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冊나부랭이

재앙의 지리학 (로리 파슨스, 오월의봄, 2024.)

Dog君 2024. 12. 17. 08:07

 

  이 책의 원제는 'Carbon Colonialism'입니다. 『탄소 민주주의』와 『탄소 기술관료주의』에 이은 '탄소 연독連讀'이네요. (그런데 '연독'이란 말이 있긴 하나...) 첫 두 책이 과거의 역사를 다룬 것에 반해 이 책은 현재의 탄소배출과 기후위기의 불평등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다보니 이 책은 첫 두 책보다 훨씬 명징하게 자기 주장을 피력합니다.

 

  기실 '기후위기'라는 소재는 이제 별달리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산업화시대에 생태주의는 꽤나 공격적인 사회운동의 일부로 이해되었고, 기후변화climate change 대신 기후위기climate crisis라고 말하는 것도 급진적으로 의제를 설정한다는 느낌을 풍겼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이 별로 안 듭니다. 지극히 보수적인 윤석열 정권(잘 가라)조차도 기후위기를 들먹이며 녹색과 탈탄소를 말하니까요. (문제는 그 귀결이 원자력발전이라는 건데...)

 

  『재앙의 지리학』은 이처럼 개나 소나 기후위기를 말하는 작금의 담론에 대한 통렬한 싸다구라 하겠습니다. 로리 파슨스는 탄소배출과 기후위기 문제가 전지구적인 규모로 이뤄지는 근본적인 착취와 불평등 구조, 식민주의적 체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책의 원제에 식민주의colonialism가 들어가는 것도 그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이 착취체제를 문제시하지 않으면 기후위기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텀블러 쓰고 분리수거 좀 한다고 기후위기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어 기후위기의 본질을 흐리는 장난질, 좀 더 세게 말하자면 '기후위기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가 기후위기에 관심이 있다고 자랑질하고 싶은 사람의 사회적 허영 혹은 자위행위'에 불과할 겁니다. (이런걸 '그린워싱'이라고 한다지요.)

 

  요 며칠 환경재단의 크루즈 여행 사업 '바다 위 지구학교 그린보트'에 대한 비판이 뜨겁습니다.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 탄소배출량이 많은 크루즈 여행을 하면서 기후와 생태를 논하는게 얼마나 모순적인가 하는 비판이죠. 이 행사의 주최자가 한때 환경운동의 대명사 같았던 최열이고, 최재천, 조천호, 요조, 김영하 같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이름을 올렸더군요. 이러니 제가 냉소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

 

  (...) 부유한 세계는 산업화가 유발한 피해의 복구라는 측면에서 큰 진전을 이뤄왔다. 한때 런던의 대기오염은 건강에 매우 해롭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완두콩 스프' 색깔 같은 갈색 안개가 하늘을 뒤덮을 때마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의 대다수 주요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런던의 대기오염은 최근 수십 년에 걸쳐 현저히 개선되었다. (...) 부유한 세계는 산업의 더러운 단계를 지나 진보해온 것처럼 보인다. (...)
  (...) 이런 추론에는 심지어 과학적 근거도 있다. 오염을 GDP에 대응시킨 환경 쿠즈네츠 곡선Environmental Kuznets Curve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곡선은 국가의 경제개발 과정에 따라 상승하다가 이후 하강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매력적인 논거이며,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기후변화에 대한 담론에 확고히 고착되어왔다. 탄소 배출과 오염은 모든 국가가 거쳐가는 단계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점점 더 심화되는 기후변화의 위험을 회피하는 능력(결정적으로 돈)을 확보해왔으므로, 나머지 국가들 역시 각자의 곡선을 쉼없이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면 이런 능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부유한 국가들은 이 담론을 수용한다. 왜냐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고, 부유한 세계가 [다른 곳들보다] 더 안전하고 더 건강한 이유를 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만일 한 곳이 깨끗하기 때문에 나머지 한 곳이 파괴된 것이라면? 만일 한 곳이 안전하기 때문에 나머지 한 곳이 위험해진 것이라면? (16~18쪽.)

 

