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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og君 Blue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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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별로 똑똑하지도 별로 성실하지도 않은 농땡이. 공부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동안 방황했으나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닌 놈.</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Mon, 11 May 2026 13:52: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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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Dog君</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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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og君 Blue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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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체공녀 연대기, 1931-2011 (남화숙, 후마니타스, 202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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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5324.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kBmkd/dJMcafNlYP8/ejdph0fgmJxccFjxJKn4R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kBmkd/dJMcafNlYP8/ejdph0fgmJxccFjxJKn4R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kBmkd/dJMcafNlYP8/ejdph0fgmJxccFjxJKn4R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kBmkd%2FdJMcafNlYP8%2Fejdph0fgmJxccFjxJKn4R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5324.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nbsp;제목의 1931년은 강주룡이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해이고 2011년은 김진숙이 영도조선소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해입니다. 둘 사이에는 80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이라는 점에서 꼭 닮았죠. 그리고 이 책은 두 사건을 시점과 종점으로 놓고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설명하는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는 단지 사용자(자본가계급)와의 투쟁만은 아닙니다. 이 책은 그에 더하여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몇 가지 편견에도 도전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책이 맞서는 첫 번째 편견은 여성 노동자의 투쟁이 스스로의 주체적인 활동이 아니라 누군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 분명하다는 편견입니다. 여기에는 여성 노동자가 스스로 쟁의를 이끌만한 역량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89쪽)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강주룡 같은 여성노동운동의 주요 리더들은 이미 투쟁 이전부터 의식적인 좌파 활동가였으며 각각의 노동자 역시 정달헌 등을 매개로 한 사회주의 조직가들의 지원 없이도 파업을 벌였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이러한 주체성은 공장 노동과 노동운동 참여를 통해 자존감을 고양시킬 수 있었던 개인의 경험(125쪽)과 근대적 사상과 반제 운동의 정치에 노출될 수 있었던 1920~30년대의 시대적 배경(149~150쪽)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여성노동자들의 이러한 주체성은 1950년대 부산의 조선방직 파업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노동운동 내부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쉬이 무시할 수 없는 자부심과 자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고 이후의 민주노조 운동 역시 젠더 정체성과 존엄성을 새삼 확인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299쪽)&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두 번째는 여성노동의 사회적&amp;middot;경제적 의미를 남성노동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quot;여공은 남자가 있으니 (...) 삯이 헐해도 상관없다&quot;라는 한 기업인의 말은(61쪽) 이런 편견을 잘 보여줍니다. 대형마트 비정규 여성노동자의 파업을 다룬 영화 〈카트〉(2014)에도 이와 꼭 비슷하게 '반찬값이나 벌려고 나온 아줌마'라는 폄하가 나오는 것처럼, 이는 비단 식민지기에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남성 노동자에게만 '생계수당' 혹은 '가족수당' 개념을 배타적으로 적용하는 식으로 구현되는 남녀임금차별은 이러한 편견의 결과이자 원인이죠. (남성 노동자에게 가계경제를 전적으로 부담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노동&amp;middot;가족질서에 관해서는 『현대 가족 이야기』(조주은, 2004)가 떠오르네요.) 하지만 〈카트〉에서 주인공 선희(염정아 분)이 &quot;반찬값 아니고 생활비 벌러 나왔어요&quot;고 맞받아친 것처럼, 여성 노동자는 많은 경우 가족의 주된 생계부양자였기에 이들의 노동은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세 번째는 1970년대의 노동운동에 대한 부당한 폄하입니다. 이 책은 1980년대 남성 주도 민주노조 운동이 앞선 시기의 운동을 경제투쟁에만 매몰된 조합주의적 운동으로 이데올로기와 철학이 결여된 것으로 치부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남성 노동자의 투쟁성, 계급의식, 연대를 위한 역량과 198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과학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는 (그리고 저자의 전작이 다룬 1960년대도) 남성 노동자들이 타협적인 노동조합에 안주하거나 심지어는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데 일조한 반면 여성 노동자들이 가혹한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켜나간 시기였습니다. 오히려 이 책은 전투적이고 끈질겼으며 연대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던 1970년대 노동운동의 경험이야말로 비정규화와 외주화의 문제와 맞서야 하는 작금의 노동운동에 가장 큰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338~339쪽)&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결국 이 책은 크레인의 김진숙을 거쳐 오늘의 우리로 돌아옵니다. 코스피 6,000이니 7,000이니 하는 환호가 요란한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부당해고 철폐와 임금 현실화를 외치며 고공에서 농성하고 달려오는 트럭을 몸으로 저지해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싸움은 늘상 '을'끼리의 전쟁으로 비화되곤 합니다만 그러한 파편화를 통해 정작 책임을 져야 할 '갑'은 성공적으로 몸을 숨기죠. 어떤 '을'의 권리가 확보될 때 또다른 '을'인 나의 권리도 함께 지켜진다는 사실, 그러니까 김진숙을 응원했던 희망버스가 보여주었던 연대의 정신을 실로 오래간만에 역사책을 통해 되새깁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amp;nbsp;고무 파업 당시 핵심 쟁점은 과연 임금 삭감이 공장주들의 주장대로 불황과 외국 제품과의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조선인 소유 기업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인지 여부였다. 노동자들은 1930년대 조선에 암울한 현실로 닥친 비참한 빈곤의 실태를 호소하며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려 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이 시기 온건파 민족주의 언론의 일관된 전략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처한 참혹한 상황과 빈곤에 동정심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 삭감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고용주 측의 주장을 잘 전달하는 것이었다. 