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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 1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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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 1부

Dog君 2018. 12. 25. 15:09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마 역사를 소재로한 격언 중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것 아닐까 싶습니다. 문장은 짧지만 ‘역사’와 ‘미래’가 대비되고 있고 메시지도 선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장,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의 존재이유를 묻는 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답변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이 문장은 단재 신채호가 남긴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선 말부터 식민지기에 이르기까지 비타협적이고 견실한 운동가의 일생을 보낸데다가 역사학자로서도 상당한 저술을 남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채호가 저런 말을 남겼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인터넷이고 방송이고 할 것 없이 이 문장의 창작자가 신채호라는 명제가 거의 정설처럼 굳어있습니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대체로 신채호가 남긴 표현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퍼져있습니다. (무한도전, 2013년 5월 11일)


  저의 의문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본 범위 내에서, 신채호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거든요. 제가 2007년에 학부를 졸업하면서 낸 논문의 주제가 신채호였는데(엣헴-), 그 논문 준비하면서 저런 글을 읽었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제 학부졸업논문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좀 공들여 쓴 발표문’ 수준에 불과한지라 제가 신채호를 아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죠. 제가 신채호의 저작 전체를 꼼꼼하게 읽은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한 번 궁금증이 드니까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 찾아보니 저 말고도 이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분들이 꽤 있더군요.* 그래서 일단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설들을 찾았는데요,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 문제를 엄격하게 다룬 최초의 글은 매일경제에 연재된 이문영 선생님의 '물밑 한국사' 52회 「아쉽게 저작으로 남지 못한 진일보한 신채호의 역사관」(2017년 6월 19일자)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라는 이 글의 제목은 이 기사를 소개한 저자의 블로그 글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좀 더 다듬어져서 『유사역사학 비판』(역사비평사, 2018.)의 84~89쪽에도 수록되었습니다.



무한도전은 TV특강 특집에서 2주에 걸쳐 이런 자막을 내보냈죠. (무한도전, 2013년 5월 18일)


  첫 번째는, ‘신채호 설’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이죠. 요지는,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에 이 문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그런 문장, 아니 그거랑 비슷한 문장조차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선상고사』의 전체 본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이 역시도 출처가 명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이문영 선생님이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지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할진저"라는 문장이 『독사신론』에 등장하기는 한다고 지적하신 것을 참고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 역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와 어감과 표현 측면에서 차이가 큽니다. 따라서 두 문장을 직접 연결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신채호가 남긴 저술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정말로 그의 글 중에서 저런 문장이 발견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문단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은 외국에서도 유명하기 때문에, 이 문장을 신채호의 독창적인 발언으로 볼 수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설은 일단 틀렸다고 결론을 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후 무한도전은 같은 문장의 출처를 윈스턴 처칠로 밝힙니다. 신채호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두 번째는, ‘윈스턴 처칠 설’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으로 널리 알려진 윈스턴 처칠이 이 말을 했다는 것인데요, 원문은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과거를 잊은 민족/국가**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합니다. 원문까지 함께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꽤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 말을 정확히 언제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1965년에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1940년 의회 연설에서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65년에 했다는 주장부터 따져보자면, 이건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1965년 1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15일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상태였다는 점(심지어 이것이 세 번째 발병이었습니다)을 생각하면 1965년에 그가 이 말을 남겼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그의 연설문집에서도 이 문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1940년 의회 연설에서 했다는 이야기도 믿기 어렵죠. 다만 ‘윈스턴 처칠 설’이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외국에서 굉장히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표현은, 한국 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널리 통용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 잘 아시다시피 ‘nation’이라는 단어는 ‘민족’과 ‘국가’를 모두 의미합니다. 정확히 어느 쪽으로 번역할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데, 제가 인용하는 짧은 문장으로 저자의 의도나 문맥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nation’은 ‘민족/국가’로 번역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미국의 소설가인 ‘데이비드 맥컬러프David McCullough 설’입니다. 그가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can function no better than an individual with amnesia(과거를 잊은 민족/국가는 기억을 잃은 사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역시도 출처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스페인의 철학자인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설’입니다. 그가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전체 5권으로 펴낸 In the life of reason이라는 책에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것을 반복하게 된다)”라고 했다는 것이죠. 1999년 6월 28일자 『매일경제』에 실린 칼럼 「위기를 다시 만들고 있다」에서도, “미국의 철학자인 조지 산타냐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대해 망각하는 사람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한다.””라고 해서, 이 설을 인용하고 있구요.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출처로 지목된 In the life of reason을 살펴봐야겠지만, 이 책이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데다가 제가 철학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좀 더 파고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5권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디에 나오는지를 그 누구도 특정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이상의 네 가지 설은 나무위키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항목에도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이집트의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무하마드 후세인 헤이칼Muhammad Husayn Haykal 설’입니다. (이 주장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933년에 “One who has no past has no future(과거가 없는 자에게는 미래도 없다)”라고 했다거나, 1935년에 “A nation which forgets its glorious past has no right to aspire to a glorious future(영광스러운 과거를 잊은 민족은 영광스러운 미래를 동경할 자격이 없다)”라고 했다는 것이죠. 링크한 블로그의 주장처럼 당시의 이집트 상황을 생각하면,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주장 역시 출처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여섯 번째는, 중국의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아이웨이웨이Ai Weiwei艾未未 설’입니다. 그는 평소에도 중국의 정치권과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로 유명하다고 하는데요, 그가 SNS 등 각종 온라인 공간에 남긴 짤막한 글들을 모아서 프린스턴대학출판부에서 2011년에 Weiwei-isms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책에 “If a nation cannot face its past, it has no future(어떤 민족/국가가 과거를 대면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이 들어있습니다. 이 책 역시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라서, 그가 어디에서 이 말을 처음 꺼냈고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프린스턴대학출판부의 공식 소개에도 인용된 것을 보면, 아이웨이웨이가 이 말을 한 것만큼은 틀림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설들 모두 출처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누가 가장 먼저 이 말을 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한국에만 있는 격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국 외에도 영국, 미국, 스페인, 이집트, 중국 등 거의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이 이 문장의 출처로 이야기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 문장은 특정한 누군가의 창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문화에서 흔하게 통용될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문구라는 거죠. 비유하자면, 역사와 관련된 흔한 ‘속담’이라고나 할까요. 보통의 속담이 으레 그러하듯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 역시 여러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설사 이 문장을 신채호의 저작에서 찾아낸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신채호의 문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더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의 창작자로 신채호가 지목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신채호는 이거랑 비슷한 이야기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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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 3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을까?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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