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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事나부랭이

런던, 그리고 지하철

Dog君 2019. 10. 7. 06:47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인구를 다해봐야 30만 남짓 되는 작은 도시다. 그곳에서 나서 그곳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다 보냈다. 서울로 올라온 것은 스무살짜리 대학 새내기가 된 해의 늦겨울이었다. 변화를 싫어하는 천성은 그때도 마찬가지여서 서울로 삶터를 옮긴다는 것이 이만저만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경상도에서 신입생이 올라오면 선배들이 빙 둘러싸고는 막대기 같은 것으로 쿡쿡 찌르며 “말 해봐, 말 해봐” 하며 놀린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은 참이었다. 내 서울 생활은 그렇게 걱정 반 스트레스 반으로 시작되었다.


  내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서울은 모든 것이 낯설고 놀라웠다. 말투는 어색했고, 사람은 너무 많았다. 사투리를 쓰지 않는 노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울에서 처음 알았고, 1년에 두 번 이상 눈이 내리는 것도 서울에서 처음 보았다. (진주에는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다. 잘 해야 1년에 한 번이나 올까.) 그 전에도 서울에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하루이틀 잠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서 마주하는 서울은 또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낯선 공간에서 그간 익숙했던 감각들을 완전히 다시 만들어가야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공간감각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공간감각이란 기껏해야 도시의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이동할 때 굳이 버스를 갈아탈 필요도 없고 시간도 30~40분이면 족한 정도였다. 하지만 1,000만 인구를 자랑하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은 그런 따위의 소박한 공간감각으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곳이었다. 버스 노선의 기점과 종점이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것부터가 일단 충격이었고, 단일한 버스 노선으로 도시를 가로지른다는 것도 언감생심이었다. 고무튜브 하나만 붙들고 망망대해에 떨어진 느낌, 아니 광막한 우주 한가운데 내던져진 느낌이랄까.


  서울에 오기 전까지 나는 ‘도심’이니 ‘부도심’이니 하는 것들이 지리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이론상의 개념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그것들은 현실에 엄존하는 현실태였다. 서울이면 다 서울인줄 알았지, 그 안에 다시 강북과 강남이 있고 다시 신촌과 화양리와 목동과 노원이 또 있는 줄은 몰랐다.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에서 내 공간감각은 별무소용이었다. 어느 동네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려면 무엇을 타고 얼마나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워야했다. 내가 사는 동네 이름도 제대로 입에 붙지 않아서 ’행당동’을 ‘행동당’이라고 말하는 것도 여러 번이었다. (역시 말실수도 행동주의자activist답다!)


  그랬던 내가 메트로폴리스 서울을 흐릿하게나마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지하철 덕분이었다. 최첨단 현대 기술이 집약된 지하철, 그것은 나 같은 촌놈도 떳떳한 시민의 일원으로 메트로폴리스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문명의 축복이었다.


  먼저, 지하철 노선도. 메트로폴리스 서울을 머리 속에 집어넣는데 지하철 노선도만큼 효율적인 것이 또 없다. 접으면 손바닥보다 작아지는 휴대성에, 몇 개의 선과 점만으로 서울의 주요 지점을 말끔하게 표현해내는 직관성까지…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적어도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까지 지하철 노선도는 가장 간편하고 편리한 서울 지도였다.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넣은 지하철 노선도만 있으면 (그리고 며칠 전에 구입한 만 원짜리 지하철 정액권만 있으면) 그 넓은 서울 어디에서라도 길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다. 그래서 20대 초의 나는 틈날 때마다 주머니 속 지하철 노선도를 꺼내보며 서울의 지명을 익혔다. (메르카토르씨, 이런게 바로 진정으로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 지돕니다.)


