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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전력산업사, 1898~1961 (오진석, 푸른역사, 20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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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전력산업사, 1898~1961 (오진석, 푸른역사, 2021.)

Dog君 2021. 5. 23. 00:05

 

1.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특히 저자가 누군지를 알고 가장 크게 절망했는데, 한국 전력산업의 역사에 대한 저자의 내공으로 볼 때 내가 그와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구해서 읽어보니 (두 권 샀다...) 과연, 저자의 심후한 내공에 압도당해버렸다. 지금 쓰고 있는 학위논문을 꽤 많이 고쳐야 한다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엇을 피해서 어디로 향해야할지 좀 더 명확해진 느낌도 든다. 앞서 걸어간 이들이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것을 주워담는 것도 뒤따르는 이들의 몫이라고 자위해본다.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은 꼭 내가 해내고 말리라고 다짐 또 다짐하면서...

 

2. 사실 전력산업의 역사...라고 하면 이 책이 완전히 처음인 것은 아니다. 당장 포털만 검색해도 약사略史 수준의 글은 널리고 널렸고, '전기산업 XX년사', '한국전력 XX년사' 류의 책들도 수없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굳이 나서서 그 역사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전력산업의 역사를 꿰뚫는 시간적·공간적 맥락을 드러내는 것이 연구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이 독자에게 의미있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고.

 

3-1. 이 책이 말하는 한국 근현대 전력산업사란 아마도 국가성장 내지는 산업발전의 방향성의 맥락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크게 3개 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장은 공통적으로 전력사업체의 소유와 경영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예컨대 대한제국기 한성전기를 둘러싼 이용익과 친미개화파의 대립은 근대화(산업화)의 방향에 대한 노선 차이에 가깝고, 식민지기 총독부의 전력산업정책 역시 통제체제 구축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들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해방 이후 전력산업을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도 이 책이 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 역시 전력사업체의 소유와 경영을 어떤 식으로 개편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3-2. 여기서 저자가 특히 섬세하게 신경을 썼다고 생각되는 것은,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논쟁을 '국영 대 민영'으로 단순화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실제 과정 속에서는 '국가의 통제'와 '민간자본의 자율성'을 두 축으로 논의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그 결과물이 100:0 혹은 0:100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소유과 경영을 둘러싼 각 시기의 모색의 결과가 국가권력과 민간자본이 절묘한 지점에서 타협하는 결과로 이어졌음을 강조한다.

 

  이용익과 친미개화파가 이처럼 극도로 대립했던 이유는 단순히 권력다툼으로 인한 정적에 대한 적개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양자 간에는 근본적으로 근대화의 방법에 관해 극복하기 어려운 견해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개화파 관료들은 군주권의 제약을 통한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이상으로 여기며 갑오개혁 이래 민간 중심(외자 포함)의 상공업진흥정책을 적극 추진하고자 하였지만, 이용익은 황제의 무한한 군권을 바탕으로 한 절대군주제를 근대화의 방안으로 생각하여 황실 산하 궁내부 주도로 각종 근대산업육성정책을 추진하고 자신이 직접 관련 기구를 통제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이용익의 입장에서 보면, 한성전기는 친미파가 황제를 감언이설로 속여 무분별하게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설립한 회사로서 미국인들에게 각종 이권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세력을 강화해 나가는 수단이므로 결코 용인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이용익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콜브란측의 경영 확대를 저지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한성전기의 경영권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생각을 가지고 이에 대응하고 있었다. (66~67쪽.)

 

  새로이 제정된 조선전기사업령은 민영회사의 독점에 의한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감독체제의 구축과 새로운 전원개발을 위한 전력회사의 보호·조장책이라는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자의 측면에서 총독부는 요금, 사업의 창시·폐지·합병·양도, 공작물의 변경 등에 인가제를 적용하고 사업 전반에 걸친 감독권도 보유하게 되었다. 공익상 요금의 인가제를 유지하면서 필요에 따라 변경을 명령할 수 있었고, 엄격한 회계상 감독과 이익배당의 제한도 가능하였다. 공익에 반한 역원役員의 행위를 규제하고 중역의 개임改任 명령권도 가졌다. 업무 및 공작물의 검사를 통한 개선 명령권도 확보했다. 후자의 측면에서는 공급구역과 발송전의 중복을 금지해 사실상 독점을 인정했고, 발전지점과 전기 수요지의 간격이 커져 장거리 송전을 위해 도로나 타인의 토지를 사용할 필요가 많아짐에 따라 전기회사가 일정한 수속을 밟아 상당한 보상을 하면 토지수용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런데 법령은 전체적으로 보아 감독의 측면보다 보호·조장의 측면이 강했다. (...) (197~198쪽.)

