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冊나부랭이

있지만 없는 아이들 (은유, 창비, 2021.)

Dog君 2024. 12. 22. 11:17

 

  책을 읽으면서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는데, 미등록이주민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미등록이주아동이라고 하면 그저 불법체류자가 낳았기 때문에 교육이나 의료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생각은 한참이나 부족하고 왜곡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미등록이주아동이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고등학교까지라도 다닐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게 아닙니다. 미등록이주아동은 그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제 주변에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겁니다. 하긴, 제가 무심코 쓴 '불법체류'라는 표현부터가 미등록체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는 것이니 저도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등록이주민의 체류자격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 역시 그에 대한 우려를 익히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많고 (한국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죠) 체류자격을 확대할 경우 가족과 친척의 이주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체인 마이그레이션'(chain migration)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은 이 책에 등장하는 활동가들도 여러 차례 인정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불법체류'라는 단어가 그들에게 부당하게 '범법자'의 이미지를 덧씌워서 우려를 과장하고 있으며, 그들을 우리 사회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 애초 우리 사회가 그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미등록이주민에 따르는 여러 우려에 대한 가장 건강한 대응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을 불쌍한 존재로 여겨 시혜를 베풀거나 혹은 적대적 존재로 여겨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미등록이주아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은 이 책 이후로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즈음에 법무부는 한국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체류한 미등록이주아동에게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비롯하여 이주민 당사자와 여러 활동가들의 노력의 결실일 겁니다.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무언가 조금씩 나아지는 징조가 뚜렷이 보이는 것 같아 독자인 제 마음도 약간 편해집니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얼마전 SNS를 통해 몽골 출신 미등록이주민이었던 강태완이라는 사람이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자라 한국어밖에 못했지만 몽골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법무부가 발표한 구제책의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미비한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제대로된 체류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상황이었던 거죠. 강태완의 안타까운 죽음은 미등록이주민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포용성에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책에 등장하는 인화는 강태완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지난 12월 16일은 강태완의 발인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주민등록제도가 너무 잘되어 있어요. 코로나19 이후로 핸드폰으로 QR코드 본인인증을 하잖아요. 웬만한 온라인 사이트들도 본인인증을 핸드폰 번호로 하고요. 저는 이모부 명의로 핸드폰을 쓰고 있어요. 좀 전에도 QR코드를 찍었는데, 사실상 제가 아니라 이모부 이름이 뜨겠죠. 그래서 밖에 잘 안 나가요. 엄마 아빠는 QR코드 사용을 못하시니까 매번 수기로 출입 명부를 써요. 마스크도 코로나19 초기에는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살 수 있었잖아요. 그때는 다행히도 도움을 주던 센터에서 마스크를 따로 챙겨줬어요. 한국은 의료보험이 잘되어 있기 때문에 큰 병 아니면 병원비 걱정을 별로 안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걱정을 하잖아요.
  결국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 수 있는 것. 내가 나임을 인정받는 것. 제가 원하는 건 그런 최소한의 것들이에요. 저는 한국에서 유령으로 지내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마리나, 「열아홉, 내년이면 쫓겨난다는 불안감」, 58쪽.)

 

  "체류자격을 한번 허용해주면 다 우리나라에 와서 애를 낳을 거다" "인구가 넘칠 거다" 이주민에게 체류자격을 줘야 한다고 하면 반대하는 근거로 이런 것을 대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이제 인구가 넘친다는 얘기는 못하는 상황이 됐죠. 미국은 '앵커 베이비'(anchor baby)라고 아이를 닻으로 사용해서 온 가족을 끌어들인다는 말이 있어요. 소위 불법체류자들이 와서 아이를 낳고, 이모도 오고 삼촌도 오고 할머니도 온다. 이걸 좀 고상한 말로 '체인 마이그레이션'(chain migration)이라고 해요. 연쇄적으로 이주민이 늘어난다는 비판적인 담론이죠. 물론 그런 우려도 충분히 가능해요. 부작용이 절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도를 설계하기 나름 같아요.
  특히 고등학교 때까지 미등록으로 산 아이들에게 체류자격을 부여하게 되면, 부모들이 한국에 살기 위해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데요. 그건 부모 입장에서 보면 정말 과도한 수단이에요. 한국에서 미등록 상태로 18년을 사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근 20년을 살고 있다는 것은 한국도 이 사람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인 거죠. 이러한 배경을 생략한 채 '불법체류자'들이 와서 계속 살기 위해 애를 낳을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치다고 생각해요. (이탁건, 「한국도 이들이 필요해요」, 90~91쪽.)