또 동정심 대 어려운 경제 현실이라는 이런 기본적인 내러티브와 더불어 '적색' 공포가 동원되었다. 수많은 선정적인 보도를 통해 이들 언론은 파업 배후에 과격 선동자들이 숨어 있다고 주장하는 식민 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이런 공포를 부추겼다.&lt;br /&gt;&amp;nbsp; 이런 경제적&amp;middot;정치적 주장 외에도 여성의 돈벌이 능력 자체를 문제시하는 젠더 담론 또한 강력했다. (...) 한 기업인은 여성 임금에 대한 당시의 보편적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quot;여공은 남자가 있으니 ...... 삯이 헐해도 상관없다.&quot; 기업인들은 고무 일의 계절적 성격이 노동자의 연평균임금을 크게 낮춘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외면했다. 또한 강주룡과 같은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가족을 부양하는 유일한 또는 주된 부양자라는 공공연한 사실도 무시됐다. 강주룡의 경우처럼 개별 기사로는 여성 노동자가 &quot;아들 노릇&quot;을 하는 경우가 보도되기도 했지만, 언론도 여성의 소득이 남성 가장의 소득을 보충하는 역할에 불과하다는 기존 가정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는 이로가 임금에 대한 젠더 의식에 기반을 둔 이해였으며, 당시의 '민족자본가'는 이를 재고할 이유가 없었다. (60~61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언론 보도와 법원 문서들은 정달헌이 강주룡을 비롯한 평원고무 파업 여공들의 배후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 여성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부족함을 전제로 한 이런 서사는 법원 문서가 의도치 않게 드러낸 증거 즉 강주룡이 이미 &quot;좌익분자&quot;였으며 &quot;투쟁적&quot; 노동자로 간주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워 버린다. 강주룡은 1930년 이미 고무 총파업을 겪었고, 이 시기 고무 여공들은 공산주의 조직가들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상태에서 파업을 벌였는데 말이다. 분명 정달헌이 체포된 후에도 평원고무를 비롯한 지역의 다른 공장들에서 파업 노동자 지원을 멈추지 않았던 태로 조직가들의 끈질긴 활동이 고무 노동자들 뒤에 숨은 '불온한 배후'에 대한 당국의 우려를 심화시켰을 것이다. (89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사회주의 여성 활동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속한 '신여성'(또는 '신여자')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여성'과 '모던 걸'의 등장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그 개념이 논의되고 소비되는 방식은 같은 시기 일본과는 다소 달랐다. 일본에 비해 식민지 조선은 교육&amp;middot;취업&amp;middot;소비 등의 영역에서 '신여성' 또는 '모던 걸'로 살아가는 선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결과 지식 생산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수는 매우 적었고, 사회학자 김수진의 주장처럼 '신여성'과 '모던 걸'에 대한 논쟁은 당시 잡지 제작과 언론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남성 지식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식민지 조선에서 '신여성'과 '모던 걸'은 주로 민족주의적 검토의 대상 중 하나였다. 이들에 대한 논의는 여성을 둘러싼 제반 문제나 젠더 문제 그 자체보다는 근대성의 바람직한 성격이나 반식민지적 근대 주체에 대한 고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탓에 여성 자신의 목소리와 페미니즘적 의제는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다.&lt;br /&gt;&amp;nbsp; 이렇게 재상상된 민족주의적 구상 속에서 신여성 주체의 바람직한 역할을 '구여성'이라 불린 여성 대중의 구원자로 규정되었고, 당대 여성운동에서도 그런 임무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 (92~94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적색 노조 운동에는 기억에 남을 노동자 투쟁이 많았는데, 이 극도로 위험한 지하 반제 계급투쟁의 중심에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강주룡의 눈부신 을밀대 고공 농성뿐만 아니라 처절한 단식투쟁, 충격적인 공장 &quot;습격&quot;, 극적인 가두시위 등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만들어 낸 1931년 평원고무 파업은 여공 운동의 수준과 그들의 적극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을밀대의 지붕 위에서 강주룡은 그간 배움을 통해 획득한 지식,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quot;내가 봬와서 아는 것&quot;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했다. 식민지 근대와 사회주의 근대의 지형에서 공장 노동과 노동운동 참여를 통해 얻은 '해방의 지식'과 그 지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무장한 새로운 주체, 즉 여공 활동가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개인의 자존감을 크게 일깨운 혁명운동의 이런 측면은 강주룡과 같은 여성 노동자들이 왜 두려움을 무릅쓰고 노동운동가로서의 위험한 삶을 선택했는지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125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언론이 파업 여공의 단식에 몰두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여성 노동자들이 얼마나 의지가 강하고 놀라울 만큼 용감해 보였는지를 이야기하는 대신, 그들의 투쟁을 &quot;비오는 저녁 거리&quot;에서 본 &quot;처절한 광경&quot;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기술하는 것은 이들의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투쟁을 훨씬 더 다루기 쉬운 이야기, 즉 사회의 동정이 필요한 무력한 하층민의 이야기로 바꿔 놓는 효과가 있었다. 즉, 파업 이야기를 '여성'의 이야기로 서술하면서 평양 사회의 조선인 소유 기업과 조선인 노동자 사이의 계급 갈등이라는 핵심 문제를 주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주의 신문들은 이렇게 인도주의적 접근법과 모두에게 익숙한 신파적 서술 방식을 통해 식민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여성 노동자들의 도전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비참한 삶에 울부짖는 가난한 여자들의 이야기로 바꿔 놓고 노동문제와 젠더 문제를 모두 교묘하게 회피하는 데 성공한다. (141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이 고무 여공의 활동가적 주체성과 무장 게릴라 운동을 비롯한 만주 경험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 보면 1920, 30년대 조선에서 여성 주체성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특히 급속한 산업화와 중국&amp;middot;소련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주민들이 일찍부터 외국의 근대적 사상과 관행에 노출돼 있던 북부 지역은 급진적 운동이 발달해 강주룡과 같이 확장된 인식 지평을 가진 노동계급 여성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강주룡은 열네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1914~24년경) 만주에서 생활하면서 일제의 잔인한 반란군 토벌 작전 중국인&amp;middot;조선인&amp;middot;일본인 사이의 민족 갈등, 만연한 빈곤과 빈번한 무력충돌의 현실을 비롯해 조선인 만주 이주와 반제 운동을 둘러싼 정치와 맞닥뜨렸을 것이다. 강주룡은 더 큰 세상을 보았고, 반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하며 많은 시련을 이겨 냈다. 조선의 북녘에서 만주로, 그리고 다시 서북으로 돌아오는 삶의 여정을 통해 강주룡은 정치의식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자아의식을 획득해 갔을 것이다. 강주룡은 평원고무 파업 직전 적색 노조 운동에 얽히기 시작한 시점이 아니라 그 훨씬 이전부터 정치의식을 키우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149~150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조방의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조원들로부터 &quot;여동지&quot;로서 존중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말은 조방 쟁의 때 대한노총 내에서 전진한 그룹 편에 섰던 전국철도연맹 위원장 김주홍이 사용한 표현이다. (...) &quot;여동지&quot;는 여성이 활동가로서 보여 준 자주적 역량과 노동운동에서 그들이 수행한 역할에 대한 일정 정도의 인정과 존경심을 반영한 말이었다. 