 

  이제 한국의 전력산업은 발송전을 통일한 조선전업과 지역별로 통합한 4개의 배전회사(경성전기, 남선합전, 북선합전, 서선합전)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가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한 한국의 전력국가관리는 일본의 그것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 (...) 일본에서는 발송전통합회사인 일본발송전이 국영인 데 반해 조선전업은 사실상 닛치츠가 주도하는 민영회사였으며, 일본에서는 전력산업의 감독기구인 전기청이 조직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전기국이 업계의 반대 때문에 설치되지 않았던 것이다. (281~282쪽.)

 

  요컨대, 장면정권은 전기3사를 한 기업으로 통합해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민간 발전회사를 다수 허가할 계획이었다. 사실상 전력산업의 국영기업과 민영기업의 공존, 경쟁체제를 구상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장면정권에서 추진한 전기3사 통합방안은 그간 치열하게 대립했던 국영강화론과 민영론을 합작 절충하여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기존에 전기3사를 통합해 대한전력공사를 창립하려 했던 방안과는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었다. (368쪽.)

 

  그러나 군사정권이 시간 단축을 위해서만 장면정권의 한국전력주식회사법안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두 정권이 지향하는 전력산업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장면정권은 기존 전기3사를 통합하여 국영기업으로 경영하되 다수의 민간 전기회사들의 진입을 허용해 국영과 민영 기업의 공존, 경쟁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군사정권도 이러한 방향에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례로 군사정권에서는 1961년 말에 양양군 속초읍에 2,600kW 용량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려 했던 동해전기를 비롯해 울릉도에 1,500kW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려던 한국전업공사와 연천군에 1,100kW 규모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려 한 대한전원개발 등 5곳의 민간 전기회사에 인가를 내주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군사정권은 집권 이후 장면정권을 무계획적 자유경제체제라고 비판하고 자신들은 강력한 계획성을 가미한 자유경제체제라며 차별성을 부각하려고 애썼지만, 전력정책에 한정해서 볼 때 두 정권이 추구한 정책의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정책의 결단과 실행력 측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요컨대, 남한의 전력산업은 당분간 제2공화국에서 구상한 국영과 민영 기업의 공존, 경쟁체제라는 큰 틀 속에서 발달경로를 모색해 나가게 되었다. (381~382쪽.)

 

4-1. 절묘하게 중간지점을 짚어내는 이런 감각은 (이 책의 근간이 되기도 한) 저자의 박사학위논문과는 약간 다른 듯이 느껴진다. 1945년까지를 다룬 박사학위논문은 결론에서 전력산업에 대한 식민권력의 제도적·이념적 통제체제가 2차대전 말기에 이르러 강력한 국가주의적이라고 아주 강하게 규정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에 비해 상당히 신중한 입장이다. 해방 이후 부분에서도 비슷한데 이 책이 주로 공박하고 있는 "3사통합=국영"을 이야기했던 당사자로서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의 통찰이 역사적 진실에 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장면정권기 전기3사의 통합안을 통과시킬 당시의 국무회의 안건철을 보면 통합한전과 전력산업의 장기적인 민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 역력히 드러난다.