  (...) 재해 위험의 지리학에서는 돈이 빠질 수 없다. 아이티, 미얀마,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같은 국가들은 산사태, 가뭄, 홍수, 폭염에 직면해 있고 이런 위험들은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다. 수백만 명의 민중에게 이것은 농사의 중단과 식량의 부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반드시 이런 결과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원인은 부의 창출에 관련된 환경 비용을 부를 축적하는 곳과 동떨어진 타지에서 지불하는 체계에 있다. 그 체계를 이 책에서는 탄소 식민주의라고 부른다. 탄소 식민주의는 천연자원을 계속해서 추출하고 수출한 뒤, 해당 자원의 소유자들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유구한 체계[식민주의]의 가장 최근 버전이다. 탄소 식민주의는 여러모로 오래된 이야기에 추출에 감춰진 비용, 즉 자원의 향연과 역관계에 있는 탄소 청구서를 새롭게 추가한다. (20~21쪽.)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한 곳의 환경적 취약성과 또 다른 곳의 안전 사이의 연관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후변화에 맞서 싸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자원이다. 그러나 그 자원은 수 세기 동안 변함없이 부유한 국가들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 속도는 매년 빨라져, 지난 40년 사이 3배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98년 9800만 달러이던 글로벌 폐기물 무역의 규모는 밀레니엄에 접어들 무렵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오늘날 2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모든 흐름은 식민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추출 과정이자, 베네데타 코다Benedetta Cotta의 표현대로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그 사고방식은, 더 가난한 국가들과 더 힘없는 당사자들의 환경적 취약성을 공격하는 경제적 협력관계 내부로 점점 더 깊게 통합되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개발 모델을 유지하며 기후변화의 영향을 완화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될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기후붕괴를 체계적으로 외주화함으로써 부유한 국가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글로벌 위험을 재설계하는 행위이다. 요컨대 바로 이것이 탄소 식민주의이다. (77쪽.)

 

  (...) 앞으로 어떤 브랜드의 티셔츠, 커피, 휘발유가 가장 친환경적인지 알아볼 일이 생긴다면,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집으로 돌아가 국회의원에게 엄격한 공급망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길 바란다. 편지 그 자체가 변화를 촉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목소리는 너무 쉽게 묻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올 때마다 한 명 이상의 친구나 친척을 설득해 편지를 보내게 만든다면 결국 여론의 무게가 목소리가 될 것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소비자라면 지역 정치에 참여하길 바란다. 지역 정당에 가입하거나 지방의회로 진출하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도록 독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변화를 위한 운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지속가능한 소비라는 아편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의 기를 죽이거나 그들에게서 권한을 빼앗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가 정치와 입법으로 향하도록 이끌 수 있길 바란다. 매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윤리적 구매라는 도덕적 압력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후변화에 대해 깊이 우려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울이는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 뿐이다. 그 대신 각자가 내리는 친환경적 결정, 즉 생태를 의식해 선택한 각자의 결정을 면밀한 조사, 정의 실현, 변화에 대한 요구로 승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글로벌 공급망의 어두운 구석을 조명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윤리적 소비자를 위한 지침을 내려놓고 그 대신 펜과 휴대폰을 집어 들어야 한다. 글로벌 경제에서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을 만난다면, 한 명의 개인으로서는 취약하지만 집단으로서의 우리는 우리의 경제, 우리의 생산, 우리의 기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음으로써 단 하나가 아닌 여러 형태의 남용을 종식시키자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해주길 바란다. (115~116쪽.)

 

  그렇다면 탈식민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최근 들어 폭넓게 쓰이고 있는 용어로, 교육, 정치, 국제법을 비롯한 여러 주제에 적용되어왔고, 원주민에게 반환된 토지나 유물, 식민지 개척자들의 동상을 철거하는 실천들을 통해 구체화되어왔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직시인 동시에 현재에 대한 탐문이다. 다시 말해, 패권주의적 식민시대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는 것과 낡은 제도가 여전히 많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하는 기후변화의 탈식민화란 곧 미래를 탈식민화하기 위한 상상력의 탈식민화를 의미한다. 상상력을 탈식민화함으로써 기후변화에 대한 성공적인 대응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우리의 비전을 재구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친환경을 표방하는' 깨끗하고 부유한 국가가 자신들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동떨어진 지역에서 생산된 재화를 소비하는 세계가 아니라, 세계화로 인해 서로 맞물리게 된 지역사회로 이뤄진 세계를 그려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필수적이면서도 방대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세 가지 우선순위가 있다. 첫째, 국내 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탄소 배출 목표를 포기하고, 그 대신 쉽게 활용할 수 있지만 부유한 국가의 정치적 편의를 위해 주변화되곤 하는 소비 기반 조치를 채택해야만 한다. 둘째, 일부 부유한 국가들이 배출하는 탄소의 절반이 해외에서 발생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감안할 때, 국내 생산에 적용되는 환경 및 탄소 배출 규제를 [글로벌] 공급망에도 반드시 엄격하게 적용해야만 한다. 이 새로운 관점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는 마지막 우선순위, 즉 글로벌 공장이 재해의 지형을 형성하는 방식을 인식하는 층위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글로벌화된 경제는 물자와 부를 부유한 세계로 빨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에 폐기물을 남기도록 설계된 체계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 (148~149쪽.)