김주홍 같은 노조의 고위 간부가 조방 여성들을 주저 없이 '동지'라 부르고, 안종우 노조 위원장이 여공의 리더십에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은 조방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역량이, 아직 전체 사회에 공유된 인식은 아니라 해도, 당대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음을 보여 준다.&lt;br /&gt;&amp;nbsp; 그러나 파업 여공에 대한 이런 인정과 존중은 조방 파업이 끝난 후 노동운동 진영에서도 언론에서도 대부분 사라졌다. 조방 쟁의 당시 언론 보도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는 그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평양 고무 파업 때에 비해 잘 들리지 않았다. 남성 지도자들의 회상을 통해서 그나마 우리는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여동지들'이 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작업장을 도는 인상적인 장면이나 끈질기고 전투적인 투쟁으로 강일매를 위협하는 여공 서사를 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공의 주체성과 역량의 수준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자취들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사라졌다. (...) (214~215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여성에게 안정적인 공장 일자리가 부족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조방 여성 노동자들이 해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노사 투쟁의 최전선에서 수개월을 버텨 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고, 이런 점이 &quot;죽어도 좋다&quot;는 태도로 싸우는 여공들에 대한 남성 노조 지도자들의 감탄과 존경심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이런 행동에서 우리는 이들이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싸움의 한복판에 선 일하는 여성으로서―그리고 그 중에서도 드문 기회를 차지한 대공장 엘리트 노동자로서―가졌을 자부심과 자의식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조방 여성들이 20년 전 선배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해방 직후 조방 노동운동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과거 여공 투쟁의 역사가 남성 노조 활동가들로 하여금 여공을 선뜻 '동지'로 인식할 수 있게 한 문화적 조건을 마련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lt;br /&gt;&amp;nbsp; 동시에 1951~52년의 조방 쟁의는 분회 및 전국 단위에서 남성 지도부 주도로 진행되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식민지기와 달리 이 시기 남한에서는 정부가 승인한 대한노총만이 산업 노동자 집단의 유일한 대표로서 정부와 상대할 수 있었다.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조직 노동운동의 제도화와 세력 강화가 가져온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여성의 역할이 평조합원으로서 남성 지도부에 의해 동원되는 보병의 역할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조직을 체계화한 전평 운동에서 이미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조방 사례와 같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었던 노동쟁의의 경우, 여성들이 실제 전투력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노총의 남성 지도자들이 상황을 지도&amp;middot;통제했고 언론은 그들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여성이 지배적인 사업장에서의 파업도 더 이상 '여공 파업'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물론 남성 노도 지도자들이 여공들의 기여를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현존하는 문서 자료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lt;br /&gt;&amp;nbsp; 1930년대 부르주아 민족주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미래 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여성 노동자들의 절박한 외침에 주목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투쟁성은 높이 평가되고 기록으로 남았다. 당시 공산주의 적색 노조 이론가와 활동가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 노동자로서 보인 역량을 높이 평가했고, 혁명을 위해 싸우는 프롤레타리아 보병으로서 그들의 잠재력에 기대를 걸었다. 반면, 1950년대에는 국가가 노동조합운동을 인정하고 제도화하는 한편 남성이 전국, 지역, 사업장 수준에서 노조 지도부를 독점했고 여성 노동자들은 주변화되었다. (218~220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민주노조 운동을 통해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 활동가로서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로서 새로운 주체성을 형성했다.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과거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계급 위계뿐만 아니라 젠더에 대해서도 점점 더 많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민중운동가들과 이론가들은 대부분 젠더에 기반을 둔 착취와 억압을 주된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지만, 민주노조의 여성 운동가들은 학계나 일반 대중의 이해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젠더 의식을 보여 주었다. (293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여성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조 사수 투쟁은 계급적 이익 추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민주적 회의, 교육 프로그램, 그룹 활동, 시위, 농성, 국가 폭력과 사측에 의한 폭력을 경험하며 주체성의 변화를 겪는 동시에 노조 활동을 통해 사업장 문화와 주변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노조 활동을 통해 '노동자'임에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공순이'라는 단어가 강요한 고통스러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 (299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비난하고 여성들의 투쟁을 폄하하는 담론은 1980년대 내내 힘을 발휘했다. 심지어 이 담론은 1987년 이후 더 깊이 뿌리를 내려 남성 주도 민주노조 운동 '신화'의 일부분이 된다. 김원은 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작업을 통해 그 신화의 '만들어진'invented 성격을 해부한다. 이에 따르면,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대기업 남성 노조원에게는 노동운동의 지배 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새로운 서사(&quot;새로운 남성 노동자의 상징&quot;)가 필요했다. 남성 영웅 전태일이 &quot;모든 노동운동의 상징&quot;으로 떠올랐고, 남성 노동자의 투쟁성, 계급의식, 연대를 위한 역량이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판단을 수용한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었다. 새로운 노동운동사에서 남성 노동자의 부상은 과거의 약점을 극복하고 &quot;과학적&quot; 이론에 바탕한 전투적인 투쟁으로 나아가는 바람직한 발전으로 그려졌다. 이런 신화 쓰기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와 그들 투쟁의 주변화는 당연했다. 김원은 1987년 이후의 지배적 담론이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에 대해 제기하는 핵심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많은 한계를 지닌 여성 노동자 주도의 민주노조 운동은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quot;질적 발전의 장애 요인&quot;이었다. 둘째,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이 지닌 조합주의나 경제투쟁 중심성 등은 &quot;단기 고용 여성 노동자들의 한계에서 기인&quot;한다. 셋째,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은 &quot;이데올로기 혹은 철학이 결여된 물질적 빈곤에 대해 반응한 운동&quot;이다. 김원은 이런 시각이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한 사회학자 이옥지와 인류학자 김현미 등 소수의 연구를 제외하면 당시(2006년)까지 발간된 대부분의 문헌들에 팽배해 있다고 분석한다.