 삶에 대해, 문 밖에 들이닥친 생의 12월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그 많은 생각 중에 나를 구원해줄 기도문 같은 건 없었다. 희망은 미끄덩거리는 비누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수압처럼 무겁고 서풍처럼 싸늘한 두려움이 몸을 조여왔다. 돌아갈 길도, 수습할 여지도 없다는 점에서 절망적인 두려움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추측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직접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나를 봐야 한다고 여겼다. 헬로야 제가 헬로인지 몰라도 헬로로 살 수 있겠지만 나는 인간이었다. 내가 누군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고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모든 걸 알고 난 지금에야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알겠다. 무엇을 알든, 무엇을 하든 나는 살아갈 길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p. 216.)


  나는 도랑에서 기어나왔다. 셔츠를 다시 허리에 묶고 도랑가에 내던져진 총을 집어 든 후, 절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불길 위를 달리는 것처럼 발바닥이 뜨거웠다. 몸에 땀이 마르고 혀 밑으로 신 침이 돌았다. 통증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마음 깊은 곳에선 어떤 결의가 차오르고 있었다. 잘못된 결과를 바로잡아야 했다. 아니, 잘못을 바로잡아야 했다. (p.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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