 

4-2. 그런 점은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고, 그래서 그걸 다시 정리해보겠다고 하는 중이었는데 이 책이 나와서 살짝 난감하게 됐다...는, 머 이런 상황;;

 

  예를 들어 본 연구에서 다루는 1948년부터 1961년까지를 한정해 보더라도 남한정부의 전원개발계획이 언제, 어떻게 작성되었고, 시기별로 어떠한 변화가 생겼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지가 명확히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다. 그리고 전기3사 통합과 관련해서도 1961년 한국전력주식회사가 탄생되기 전까지 비슷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는데, 시기별로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들이 입안되었으며 그러한 정책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었는지를 면밀히 추적해 정리하지 못했다. 전기3사 통합과 관련된 법안의 주요 내용도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기존 연구에서 이 시기 전력산업구조 개편과정을 '전기3사 통합=국영'으로 단순 정리하여 국영론과 민영론의 갈등과 대립으로만 좁혀서 이해한 방식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국영론과 민영론의 대립을 통해서 이 시기 전력산업의 문제를 파악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을 지나치게 부각하면 국영과 민영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기 어렵게 된다. 비록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였다고 해도 실제로 그 안에서 의미 있는 변화들이 적지 않게 일어난 경우도 있었는데, 그간에는 이러한 변화들이 연구자의 관심 밖에 놓여 버렸다. (30~31쪽.)

 

4-3. 3사통합을 곧 국영으로 등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지적에 적극 동의한다. 다만 저자의 결론에 대해 아주 살짝 머뭇거리게 되는 지점도 있기는 있다. 저자는 장면정권과 군사정권이 추진했던 전력산업 개편의 결과를 '국영과 민영의 공존'으로 파악하는데, 실제로 민간자본이 전력산업에 유의미한 규모로 진입하는 것은 그보다 한참 시간이 지난 6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즉 전력산업의 개편을 이야기할 때 1960년대 초반까지만을 다룬다면, 민간자본과 민영화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 논의(혹은 수사rhetoric)에서만 그러했던 것인지 실천의 수준에서도 유의미한 정도로 그러했던 것인지 검증이 어렵지 않나 싶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전력산업 개편 논의의 귀결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초중반까지 연구범위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째, 쓰면 쓸수록 자기변명이 되는 것 같다;;)

 

5. 물론 그런 아쉬움은 책 전체의 성취에 비하면 작은 것이다. 아직도 한국사에서 각 산업분야의 역사는 흡족한 수준으로 연구가 진척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전력산업의 근현대사를 이 정도 밀도로 정리한 것은 굉장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저자 개인에게는 상당한 지적 고민과 고통이 있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성과들은 언제 나와도 반갑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전력산업의 역사'라는 눈벌판을 처음 걸어간 이의 발자국 같은 느낌이랄까. 아마 한동안은 이 발자국을 기준으로 뒤따라오는 이들의 발걸음도 결정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 이처럼 한성전기 자산을 완전히 인수하지 않고 한미합자 형태의 회사로 개편한 배경에는 향후 일본의 외압이 더욱 거세질 것을 대비해서 미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한 광무황제와 중립파의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101~102쪽.)

 

  이로써 1904년 러일전쟁의 와중에 유리한 조건으로 한성전기를 한미합자의 한미전기로 개편하고 경영권을 장악했던 콜브란측은 한때 광무황제의 주권수호외교를 도우면서 한층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광무황제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획득하였지만,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 기운이 농후해지고 일한와사의 등장으로 향후 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광무황제와 제대로 협의조차 하지 않고 일본에 사업을 매각해 버리고 말았다. (...) 매각과정에서 보여 준 콜브란측의 모습은 돈만을 생각하고 신의를 저버린 제국주의 자본가 그것일 뿐이었다.
  이처럼 일한와사의 설립과 한미전기의 매수과정에는 일본정부 차원의 지원과 통감부, 특히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적극적인 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토는 서울의 전등, 전차가 미국인의 손으로 경영되는 것은 '치욕'이므로 한미전기는 '국책상 꼭 손에 넣어야 하는 회사'이며 이 때문에 '일한와사가 어려워질 때는 뭐든지 해주겠다'는 언질을 줄만큼 한국의 전력산업 장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이런 점에서 일한와사는 일본인 민간인들이 단순히 영리추구의 목적만으로 한국에 투자를 기도한 순수 민간기업이 아니었다. (...) 이제 한국의 전력산업은 식민지경제구조 속에서 일한와사전기를 중심으로 급속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 예상되고 있었다. (138~139쪽.)