&lt;br /&gt;&amp;nbsp; 이렇게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는 노동운동의 주도 세력이 된 남성 노조원의 관점에서 다시 쓰였고, 197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의 이른바 '한계'라는 관념이 노동운동과 노동 관련 학술 문헌에서 상식이 되었다. 여성 주도의 운동에서 남성 주도의 운동으로의 '진보'라는 생각은 한국 노동운동 안팎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남성 중심적 사고의 습관과 쉽게 공명하며 안착했고, 따라서 여성 활동가들이 아무리 부당하다고 느낀다 해도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 (326~328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체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논의할 때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의 결과로 여러 형태의 비정규 노동이 급증하는 현상의 '새로움'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그것이 오랫동안 한국 경제를 뒷받침해 온 노동시장 분절과 성별 분업의 역사와 관련돼 있을 가능성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건 분명하다. 또한 비정규직화 현상을 정의할 때 젠더를 주요 분석 범주에서 제외함으로써 오늘날 노조 운동은 젠더 문제를 마주하고 풀어 갈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이런 결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움에 대한 주장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은 20세기 내내 한국에서 자본주의 전략의 필수적인 요소로 사용돼 왔다. 비정규직 노동의 활동은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과 함께 새로 시작된 일이 아닌 것이다. 대다수 여성 노동자에게는 특히 그랬다. 이들에게는 비정규 고용이 일상적이었고, 공장노동자나 은행 직원처럼 정식 고용계약을 맺을 만큼 운이 좋은 여성들도 결혼과 함께 고용이 종료되는 것이 관례였다. 여성이 주축이 된 몇몇 노조들에서 있었던 결혼 퇴직제 폐지 운동은 여성에게 사실상 비정규직을 강요하는, 성별화된 노동시장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었다. (335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사실 1970년대는 남성 노조원들에게 수치스러운 시기다. 그 기간 여성 노동자들은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민주노조를 지켜나갔던 반면 남성들은 대체로 침묵하거나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는 데 일조했다. 1987년 이후 남성 중심의 조직운동이 주류가 되면서 과거 여성들이 이끈 민주노조 운동의 한계를 강조하고 여공 투쟁의 역사를 평가절하하는 데 성공했지만, 1970, 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중요한 노조 운동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투쟁성, 지구력, 리더십을 입증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재 민주노총 남성 노조 지도부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이제는 서비스 산업 비정규직의 위치에서―1970년대의 자매들처럼 신자유주의적 조치에 맞서 전투적이고 끈질기며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lt;br /&gt;&amp;nbsp;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노조 운동은 21세기의 여성 노동자들과 1970년대 여공들 사이의 연결성을 보지 못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을 돕고 남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명을 호전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 오늘날 불안정 노동은 여성을 넘어 남성으로, 또 중소기업을 넘어 대기업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따라서 이런 새로운 상황은 자본주의의 지나친 이윤 추구에 맞서 다양한 위치에 선 노동자들이 폭넓은 연대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성 노동자들이 한 세기에 걸친 투쟁에서 일관되게 보여 준 연대의 정신과 투쟁성을 조직 노동운동이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우리가 한국에서 목도하는 노동운동의 쇠락 추이에 제동을 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1970년대 여성 주도 노조 운동의 역사가 중요한 이유이고, 최근 수십 년 동안 학자, 활동가, 당시 투쟁에 참여했단 여성들 사이에서 그 역사가 치열한 기억 전쟁의 현장이 되어 온 이유다. (338~339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2017년 9월 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특강 초청 강연에서 김진숙이 들려준 이야기와 답변은 서로 얽힌 두 가지 문제―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연대의 필요성과 한국 노조 운동의 젠더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이 그간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보여 준다. 강연에서 그는 만연한 성희롱과 저속한 성적 언사에 시달렸던 자신의 직장 생활 경험을 회상하며 최근에야 그것을 '여혐'(여성 혐오)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학생의 질문에 답하며 그는 음담패설을 날리는 사람들이 평소 자신을 도와주고 믿어 주던 선량한 '아저씨'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갈등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학생들에게 모두가 이것이 왜 문제인지 &quot;끊임없이 얘기해야&quot; 하며, 나서고 떠들고 &quot;그래야지 세상이 바뀐다&quot;고 당부하면서 그것이 그가 트위터에 &quot;어설프기는 하지만&quot; 매일 여성과 관련된 얘기를 쓰려고 노력하는 이유라고, 그리고 그것은 과거에 자신의 말에 상처받았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았고 외면하기도 했던 데 대한 &quot;자기반성&quot;이라고 덧붙였다.&lt;br /&gt;&amp;nbsp; 그날의 강연을 김진숙은 자신이 &quot;여성 노동자였고, 지금도 여성 노동자로 살고 있&quot;다는 말로 열면서 공장노동자로서 겪었던 착취와 성적 폭력의 실상을 자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quot;이 [여성] 노동자들은 뭐가 되어 있습니까?&quot; 그가 제시한 답은 이랬다. &quot;다 비정규직이 되어 있지요. 지하철에서 청소용역 노동자들, 학교에 청소하시는 노동자들 다 그 시절에 그렇게 일했던 노동자들이에요.&quot; 그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앞으로 노조 운동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명확한 처방을 제시했다. 현재 노조 운동의 한계 중 하나는 40세 이상의 남성 정규직 중공업 노동자들 위주의 운동이라는 점이고,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357~358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당시 김 지도위원의 모습 중 특히 한 장면이 뇌리에 남아 이 책을 쓰는 내내 영향을 미쳤다. 워싱턴 대학교 교내에서 열린 한 워크숍에서 방청객으로 한구석에 앉아 나를 포함한 학자들의 토론을 통역을 통해 경청하고 있던 그가 손을 들고 짧지만 인상적인 발언을 했다. 토론자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요지였다. 이 말이 내게는 자신과 같은 노동자들이 내세우는 대의에 공감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실제 그 당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언어로 말하는 고학력 엘리트 지식인들에 대한 깊은 의심에서 나온 항의로 느껴졌다. 그 장면이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 여성 노동자를 연구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묻게 만들었다. (...) (370~371쪽.)&lt;/blockquote&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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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0 May 2026 07:31:25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역사비평 154호 (역사비평사, 202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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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419.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HLJoO/dJMcaiQKn84/ijkqwpWk9yQKXx5ox3250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HLJoO/dJMcaiQKn84/ijkqwpWk9yQKXx5ox3250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HLJoO/dJMcaiQKn84/ijkqwpWk9yQKXx5ox3250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HLJoO%2FdJMcaiQKn84%2FijkqwpWk9yQKXx5ox3250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419.