 

  제가 난민반대운동 카페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어요. 그 카페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보면 일용직 건설노동자나 자영업자 들이 많아요. 이분들은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다른 풍경을 보고 있는 거죠.
  이런 분들이 갖고 있는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불만이 혐오인 건 맞아요. 그러나 그분들을 혐오세력으로 단순하게 치부하는 것은 난민과 이주민 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안 돼요. 그분들이 보는 세상에서는 미등록 체류자들이 건설노동자로 유입되면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일감이 줄어드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죠. 외국인들이 집단으로 사는 지역들이 많아지면서 내국인들이 치안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요. 쓰레기 아무데나 버리고, 분리수거도 잘 모르고, 담배꽁초 버리고, 그런 경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건 막연한 공포거든요. 불법체류자라는 용어나 그걸 둘러싼 담론이 고정관념 형성에 큰 역할을 해요. '불법체류'라는 말이 애초에 법을 어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존재 자체가 불법이니까 또다른 불법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죠.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도 부당한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악플들을 봐요.
  물론 극단적인 혐오나 혐오에 기인한 범죄는 처벌해야 해요. 그렇다고 이런 불만을 단순히 혐오로 치부하기만 해서도 안 되겠죠. 정부 차원에서 계속 교육을 해야 해요. 어울려 살 수 있는, 더불어 살 수 있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좀 더 강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탁건, 「한국도 이들이 필요해요」, 95~96쪽.)

 

  사람들은 '난민'이라는 단어가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만 기억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실체를 모르죠. 가짜뉴스로 이미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난민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무조건 반대를 하세요. 이런 분들에게 제가 직접 얼굴을 비추고 이야기를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제 이야기를 듣고는 '아,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깨닫는 거죠. 난민을 잘 모르기 때문에 편견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실제로 이런 사례가 있어요. 저랑 굉장히 친한 친구의 부모님이 난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친구가 저를 돕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당연히 반대하죠. 그래도 이 친구가 엄마 말을 안 듣고 끝까지 저를 도왔어요. 나중에 부모님이 뉴스를 보고 제 얘기를 들었을 때 반성하였다고 해요. 부모님이 친구한테 그랬대요. 민혁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김민혁, 「오늘이 마지막이겠다는 생각이 없어졌어요」, 122쪽.)

 

  사회에는 난민도 일반인도 있고 외국인도 있어요. 누구라도 어떤 이유로 난민이 될 수 있어요. 저도 한국에 왔을 때 그냥 외국인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민이 된 경우예요. 난민이나 이주노동자들을 무조건 한국에 돈 벌러 온 사람, 우리의 일자리를 뺏으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이들도 그냥 사람이에요. 일자리를 뺏는 것도 아니죠. 취직을 할 수 있는 데가 정해져 있어요. 전문직이 아닌 단순노동이고, 한국인들이 잘 안 하는 일자리로 가야 해요. 이주민들도 목소리가 있는데 본인 나라가 아니고,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서로 편견을 버리고, 동등하게 보고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김민혁, 「오늘이 마지막이겠다는 생각이 없어졌어요」, 127~128쪽.)

 

  이주민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이주민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겠죠.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잘 몰라요. 아주 불쌍하다는 듯이 시혜적으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배척하거나, 둘 중 하나예요. 그런데 동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낮춰보는 거잖아요. 이런 경우도 흔해요. 고향 떠나와서 고생한다, 불쌍하다, 이러면서 도와줘요. 그런데 그들이 권리를 주장하면 그때부터 "그런데 그것까지 해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고 등을 돌리죠.
  우리 교육이 많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질적인 존재와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 상투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와 다른 사람들하고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이런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게 크다고 봐요. (석원정, 「정직한 한 사람이 중요해요」, 138~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