 

  1911년 3월 6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24호로 전기사업취체규칙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전력회사의 설립과 운영은 총독부의 허가사항이 되었고(제10조), 전기요금은 총독부의 인가를 필요로 하는 인가제가 채택되었다(제18조). (...)
  (...) 이와 함께 전기회사의 설립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했다. 10촉광으로 환산해 1천등 이상의 수요가 예상되는 도시에 대해서는 가급적 속히 설립허가를 내주리고 하였고, 명시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원칙적으로 '1지역 1사업'주의를 채택해 전기회사들의 공급구역이 중복되지 않도록 했다. 사실상 해당기업에 독점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는 조치였다. 또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신규로 발전설비를 주문하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주파수를 60사이클로 규제하기로 했다. 다만 가격이 매우 저렴해 해당기업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면 50사이클도 허가해 주기로 했다. 이는 일본에서 중고 설비를 들여와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였다. (144~145쪽.)

 

  1919년 12월 16일 자본금 500만원(75만원 불입) 규모로 창립된 금강산전기철도(이하 금전)는 강원도 회양군 안풍면의 북한강 상류 화천하化川河에 수력발전소를 건립하였다. 황해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추지령楸池嶺을 관통하는 터널에 의해 동해 쪽으로 흘려보내 급격한 경사와 고낙차를 이용해 발전하는 한국 최초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이었다. (...) 특히 금전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의 성공은 종래 한국은 수력발전 조건이 좋지 않다는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53~154쪽.)

 

  그러나 1910년대 말부터 추진된 금강산전기철도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의 성공은 한국 내에서 수력발전이 절망적이라는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이로써 한국은 종래의 평가와 달리 수력전기가 풍부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로 1920년대에 대규모 수력발전소가 개발되고 장거리 송전이 성공적으로 건설되면서 이러한 희망으느 현실이 되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금전은 1920년대 초 북한강 상류에 수력발전소를 세우고 167km에 걸친 66kV급 고압송전선을 건설해 경성까지의 송전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최초의 장거리 송전이었다. (165~166쪽.)

 

 

  (...) 총독부는 경성전기를 대신해 개발할 민간자본을 물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총독부에서는 강릉수력 개발을 일단 뒤로 미루고, 당초 예비용 발전소로 구상되었던 영월의 화력발전소 건설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 총독부는 먼저 일본의 5대 전력회사(도쿄전등, 도호전력, 다이도전력, 우지카와전기, 니혼전력)로 구성된 전력카르텔인 '일본전력연맹'에 권유해 참여토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 당시 일본전력연맹은 발전용 석탄 확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월과 삼척을 비롯한 한반도의 탄광개발에 참여하길 희망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총독부는 남선지역의 중요 배전회사인 대전전기, 대흥전기, 남선전기, 조선와사전기 등에도 권유해 참여하도록 하였다. 결국 총독부의 주선으로 일본전력연맹과 남선의 배전회사들이 50%씩 투자해 1935년 7월 자본금 2천만원의 조선전력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전력의 설립에 따라 원래 2만kW에 불과했던 영월화력의 발전력은 10만kW로 크게 확대되었고, 강릉수력은 추후에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 (205~206쪽.)

 

  게다가 남부의 핵심 발송전회사인 조선전력은 경영진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면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애초 조선전력은 일본전력연맹과 남선의 배전회사들이 전체 주식의 50%씩을 출자하여 만든 회사였다. 그런데 일본전력연맹은 발전력 증대보다는 탄광개발과 석탄의 일본 반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선의 배전회사들(남선합전)은 수력발전소 개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발전력 증대를 희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양측은 경영방침을 둘러싸고 일찍부터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 그러나 이후에도 회사의 경영방침을 둘러싸고 양측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1939년에 일본전력연맹이 조선전력의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
  (...) 일단 금강개발은 미루고 섬진강 개발에만 착수해 섬진강 하류를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6.2km에 달하는 터널을 통해 동진강 쪽으로 물을 흘려보내 발전하려는 유역변경식 발전소 건설계획을 세워 공사를 시작했지만, 계획대로 진척을 보지 못하던 상태였다. (...) 그러나 조선전력의 영월화력발전소 운전도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영월탄광의 출탄량이 예상했던 양에 미치지 못하고 탄질이 좋지 않아 애초에 계획한 전력량을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남부에서는 북부의 저렴하고 풍부한 수력전기를 사용하지 못한 채 심각한 전력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 '남=화력과 북=수력'의 분리된 두 계통의 송전망에 의한 전력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남과 북의 전원을 연결해 한반도 전역의 통일된 전력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고조되었다.
  (...)
  이로써 드디어 한반도 전역에 걸쳐 통일된 하나의 전력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부의 우량한 수력발전소들과 남부의 영월화력발전소가 연계되면서 남과 북의 전력 불균형 문제를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한쪽 발전소의 운전이 정지되거나 고장이 발생해도 다른 쪽 발전소의 운전을 통해서 이를 해결할 수 있어서 안정성도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북부의 저렴한 수력전기가 장거리 송전을 통해서 남부로 내려오면서 가뜩이나 원가가 비쌌던 남부의 화력전기는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영월화력은 수력발전의 보조적 지위로 전락했던 것이다. (...) (248~252쪽.)