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nbsp;12.3을 민주주의(의 역사)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야 할까요. 대다수의 평론은 12.3을 과거로의 퇴행 내지는 미달성된 민주주의의 산물로 보는 듯합니다. 따라서 '내란 극복' 논의 역시 군부독재로부터 이어지는 일군의 세력을 청산하고 여전히 미완성 상태인 민주주의를 완성시키자는 정도로 귀결됩니다. 물론 '내란 세력'이 70~80년대 군부독재로부터 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그간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던 것이냐, 87년의 성취는 대체 무엇이냐, 하는 등등의 질문이 꼬리를 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역사비평』 이번 호의 특집 '혐오의 역사와 극우정치'는 이런 점에서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이 특집은 87년 체제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도 그 이면에 시장 질서의 공고화, 공동체의 파편화, 소수자에 대한 배제 등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들 모순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하지 못한다면 12.3 같은 위기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거죠. 너무 익숙한 근본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요즘 유튜브나 TV에 나오는 평론가들이 12.3의 의미를 두고서는 거의 판에 박힌 듯 비슷한 말들만 하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이런 이야기가 꽤 반갑게 느껴지네요. ㅎㅎㅎ&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 외에도 '환경 문제에 맞선 지역민들' 특집에 실린 여러 사례연구와 '역사 파괴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역사학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대표 조직을 제안한 기경량 선생님의 논문 등도 눈길을 끕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1987년 체제는 통상적으로 권위주의 독재의 종언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로 요약된다. 그러나 비판적 관점에서 이 시기를 재독해할 때, 87년 체제는 자본주의적 지배양식이 국가기구의 물리적 강제로부터 시장의 이데올로기적 포섭으로 재편되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6월항쟁이 쟁취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분명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제한하고 정치적 투명성을 제고하는 역사적 성과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민주화의 공간은 자본에게 국가의 직접적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사회 전 영역에 자신의 논리를 관철할 수 있는 '시장의 자유'를 선사하는 조건을 동시에 창출했다. 국가의 직접적 통제력이 약화된 공백 속에서 자본의 자율성은 급속히 확대되었고, '자유'라는 담론은 민주적 기본권의 보장이라는 의미에서 자본의 이동과 착취의 자유라는 의미로 점차 재편되어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87년 체제는 민주주의의 완성형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입고 그 지배력을 더욱 정교하게 세련화한 '자본의 민주화&amp;middot;자유화' 과정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이상록, 「한국 극우의 혐오정치와 대중심리」, 3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결국 촛불혁명이 차별금지법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광장의 에너지가 불충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권이 여전히 자본과 다수 중심의 87년 체제의 문법에 안주한 채, 광장이 제시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상상력을 제도 안으로 수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광장에서 충분히 터져 나왔으나, 그것을 법과 제도로 번역해야 할 정치가 부재했다.&lt;br /&gt;&amp;nbsp; 이 사실은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적 과제가 단순한 정권 교체나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에 머물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 촛불 정치는 신자유주의가 구조화한 배제와 차별의 질서를 극복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사회적 합의의 조건이 아닌 민주주의의 전제로 재정립하는 '평등의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광장의 민주주의가 제도의 민주주의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다수의 동의를 구하기 이전에 모든 구성원의 존엄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임을 정치가 선언해야 한다.&lt;br /&gt;&amp;nbsp; 2024년 12월의 비상계엄 선포는 이 미완의 과제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촛불혁명으로부터 7년이 지난 시점에 자행된 이 사태는 극우적 권위주의가 단순히 주변화된 정치 세력의 일탈이 아니라, 87년 체제가 내포한 구조적 모순이 특정한 위기 국면에서 언제든 재폭발할 수 있는 잠재적 에너지로 잔존해 왔음을 보여준다. 광장이 열어젖힌 가능성이 제도 안에서 봉쇄되면서 그 공백은 결국 권위주의의 귀환을 위한 정치적 공간으로 전화되었다. 이는 포스트 촛불의 과제가 단순한 제도 개혁의 수준에 머물 수 없으며, 신자유주의적 배제의 구조와 그것이 배양하는 혐오정치의 토대를 함께 해체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역사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이상록, 「한국 극우의 혐오정치와 대중심리」, 41~4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혐오정치의 핵심적 기능은 분노의 방향을 조율하는 데 있다. 불평등의 심화, 고용불안의 만성화, 자산 양극화의 고착 등 신자유주의 체제가 구조적으로 산출하는 모순들은 대중의 광범위한 분노를 축적시킨다. 혐오정치는 이 분노가 자본과 기득권을 향해 수직적으로 분출되는 것을 교묘하게 차단하고, 대신 그것을 사회적 약자를 향한 수평적 폭력으로 전환하여 소진시킨다. 분노한 개인들은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는 대신, 자신보다 더 취약한 타자를 향해 공격성을 분출함으로써 일시적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 그 결과 지배 질서는 근본적 비판에 노출되지 않은 채 재생산되며, 혐오는 체제를 안정시키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완충재로 기능하게 된다. 혐오가 정치 행위자들에 의해 전략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불만을 잠재우는 가장 값싸고 효율적인 통치의 수단이다.&lt;br /&gt;&amp;nbsp; 혐오 표현에 대한 법적 규제는 필요한 조치이나, 그것만으로는 혐오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적 조건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혐오라는 증상의 억제를 넘어, 그것을 산출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 즉 개인을 경쟁적 원자로 분해하고 불안을 일상화하며 연대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체제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변혁이다. 이는 곧 사회적 안전망의 실질적 확충, 자산 불평등의 구조적 해소, 노동권의 회복, 그리고 경쟁이 아닌 돌봄과 연대를 사회 조직의 원리로 재정립하는 정치적 기획을 의미한다. 무한경쟁의 논리에 잠식된 냉소를 거두고,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감의 능력과 파편화된 개인들을 다시 잇는 연대의 언어를 복원해야 한다. (이상록, 「한국 극우의 혐오정치와 대중심리」, 43~44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그러나 이 모든 분석에서 한 가지가 거의 완전히 누락되어 있었다. 바로 자본주의였다. (...)&lt;br /&gt;&amp;nbsp; 2025년 한 해 동안 한국 학계에서 생산된 극우 개신교 관련 문헌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르러진다. 12&amp;middot;3 계엄 이후 극우 개신교를 다루는 연구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 많은 연구들이 이를 파시즘의 관점에서 접근해 그 정치적 위험성을 성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파시즘을 잉태한 자본주의적 토대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는 기이한 모순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들 연구에서 극우 개신교와 자본 축적, 즉 개신교로 대표되는 한국형 극우 파시즘과 위기에 처한 한국 자본주의 축적 체제 사이의 관계를 구조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놀라울 정도로 부재했다.