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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그리고 맥주

Dog君 2019. 9. 30. 06:06

 

  스무살이 넘은 한국 청년은 으레 한번쯤 술독에 빠진다. 천성적으로 술을 아주 싫어하거나 알콜분해능력이 아주 낮다면 모를까 20대의 첫 몇년동안 술 앞에서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리는 것으로 일종의 성인식을 치른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 없는 대학생에게 술만큼 값싸게 하룻밤 즐길 수 있는 것이 또 없었으니까. 술이 술을 부르다 못해 소주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지경이 되도록 술을 퍼마시며 치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알콜에 찌들어 있는 와중에도, 단 한가지만큼은 술에 관해서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목이 마를 때 맥주 생각이 난다는 말.


  나도 잘 안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난 다음에 들이켜는 차가운 맥주 한 잔이 얼마나 시원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증이 날 때 맥주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는 않는다. 아니,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지 술을 왜 마시냐고...


  비슷한 상황으로, 집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맥주를 마시는 경우도 잘 없다. 맥주 마시면 화장실 가고 싶어지는데 술을 왜 마시냐고...


  그렇다. 남들이 술 생각이 난다고 하는 대부분의 순간에, 나는 술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부터는 (아마 서른 넘어서부터였던 거 같다.) 누구에게 먼저 술 마시자고 말하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허구헌날 술에 절어 살았던 20대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술을 잘하는 편도 아니었다. 맥주 한 잔으로는 취하지도 않는다고들 하지만 나는 맥주 한 모금만 마셔도 당장에 취기가 느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한 잔이라도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는 날은, 무조건 그 시간으로 하루 일과는 오프다. 오래 먹지도 못해서 밤을 새가며 술을 마실 정도의 체력도 없다. 가뜩이나 잠이 많은데다가 술까지 취하면 더 잘 잔다. 친구끼리 MT라도 가면 가장 먼저 곯아떨어지는 것은 항상 나였다. (산 좋고 물 좋은 강촌까지 가서 밤11시도 못 넘기고 숙면에 들어가는 건 MT 아니라 요양 아닌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삶이란 또 그것대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알콜이라고는 죄다 사라진 세상이라니 그건 너무 황폐하잖은가. 아니, 다른 술은 다 없애더라도 맥주만큼은 예외로 해야 되지 않을까. 맥주가 없는 세상이라니, 아, 그런 세상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데 퇴근 후 맥주 한 모금만한 소확행이 또 없다. 꼭 맥주를 마셔서 즐거운 것이 아니다. 오늘 하루를 마치고 ‘히야시’ 잘 된(암만 해도 ‘히야시’를 대체할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히야시’에는 ‘시원한’이나 ‘차가운’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말맛이 있다.) 맥주 한 잔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목구멍 안쪽이 따끔따끔해지면서 어디선가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다. 심지어 값도 싸다. 캔맥주에 간단한 주전부리까지 곁들여도 단 몇 천원이면 충분한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네 개에 만원 하는 캔맥주란 잔혹한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허락한 유일한 마약일지도 모른다.)


  맥주를 같이 마실 동지가 있다면 더 좋다. 동네친구건 가족이건 어느 때고 불러내서 맥주 한 잔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건 분명 축복받은 일이다. 슬슬 힘이 부쳐가는 수요일이나 목요일 오후쯤에 카톡으로 “오늘 저녁 맥주 ㄱㄱ?”라고 물었을 때 이유 묻지 않고 곧장 “콜”이라고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떠오른다면 당신의 인생은 틀림없이 성공한 것이다. 그런 사람, 나에게는 라조기가 있다.


  한국에 있을 때, 라조기의 집은 잠실이었고 내 집은 수원이었다. 조선시대였다면 걸어서 꼬박 하루 넘게 걸리는 거리니 이웃사촌은커녕 평생 얼굴 마주할 일도 없었을 거다. 그랬던 우리가 런던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살게 됐고, 그 덕에 수요일이나 목요일 오후쯤에 카톡으로 “오늘 저녁 맥주 ㄱㄱ?”하고 물어볼 수 있게 됐다. 둘 다 술을 좋아하지도 잘 하지도 않는 주제에 한 주에 한 번 이상은 맥주 한 잔씩 하고 헤어진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도 시덥잖은 것들뿐이지만, 내가 뭐랬나, 맥주는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같이 글을 써보자는 이야기도 그러던 와중에 나온 아이디어다.)


  그래도 기왕 런던에 왔는데, 하는 마음에 최근에는 동네의 펍을 몇 군데 가보고 있다. 메뉴판 가득한 맥주를 한 종류씩 맛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이름만 보고 주문을 해야 하는 탓에 가끔 뼈저린 실패를 맛보기도 하지만 (실수로 사이다라도 시키면 큰일이다. 펍에서 파는 사이다는 정말 끔찍한 맛이다.) 뭐 어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렇게 경험치를 하나씩 쌓아가는 재미라면 재미다.


  그러고 보면 영국 사람들의 펍 사랑은 각별한 것 같다. 휴일을 앞둔 평일 저녁이나 축구경기가 있는 날 저녁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펍에 꾸역꾸역 모여서 저녁도 먹고 수다도 떨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덩치 좋은 영국아저씨들이 펍에 가득하면 살짝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하루의 피로를 맥주 한 잔으로 씻어내는 것은 영국사람도 매한가지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괜히 동질감도 느껴지는 것도 같다. 좀비에 빗대어 현대 노동자의 처지를 멋지게 풍자한, 끝내주는 영화인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도 펍은 중요한 무대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숀 일행이 좀비 떼를 피해 최후의 은신처로 선택한 곳이 펍이기 때문이다. 숀이 악몽 같은 세상을 피해 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리고 보통의 영국인들이 펍에서 맥주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것처럼, 나도 맥주 한 잔 마시며 가혹한 세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날란다.


ps. 영국의 맥주는 대체로 다 맛있지만 영국인들이 맥주 안주로 즐긴다는 돼지껍데기튀김과자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호기심에 한 봉지 샀다가 딱 한 조각 먹고 그대로 봉인했다. 냄새부터 맛까지, 전부 다 수용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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