 

  (...) 과학적 의미에서 기후변화는 통계적 지표, 즉 한 기간에서 다음 기간 사이의 평균의 편차일 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후변화의 영향을 논할 때, 그 영향의 결과를 반드시 통계적 지표를 기준으로 하향 추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를 기후변화와 객관적으로 연결지을 수 없다. 바꿔 말하자면, 기후변화와 확정적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는 단일한 사건, 단일한 고난 혹은 단일한 재앙은 없다. 석면이나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이 암 발병률을 높이듯, 어떤 개별적인 사건이 다음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높였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기후 자체의 실체 없는 객관성과 기후가 유발한 고통의 물리적이고, 실체적이며, 가시화된 주관성이 분리된다.
  (...) 다라와 보파의 사연은 글로벌 남반구의 기후변화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에 해당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토지를 잃은 것은 기후변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채, 기계화, 개발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대부분의 영향도 마찬가지이다. 다라와 보파로 하여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들고, 예이 맘에게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걸인이 되는 것 이외의 모든 선택지를 앗아가버린 농촌의 변화는 기후변화로 인해 느닷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가 촉매로 작용해 심화된 것이다. 환경적 압력은 기계화를 앞당겼고, 의류 부문과 다른 산업으로의 전환을 재촉했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계 수단을 계속해서 압박하는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후변화가 갖는 의미이다. (...) 기후변화는 점점 더 커지는 압력, 점점 더 강해지는 압박 요인, 협상력 감소, 노동조건 악화로 경험된다. (...) 가뭄, 예측할 수 없는 강우, 홍수는 농업의 장기적인 전환에 기여했고, 고군분투하는 소규모 자영 농민들을 빈곤, 부채, 그리고 마침내 착취적인 노동으로 내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조합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경제와 환경이 거의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4~176쪽.)

 

  많은 질문들이 그렇듯, 이 경우에도 모두가 발언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이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담론을 들을 때, 그것이 정책이나 논거이든 혹은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 제시된 새로운 프레임이든 그 말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해관계를 살펴보자. 그 혜택을 보는 살마이 누구인지 세심히, 독립적으로 생각해보자. 대형 에너지 기업이 제시하는 논거와 담론에 익숙해지자. 어쨌든, 그것들을 쉘Shell, BP, 엑손 모빌Exxon Mobil 같은 기업 웹사이트의 지속가능성 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목적은 장·단기적으로 이익의 균형을 맞추고 경제적·환경적·사회적 고려 사항을 통합하는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더 많고 더 깨끗한 에너지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보면, 이것이 차단, 지연, 필리버스터(...)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방법을 터득하자. "사람과 지구를 위한 에너지의 재구상이라는 우리의 목적은 BP의 사업 다각화 및 탈탄소화에, 그리고 주주를 위한 진정한 가치 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는 화석연류 사용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수익성이 높은 녹색 기술에 투자한다는 사실을 교묘히 감추는 빈말임을 이해하자.
  녹색 메시지의 행간을 읽어내는 이런 능력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시민에게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린워싱은 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져온 '지속가능한' 무역이라는 눈속임에 빠르게 익숙해진 정치권의 전유물이기도 하다. (...) 전 세계의 지도자들이 제멋대로 사용하는 기후 비상사태라는 표현은 대부분 연막, 즉 현상 유지를 위한 겉치레에 불과하다. 일단 이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행간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일에서만큼은 그레타 툰베리를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다. 2주에 걸쳐 열린 제26차 당사국총회의 거창한 수사가 막을 내린 뒤 글래스고의 거리에 모인 군중들 앞에 선 그레타 툰베리는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던 행사에 대해 발언했다. "이게 무슨 기후 회의인가요? 글로벌 북반구의 그린워싱 축제일 뿐이죠." (252~253쪽.)

 

  (...) 기본적으로 (...) 메시지는 단순하다. 바로, 사람들이 기후변화에 취약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취약해지는 이유는 사회가 그들을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숲, 경작지, 바다가 오염과 저하에 취약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글로벌 공장이 그것들을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먼 과거나 얼마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부유한 세계는 기후변화의 도전에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자원을 축적하고 그것을 특권을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대부분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간다. 천연자원은 계속해서 외부로 흘러나가는데, 그 보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빈약한 자본뿐이다. 기후와 시장이 맞물리면서 전통적인 생계수단이 무력화되자 크고 작은 행위자들이 숲을 파괴하게 되었고, 공장 노동자들은 무더운 환경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어부들은 생계 수단이 점점 더 줄어드는 상황과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장 완벽한 의미의 탄소 식민주의이다. 글로벌 공급망은 경제적 조건을 지속적으로 재설정하면서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려는 현지의 노력을 방해하는 경제적 불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글로벌 공장의 주변부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은 기후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지만, 막상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자본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글로벌 공장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제공하는 글로벌 남반구의 시민들은 글로벌 생산 공정으로 인해 현지의 환경이 저하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복잡해진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공급망이 종종 부유한 세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부유한 세계가 짊어져야 할 책임(조치를 취할 필요성)과 그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기회(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를 동시에 시사한다. (299~3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