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冊나부랭이
서울리뷰오브북스 17호 (알렙, 2025.)
Dog君
2025. 4. 28. 14:42
나는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나 해가 뜨고 질 때까지 하루 종일 노는 게 나의 일과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놀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그럼에도 매일 책을 읽는 건, 책 읽기보다 더 흥미로운 놀이가 없어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책을 읽고 싶지 않다. 책 읽는 건 너무 힘들다. 일단 책을 읽는 동안, 사지를 움직일 수가 없다. 고작해야 경박하게 무릎을 떨어 대는 게 허용될 뿐이다. 사지를 묶인 듯이 꼼짝하지 못한 채, 오로지 눈동자만 움직여 문장을 좇아야 한다. 눈동자조차, 한 문장 한 문장, 쓰인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건너뛰면 안 된다. 심지어, 한 문장 한 문장 순서대로 읽는 동안, 딴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그 문장이 뜻하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몸뚱이만 꼼짝 못하는 게 아니라 눈동자도 꼼짝 못하고, 머릿속 생각조차 꼼짝 못한다! 이런 점에서 독서는, 군사 정권 시절의 애국조회나 체벌보다 억압적이다. 애국조회나 체벌을 받을 때도 머릿속으로는 얼마든지 딴생각을 할 수는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혹은 그래서, 독서는 최고의 경청이다. 작가가 말하는 것에 완전히 집중해야 한다. 잠깐이라도 딴생각을 해서 문장 하나, 단어 하나라도 놓치면 오독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 부분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어이쿠야, 이런 힘든 짓을 어떻게 하냐 말이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도 이렇게 적극적인 경청을 못할 때가 많다. 가령, 어여쁜 내 딸과 대화할 때도, 시선이 엉뚱한 데로 향하거나,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이만교, 「책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책을 읽는 방법」, 214~215쪽.)
(...) 책을 읽는 속도보다 책을 구입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읽으면 유익할 책이다 싶으면 일단 구입해 둔다. 나는 이것이 독서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가장 읽고 싶은 책을 골라 구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장 읽고 싶은 책이니까 저절로 읽고 싶어지고, 저절로 읽게 될 테니까. (...)
그러니까 내 방에는, 내가 읽고 싶어 쌓아 놓은 책만 무려 오백여 권이 넘는다. 먹고 싶은 음식을 냉장고와 냉동고에 가득 넣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읽고 싶은데 읽지 못하고 있는 책이 오백여 권이나 자기 방에 있으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읽지 않고도 부자 같은 마음이 든다. 실제로 웬만한 규모의 도서관 책 구경을 해도, 읽고 싶은 책이 오백 권씩이나 발견되지는 않는다. 대형 서점에서 하루 종일 머물러야 읽고 싶은 책을 삼사백 권쯤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방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오백 권도 넘게 있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초대형 서점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게 없다. (이만교, 「책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책을 읽는 방법」, 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