&lt;br /&gt;&amp;nbsp; 한국 학계의 상황은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극우 정치의 부상을 설명하기 위해 학계가 크게 두 진영으로 갈라져, 사회문화적 요인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해서도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경우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미국에서는 비록 상대적으로 소수지만, 극우의 이념적 기원을 자본주의 정신 그 자체에서 찾는 대안적인, 즉 &quot;두 번째 해석&quot; 전통이 엄연히 존재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역사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역사학자 슬로보디언(Quinn Slobodian)의 논의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현대의 극우를 신자유주의의 거부가 아니라, 시장 원리를 인종&amp;middot;국적&amp;middot;젠더 등 위계적 범주와 결합해 재구성한 &quot;불량 변종&quot;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극우의 '반(反)글로벌리즘'은 자본의 이동을 막는 것이 아니라 이민자와 노동력의 이동만을 선별적으로 통제하여 기득권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종족-경제(ethno-economy)' 논리에 기반한다. 그는 극우가 다자간 무역 거버넌스나 아웃소싱 같은 특정 요소는 폐기하지만 시장 경쟁 및 승자독식이라는 사회적 다윈주의 원리는 강화하며, 이를 인종&amp;middot;국적&amp;middot;젠더 등의 위계적 범주를 통해 번역하면서 탄생했다고 본다. (...)&lt;br /&gt;&amp;nbsp; 최근 국제 학계의 전반적인 연구 동향 역시 극우 파시즘의 부상을 문화적 반동이나 우파 정체성 정치의 산물로 보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이를 현대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깊이 연루된 현상으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적 전환을 주도하는 학자들은 기존의 주류 정치학이 극우를 민주주의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나 인종주의적 문화 현상으로만 치부하며 경제적 토대를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lt;br /&gt;&amp;nbsp; 그러나 한국 학계에는 이러한 &quot;두 번째 해석&quot; 전통이 현저히 약하다. 극우 개신교를 한국 자본주의 지배 논리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quot;종교적 형식&quot;으로, 또는 신자유주의적 축적 체제의 신학적 정당화라는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구의 부족함은 우리가 극우 개신교 현상의 가장 깊은 뿌리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따라서 효과적인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정용택, 「구원의 자본, 혐오의정치―한국 극우 개신교의 정치경제학, 1945~2025」, 53~55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이 시기 성매매 여성은 이미 회생 불가능한 과거로 고정되었고, '전통' 가족은 복원되어야 할 이상적 과거로, 미혼모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미래의 위험으로 호출되었다. 시간은 폭력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여겨지기 때문에, 필멸의 존재인 인간에게 시간 질서를 동원한 언어는 무엇보다 강력한 통치 장치가 될 수 있다. 생애는 되돌릴 수 없고, 기회는 유한하며,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만회할 수 없다는 전제는 정상가족을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유일한 경로로 자연화했다. 이 과정에서 생애주기에 어긋나는 결과는 개인의 실패나 결함이 되고, 이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낙인이 된다. 여성의 삶은 영원히 잠정적이고 미완의 상태로 규정되기 때문에, 이들의 현실은 항상 교정되거나 완성되어야 할 단계일 뿐이다.&lt;br /&gt;&amp;nbsp; 그결과 현실에 존재하는 성매매 여성들은 여타 시민 주체의 시야에 등장할 자격이 없으며, 이미 실패한 과거로 고정된다. 낙태에도 반대하고 출산해도 사회구성원으로 용납하지 않는 논리는 혼인 관계 밖에서 이미 임신한 여성에게 가능한 선택지를 봉쇄한다. (...) (조민지, 「영원히 현재일 수 없는―1980년대 정상가족 규범의 '시간' 질서와 여성혐오」, 114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일반적으로 민사소송에서 손해배상이 성립하려면 ① 가해행위가 존재해야 하고, ② 가해행위와 손해 발생 간에 인과관계가 인정되어야 하며, ③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 책임이 피해자인 원고에게 있다는 것이 판례상 확립된 원칙이다. 그러나 공해소송은 피해자가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른바 '개연성 이론'이 등장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개연성 이론이란 공해 사건에서 원고가 인과관계의 개연성만을 입증하면, 피고 측이 명확한 반증을 제시하지 않는 한 가해행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법리를 말한다. 1970년대 한국 법조계에서는 개연성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공해소송은 1심, 2심, 3심을 거치면서 판사마다 견해가 달라 판결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강성호, 「1970~90년대 순천만 어민의 생존권 투쟁과 공해소송」, 213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기사연의 조사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온산공단 입주 공장들이 배출한 공해물질에 의한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피해 건수는 27건, 농작물과 수산물 피해보상액은 15억 7,787만 4,000원이었다. 피해 건수나 피해보상액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이는 주민들이 오염 문제의 원인을 특정하거나 피해 상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78년 5월의 한이석유 관련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국립수산진흥원의 피해 감정액은 약 10억 원이었지만, 실제 지급된 보상금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비슷했다. 실제 주민들이 체감한 피해는 드러난 숫자보다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고 적은 보상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정계향, 「공해와의 공존을 강요당한 사람들의 대응―온산지역의 공해 문제와 주민운동을 중심으로」, 24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그간 정치권 인사들이 제도권 역사학자들보다 사이비역사학자 및 사이비역사 단체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훨씬 더 조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제도하의 정치인들은 선거에서의 득표율 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력이 조직화되고 세력을 갖춘 집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구조적으로 당연하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의 목소리를 통합하여 한국 사회와 정치인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하고 정책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부 전공 단위로 분리되어 있는 학회들의 한계를 넘어 역사학 분야의 대표성과 권위를 확보할 단일 조직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예컨대 한국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포함된 통합적 기구인 '한국역사학자협회' 혹은 역사학자뿐 아니라 역사 교사, 학예사, 공공 역사가 등 역사 관련 종사자들까지 총망라한 '한국역사협회' 같은 기구를 구상해볼 수 있다. (기경량, 「정치권력에 밀착한 역사 파괴 운동에 대한 제도적 대응」, 334쪽.)&lt;/blockquote&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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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8 May 2026 10:15:1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서울리뷰오브북스 21호 (알렙, 202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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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406.