 

  결국 이러한 취약한 구조 때문에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남한의 전력위기는 시작되었다. '제1차 위기'는 1946년 말부터 1947년 초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시 북한은 장진강발전소-평양 간 송전선 고장과 발전소 수리를 이유로 들어 남한으로 내려보내는 전기량을 제한하였는데, 이 때문에 남한 각지에서 정전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남한에서는 혹시 모를 북한의 송전 중단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군정청 상무부 전기과장이 북한으로부터 송전이 중단되면 남한은 암흑화될 것이라고 공개적인 우려를 표명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
  (...) 요컨대, 미군정은 기존 발전소의 증설이나 복구를 통해 긴급하게 발전량을 늘리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확실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쪽으로부터의 송전이 정상화되면서 문제가 일시 해소되기에 이르렀다. (291~293쪽.)

 

  (...) 보다 강력한 통제조치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입법의원 김도연, 상공회의소 전항섭을 비롯해 관민에서 뽑은 7명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비상시 전력위원회를 설치해 전력의 생산, 분배, 사용과 관련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 위원회는 전력 필수 사용처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이를 변경하는 권한을 확보하였고, 비상시에는 이 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사항이 모든 법령에 우선할 정도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 (294쪽.)

 

  이러한 배경하에 미군정은 1948년 6월 1일 자로 상무부를 상공부로 개편하고 산하에 전기국을 신설하였다. 기존 전기과를 전기국으로 확대개편하는 조치였다. 전기국 아래에는 전력과, 감리과, 전기시험소 등을 두었으며 전력통계의 조사 정리를 위해 새로이 통계계를 설치하기도 했다. (...) (297쪽.)

 

  (...) 정부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새로운 전원을 대거 개발하여 대응하고자 하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향후 5년에 걸쳐 전국 각지에 새로운 화력,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려는 전력개발계획안이었다.
  우산 화력발전소로는 영월화력의 완전 복구에 따라 최대 발전력 10만kW를 확보하고, 6만kW의 삼척화력을 추가로 설치하는 한편 화순(2만kW)과 문경(1만kW)에도 화력발전소를 신설하기로 했다. 수력발전소로는 그간 공사가 중단되었던 섬진강수력의 증설공사를 재개함과 동시에 4만8,200kW의 충주수력을 비롯해 금강(4만720kW)과 임계(6만kW)에 수력발전소를 신설하기로 했다. 기존 화력발전소인 영월의 복구를 제외하고 신설 발전소들로만 비교해 볼 때 화력발전소보다는 수력발전소 개발에 방점이 찍혀 있는 계획이었다. (299쪽.)

 

교정. 초판 1쇄

44쪽 7줄 : 한성 오서구내五署區內의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서구五署區라는 명칭이 보통의 독자에게는 너무 낯설기 때문에 여기에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좋겠다. 네이버에 검색해도 안 나온다;;)

68쪽 11줄 : 계자인啓字印 명령을 (위와 같다.)

70쪽 6줄 : 다이이치第一은행과 -> 다이이치은행과 (한자 표기는 47쪽에 이미 등장)

81쪽 밑에서 4줄 : 광무황제는 일본공사를 알현한 자리에서 ('알현'이란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을 찾아가 뵌다는 뜻이므로 "광무황제"가 주어인 이 문장에는 적절하지 않다. '만난' 정도가 좋겠다.)