  승차감도 정말 끝내준다. 지구상의 모든 교통수단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아무 것도 붙잡지 않아도 목적지까지 넘어지지 않고 갈 수 있다. 심지어 비싸지도 않아서 단돈 천몇백원이면 이 기적의 승차감을 맛볼 수 있다. 최소 기십만원씩 줘야 하는 항공기조차 이런 승차감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그 기적의 승차감 덕분에 우리는 지하철 안에서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책을 읽어도 되고 스포츠신문의 간단한 퍼즐을 풀 수도 있다. 전철에 타면 책을 읽는 내 습관도 전적으로 승차감 덕분이다. 피곤하면 자리에 앉아 잠시 눈을 붙여도 괜찮다. 버스처럼 좌석에 앉아 졸다가 창틀에 머리카락이 씹히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으니까.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지하철을 창조했다. 지하철은 정말이지,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는 피조물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피조물이 처음 세상에 등장한 곳이 바로 런던이다.


  런던에 지하철이 만들어진 것이 1863년이라고 한다. 1863년이면 조선의 스물다섯번째 왕 철종이 죽기 한 해 전이고, 삼정의 문란에 분노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진주농민항쟁 다음 해다. 조선의 백성들이 세도정치에 신음하던 시절에, 지구 반대편 런던에서는 열차를 지하로 집어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연기 뻑뻑 내뿜는 증기기관차를 지하터널로 집어넣는다니,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도저히 그런 생각을 못했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 상상 덕에 지하철이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대중교통이 된 것도 사실이니 어느 정도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는 있을 거 같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려면 이 정도 발상의 전환은 해줘야 하는 거다.


  이 글을 쓰는 2019년을 기준으로, 런던 지하철의 역사는 벌써 150년을 훌쩍 넘겼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디스트릭트라인도 1868년 개통이라고 하니 이것도 150년 넘었다.) 강산이 열다섯번 바뀔 동안 굴러다닌 놈답게 그에 얽힌 이야기도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름이다. 영국인들은 지하철을 ‘튜브tube’라고들 부른다. 처음에 튜브라는 말만 듣고는 물놀이할 때 쓰는 고무튜브를 말하는 줄 알았다. 교통카드 이름도 ‘오이스터oyster’(굴)라고 하니, 역시 해군력 짱짱한 해양제국을 건설한 민족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하지만 튜브와 오이스터는 해양민족이고 나발이고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튜브는 차량의 단면이 동그랗기 때문에 그 모양이 마치 치약이 담긴 튜브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고, 교통카드 이름이 오이스터가 된 까닭은 아무도 모른단다. 지하철은 그냥 지하철일뿐 거기에 무슨 대단하고 거창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거창하지 않기로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까 앞에서는 아름다운 피조물 어쩌고 저쩌고 온갖 빨아주는 수사를 늘어놓았지만, 그 놀라움도 일상이 되고 나면 결국 반복적인 하루의 일부에 불과하다. 런던 지하철에서는 핸드폰이 안 터진다는 둥, 그래서 지하철에서 유독 종이책 읽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는 둥, 여름겨울에는 냉난방이 안 된다는 둥, 처음 몇 번 탔을 때는 하나같이 이채로워 보이는 광경들이지만 여기 생활이 몇 달째 반복된 지금은 그것 역시 내 일상의 풍경이 됐다. 그런데 그 이채로움의 아우라가 사라지고 나면, 그래서 런던 지하철이 더 이상 이채롭게 느껴지지 않게 된 후부터, 런던 지하철은 내게 또 새로운 의미가 되었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출퇴근이라는 단조로운 반복적 일상 앞에서는 나나 영국인이나 결국 매한가지라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러고보면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의 역사란 기실 노동계급의 역사이기도 하다. 주거지역과 공장지역을 연결하는 대규모 운송수단이란, 좁은 공간에 노동력을 집약해서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생산해야 하는 공장제 공업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런던에 지하철이 운행되었던 지난 150년 동안, 지하철을 이용한 대부분의 승객은 아마도 보통의 노동계급이었을 것이다. 평생동안 지하철로 수천번씩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제몸과 제가족을 건사했을 것이고 오가는 틈틈이 창에 기대에 쪽잠을 자거나 글쪼가리를 읽으며 피로를 달랬을 것이다. 내가 지금 꼭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가 지금 꼭 그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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