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JfsDQ/dJMcabqBpqE/7aWJqYEPnLri584GqUtMm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JfsDQ/dJMcabqBpqE/7aWJqYEPnLri584GqUtMm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JfsDQ/dJMcabqBpqE/7aWJqYEPnLri584GqUtMm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JfsDQ%2FdJMcabqBpqE%2F7aWJqYEPnLri584GqUtMm0%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406.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런저런 시행착오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계정은 저희가 책을 읽고 난 감상을 올리는 용도로 거의 정착이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도 지성과 노력이 부족하다보니 널리 읽힐 글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보석 같이 빛나는 역사책들을 찾아 읽고 부족하나마 감상을 나누는 것이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논문은 언제 쓰냐고 이놈아...)&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어김없이 좋은 서평으로 가득한 서리북 이번 호에서는 '뾰족한 서평'이라는 키워드에 사로잡혔습니다. 제가 이 계정에 쓰는 ('(서)평評'보다는 '(독후)감感'에 훨씬 가까운) 글들을 냉정하게 따져보면 '뾰족하다'는 기준에서는 한참 못미칩니다. 그보다는 '주례사 비평'에 좀 더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아래 인용 글의 지적처럼 비판에 따르는 대가를 감당할 깜냥이 못되기 때문이겠죠. 다른 어떤 분야에 견줘도 너무 형편없이 쪼그라든 역사책 분야의 처참한 상황 때문에라도 지금 당장은 책의 장점을 어필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글쎄요... '냉정하지 못함'의 변명치고는 영 궁색하네요 ㅋ&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물론 여기서 말하는 '뾰족하다'라는 말이 단순히 비판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덮어놓고 독설만 퍼붓는다고 좋은 서평이 아니라는 거죠. 그보다는 책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짚어낸 후 이에 대해 가차 없이 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뾰족함'이 무엇보다 많이 필요한 분야가 바로 역사책 분야일지도 모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자 개인일 수도 있고 역사학계 전반일 수도 있고...) 역사책은 사실관계를 충실하게 설명하는 연대기적 서술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일처럼 몰려드는 사실관계의 바다 속에서 책의 논지와 저자의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거죠. 이럴 때 적절한 '평評'이 있다면 저자와 독자의 사이는 한층 가까워질 수 있을텐데, 이때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뾰족함'이겠지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게 바로 제가 지향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그러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흠... (말잇못)&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트럼피즘이 득세한 미국의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이 책의 초점은 당면한 사회&amp;middot;경제적 문제에 대한 대응이 아니다. 1970년대, 뉴딜 질서의 붕괴에서 시작해 2016년 트럼프의 첫 대통령 당선까지 이어지는 산자유주의 질서의 흥망성쇠와 현재의 미국이 그런 거대한 흐름 가운데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건조하게 다룰 뿐이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그리고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들여다보면서 역시 역사학자의 관점으로 쓴 책이라 생각했다. 신자유주의 질서의 성립과 쇠퇴에 대한 서술에서 멈추고 대안 제시나 미래 전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은 독자에 따라 이 책의 명확한 장점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아쉬운 한계로 느낄 수도 있겠다. (유정훈, 「트럼프 시대에 관한 역사학자의 인식 - 『뉴딜과 신자유주의』」, 34~35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트럼프 2기의 상황을 보며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뉴딜과 신자유주의』를 서평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 주제에 관한 정치학자나 저널리스트, 현실의 정책에 참여했던 연구자들과는 다른 관점을 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은 트럼프의 소셜미디어 포스팅 하나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거스틀 같은 역사학자의 인식을 염두에 두고 기회가 왔을 때 펼칠 아이디어를 다듬으며 버텨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 벌어지는 불의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거나 당장 해야 할 일을 미루어 두자는 얘기는 아니다. 서평 원고를 마무리하는데,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이민자 단속에 나선 연방 정부 요원의 총격에 무고한 미국 시민인 간호사 알렉스 프레티(Alex Jeffrey Pretti)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존 관념이 통용되지 않는 혼돈의 시대이고, 책 읽기와 서평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유정훈, 「트럼프 시대에 관한 역사학자의 인식 - 『뉴딜과 신자유주의』」, 38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김두얼 (...) 칭찬으로 가득한 서평을 흔히 주례사 서평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이 뾰족한 서평을 보고 싶어 하지만, 세상에는 주례사 서평이 더 많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판은 감당해야 하는 대가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뾰족한 서평으로 인한 손익 계산보다는 저는 이 서평이 정말 뾰족한 서평이었을지 아니면 모 교수님의 지적처럼 냉소 서평이었을지를 더 고민합니다.&lt;br /&gt;&amp;nbsp; (...) 뾰족한 서평은 중요합니다. 냉소 비평과 뾰족한 비평을 구분하는 기준은 기본적으로 책의 핵심 문제를 얼마나 제대로 짚는지에 달렸습니다. 만일 어떤 책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도 없이 신랄한 문장을 나열한다면, 그것은 냉소 비평입니다. 하지만 책의 문제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냉정하게 표현한다면, 언뜻 보기에 독설 같아도 가차 없는 평가를 담은 뾰족한 서평입니다. (「좌담 - 뾰족한 서평과 다정한 수다 사이에서: 우리 시대 '읽기'의 새 영토」, 91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김두얼 (...) 저처럼 책을 읽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에게는 남모를 고통이 하나 있습니다. 독자분들에게 '이 책은 이러하니 꼭 읽으십시오'라고 한 권을 자신 있게 권하기 위해서, 실은 읽지 않아도 될 법한 책들을 산더미처럼 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읽는 책들 중 '와!' 하고 감탄하게 되는 책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 보석 같은 책을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평범한 책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죠. (...)&lt;br /&gt;&amp;nbsp; 일단은&amp;nbsp;무턱대고&amp;nbsp;읽어&amp;nbsp;보시기를&amp;nbsp;권합니다.&amp;nbsp;어떤&amp;nbsp;책이&amp;nbsp;좋은지에&amp;nbsp;대한&amp;nbsp;정보는&amp;nbsp;김겨울&amp;nbsp;작가님의&amp;nbsp;유튜브나&amp;nbsp;《서리북》&amp;nbsp;같은&amp;nbsp;매체를&amp;nbsp;통해&amp;nbsp;얻으시면&amp;nbsp;됩니다.&amp;nbsp;다만,&amp;nbsp;나만의&amp;nbsp;기준이&amp;nbsp;생기는&amp;nbsp;어느&amp;nbsp;지점까지는&amp;nbsp;다소&amp;nbsp;막무가내로&amp;nbsp;이것저것&amp;nbsp;읽으며&amp;nbsp;서점&amp;nbsp;매상을&amp;nbsp;올려드리는&amp;nbsp;과정이&amp;nbsp;필요합니다.&amp;nbsp;(웃음)&amp;nbsp;이것이&amp;nbsp;제가&amp;nbsp;드릴&amp;nbsp;수&amp;nbsp;있는&amp;nbsp;가장&amp;nbsp;솔직한&amp;nbsp;답입니다.&amp;nbsp;(「좌담&amp;nbsp;-&amp;nbsp;뾰족한&amp;nbsp;서평과&amp;nbsp;다정한&amp;nbsp;수다&amp;nbsp;사이에서:&amp;nbsp;우리&amp;nbsp;시대&amp;nbsp;'읽기'의&amp;nbsp;새&amp;nbsp;영토」,&amp;nbsp;106쪽.)&lt;/blockquote&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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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7 May 2026 17:10:1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요즘 역사 : 근대 (황현필, 역바연, 2024.)</title>