85쪽 그림 캡션 : 환화(元)와 (정확히 어떤 단위를 말하는지가 불확실하다. 참고로 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으로 공식적인 화폐 단위는 '냥'이 되었지만 이 단위는 이용이 불편하고 동질·동량·동가의 외국화폐 유입으로 1894~1900년 공공부문 통계에 종종 '원(元)'이 표기된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한국은행, 『한국의 화폐』, 2006, 59쪽. 참고로 이 책의 107쪽 그림 <I-4>의 캡션에는 "백동화(元)"라는 표기도 있다.)

88쪽 12줄 : 가쾌와 통수가 (가쾌와 통수에 대해서도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96쪽 1줄 : 계자인啓字印 명령이 (한자 표기는 68쪽에 이미 등장)

98쪽 밑에서 3줄 : ......우리는 -> ...... 우리는

122쪽 밑에서 9줄 : 한성 오서구내五署區內에는 (한자 표기는 44쪽에 이미 등장)

126쪽 밑에서 1줄, 127쪽 1줄 : 다이이치(국립)은행 -> 다이이치은행 (다이이치은행을 표기할 때 여기에만 '국립'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물론 두 다이이치은행이 애초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129쪽 14줄 : 한성 오서내五署內를 (앞에서 "오서구내五署區內"라고 했는데, 여기는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물론 이것 역시도 애초에 다른 것일 수 있다;;)

151쪽 14줄 : 한국 최초의 영업용 수력발전소인 원산수력전기의 발전력은 -> 원산수력전기가 세운 한국 최초의 영업용 수력발전소의 발전력은

167쪽 밑에서 1줄 : 신청제[屆出制]를 -> 신청제를 (한자 표기는 146쪽에 이미 등장)

186쪽 10줄 :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1931.6.17~1936.8.4) ->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재임 1931.6.17~1936.8.4)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책 전체적으로 특정한 인물은 해당 직위의 재임기간을 괄호로 병기해주는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재임기간임을 표시해주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가즈시게'가 맞는 것 같긴 한데...)

189쪽 7줄 : 우가키宇垣의 -> 우가키의 (한자 표기는 186쪽에 이미 등장)

205쪽 밑에서 5줄 : 도쿄東京전등, 도호東邦전력, 다이도大同전력, 우지카와宇治川전기, 니혼日本전력 -> 도쿄전등, 도호전력, 다이도전력, 우지카와전기, 니혼전력 (한자 표기는 172쪽에 이미 등장)

212쪽 4줄 : 웅기전기3사가 -> 웅기전기 3사가

218쪽 13줄 : '낙하산 인사[天降]' -> '낙하산 인사' (한자 표기는 216쪽에 이미 등장. 단, 이 부분은 원사료의 말맛을 살리기 위한 의도적인 의역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218쪽 16줄 : 서선합동전기(이하 서선합전) (2장에 등장하는 여러 회사의 이름을 표기할 때 정식 명칭과 약칭이 섞여 있다. 예컨대 '경성전기'와 '경전', '평양부영전기'와 '평양부전', '남선합동전기'와 '남선합전' 등의 명칭들이 특별한 약칭선언과 순서 없이 섞여서 나오므로 전체적으로 싹 정리할 필요가 있다. 명칭표기는 색인과도 연결된 문제다.)

258쪽 12줄 : '낙하산 인사[天降]' -> '낙하산 인사' (위와 같다.)

269쪽 8줄 : 구보타 유타카久保田豊는 -> 구보타 유타카는 (한자 표기는 204쪽에 이미 등장)

272쪽 4항 두번째와 세번째 문단 : (들여쓰기)

307쪽 8줄 : 세레낙Serenac(1951.12~1953.2) -> 새러낙Saranac(1951.12~1953.2) (이게 헷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 자료에 따라서 Serenac으로 표기된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는 한국전력공사가 발간한 통계집인 『다시찾은 전력통계 : 光復에서 創社까지』에 Serenac으로 표기되어 있다;;)

331쪽 2줄 : 1억5,310만6천환이나 -> 15억3,106만환이나

512쪽 남선전기주식회사,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항목 : (하나의 항목으로 합쳐야 한다.)

515쪽 세레낙Serenac 항목 : Saranac으로 수정. (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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