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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농업사연구 [II] (김용섭, 지식산업사, 200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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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농업사연구 [II] (김용섭, 지식산업사, 2007.)

Dog君 2021. 5. 21. 00:30

 

  '역사가'라고 하면 어떤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까. 비전공자라 하더라도 김부식, 박은식, 신채호, 사마천, E. H. 카, 아놀드 토인비 같은 이름 중 적어도 하나둘은 어렵지 않게 댈 수 있을 거다. 다른 이름이 더 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지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시대의 역사가'를 말하려고 하면 막상 떠오르는 이름이 몇 없다. 분명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역사연구가 여전히 이뤄지고 있을텐데 말이다.

 

  나는 우리시대의 역사가를 말할 때, 김용섭의 이름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농업과 농업경제의 역사에 천착한 그의 연구는 단지 연구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농업사 연구는 '식민사관'을 극복하는데 특히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방대한 연구를 아주 간략하고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조선후기에는 수리시설의 확대와 수리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임진왜란으로 인한 노동력과 농경지의 부족을 비교적 이르게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앙법은 벼보리 이모작도 가능하게 했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전체적으로 상승하면서 담배, 고추 등 상품작물이 활발히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업의 변화는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했는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농민은 이른바 '경영형 부농'이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장했고, 반대로 여기서 도태된 빈농층은 토지를 잃고 임노동자로 전락했다. 봉건적인 농업사회의 해체와 시장경제의 발달을 통해 부를 쌓은 경영형 부농은 자연스럽게 서구의 부르주아 계급을 떠올리게 한다. 토지를 잃은 빈농이 임노동자가 되는 것은 인클로저 운동을 떠올리게 하고. 즉, 서구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이 근대 자본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젖힌 것처럼 조선에서도 경영형 부농의 등장으로 비슷한 역사적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농민층의 분화는 이른바 '근대화의 두 가지 경로'로 이어집니다. 개화파 등으로 대변되는 '위로부터의 근대화' 세력과 동학농민군 등으로 대변되는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세력의 분화와 길항이 바로 이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정리하고 보니 개념과 구도가 상당히 친숙하다. 글타. 우리가 중고등학교 한국사시간에 배웠던 자본주의 맹아론이니 내재적 발전론이니 하는 이론이 대체로 김용섭의 이러한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거다. 그러니 비록 '김용섭'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시나브로 그의 학설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거.

 

  물론 그의 연구를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있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표준으로 삼아 한국사의 경험을 거기에 기계적으로 끼워맞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부터 당장 드니까. 물론 그가 그러한 관점을 택한 것에는 나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하지만 선배 연구자의 이론에 대해 계속 의문을 제기하고 부족한 부분을 메워나가는 것이 후배 연구자의 역할 아니겠나. 그래서 이영훈*을 비롯한 많은 후배 연구자들이 그의 연구에 대한 반론과 보론을 제기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 점점 깊어졌다.

 

*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이영훈 맞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의 흑화를 안타까워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영훈은 김용섭이 세워놓은 거대한 체계에 대해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실증적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사 전반에 대한 새로운 설명체계의 가능성을 모색했고. 거기까지는 상당히 건강한 논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순간부터 논쟁은 소모적이고 이분법적으로 전개되었고,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는 그대로다. 주장과 반론이 오가면서 더 나은 이해가 만들어지는 정-반-합이 아니라, 그저 정-반-정-반만 반복되는 중...

 

  김용섭의 모든 글은 지식산업사에서 낸 '김용섭 저작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후기농업사연구 [II]』는 이앙법과 이모작의 도입, 경영형 부농의 성장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1960년대에 처음으로 발표된 글들이라 지금 보기에는 문투도 어색하고 지금은 잘 쓰지 않은 한자 표현이 난무하지만, 끝판왕 함 깨보겠다는 마음으로 찬찬히 도전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아니, 꼭 저 까다로운 책을 굳이 도전까지는 안 하더라도, 우리시대의 역사가 김용섭이라는 이름만큼은 꼭 기억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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