      <link>https://doggun.tistory.com/1037</link>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108.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JdrVn/dJMcac33sEF/TKmkeB2x8ZKo4CnXaQnLA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JdrVn/dJMcac33sEF/TKmkeB2x8ZKo4CnXaQnLA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JdrVn/dJMcac33sEF/TKmkeB2x8ZKo4CnXaQnLA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JdrVn%2FdJMcac33sEF%2FTKmkeB2x8ZKo4CnXaQnLA0%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108.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책은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한일병합까지를 다룹니다. 이 시기의 역사를 읽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라 망하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읽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이 시기를 직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망국의 역사를 냉정하게 따져봄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조선의 갈림길』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이 책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무엇보다 『요즘 역사 : 근대』라는 제목에서 근대의 역사를 통해 &quot;요즘&quot;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목표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서론에서 &quot;요즘 역사인 근현대사를 알게 되면 (...) 삶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할 확률이 높아진다&quot;(4쪽)고 한 것 역시 이러한 목표와 상통합니다. 이처럼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자는 관점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요즘 잘 안 쓰는 표현으로 ㅋ) '감계주의感係主義'라고 하는데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에 접근하는 흔한 자세 중 하나거든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유의할 것은, 당대 혹은 현재의 권력 구도에 맞춰서 생각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당대의 선택지가 제한되었다고 해서 그 시기를 '역사'로 반추하는 우리 생각의 선택지까지 제한될 필요가 없으니까요. 지금 현실의 권력에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종속되어서는 안되는 것도 물론입니다. 개항기를 예로 들자면, 당대의 정치적 선택은 쇄국과 개방으로 한정되어 있었겠지만 그 시기를 바라보는 지금 우리까지 쇄국과 개방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흥선대원군도 고종도 아니니까요. 당대의 역사에 대한 해석 역시 지금의 정치적 구도에 맞춰서 진보와 보수로 두부 자르듯 구분될 필요가 없습니다. 무수히 많은 생각과 해석들을 서너 개의 선택지로 정리하는 것은 선거 같은 특수한 국면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추천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뉜 진영 구도 안에서, 나와 다른 진영에 속한 이들을 비판하기 위한 용도로만 역사를 이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구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황현필의 『요즘 역사 : 근대』는 그런 점들을 거의 유의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책은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선택지를 한정하고 그 중 하나만 고를 것을 줄곧 요구합니다. 예컨대 &quot;동학농민운동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민비 일족을 지지할 수 없다&quot;(179쪽) 같은 서술은 역사를 통찰력을 얻는 근간이 아니라 특정한 세력을 선택하는 정치행위처럼 이해하는 듯 보입니다. 역사를 정正과 사邪의 대립으로 정리한 후, 정正의 자리에는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 등을 놓고 사邪의 자리에는 민씨 척족이나 친일파 등을 배치하는 거죠. 이들 사邪의 세력은 &quot;잠재적으로 친일 매국의 유전자가 존재하는 인간들&quot;(136쪽) 내지는 &quot;명에 사대하고, 청에 의지하고, 일본에 굴복하고, 다시 미국에 사대하는 이 망할 놈의 사대 DNA&quot;(111쪽)를 가진 이들로 지목됩니다. (그런데 &quot;DNA&quot;라고 했으니 저자 자신도 그에 속하는 것 아닌가요;;) 이는 현재의 정치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앞서 말한 사邪의 집단은 &quot;분단 세력&quot;(5쪽)&quot;과 철지난 반공주의(291~292쪽), '정치를 시끄럽게 하는 &quot;역사에 무지한 사람들&quot;'(4쪽)의 형태로 여전히 현존한다는 것이 이 책의 세계관입니다. (대원군부터 한일병합까지를 다루는 이 책이 분단과 반공을 문제시하는 것도 많이 뜬금없습니다만...)&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특히 이들 사邪의 배후에 놓인 외세, 즉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을 식민지배했다는 '결과'를 과거로 무한히 소급하여 일본을 규탄하고 일본의 악습을 인종적&amp;middot;생물학적으로 본질화하는 태도(박훈,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 204쪽)를 시종일관 견지합니다. &quot;일본은 강자를 빨리 인정할 줄 아는 민족성이 있다&quot;(67~68쪽)거나 &quot;우리가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한 나라가 하필 일본이라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quot;(100쪽)처럼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서술은, 좀 세게 말하자면,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 같은 레토릭에게 너무 좋은 먹잇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quot;조선의 선비들은 왜 을미사변의 복수를 위해 왜왕의 부인을 죽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까? (...) 에도성의 담을 넘어가는 한국인과 한국인에게 끌려나오는 왜왕 내외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quot;(181쪽)는 서술에까지 이르면... 이 이상 책을 계속 읽는 것이 괴로울 정도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책은 급기야 출처가 불분명한 선정적 이야기까지 손에 집히는 대로 막 집어던지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임오군란 당시 몸을 피했던 민비가 한강 건너 어느 마을에서 왕비를 욕하는 노파를 보고 기억해두었다가 환궁한 후에 그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학살했다는 이야기(107쪽)은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출처를 찾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도 민비가 가혹하게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처도 불분명한 이야기를 그를 '학살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책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민비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냉정한 비판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혐오인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선정적이기로는 &quot;우범선이 민비를 시간(屍姦)했다는 설도 있다&quot;(172쪽)는 서술이 으뜸입니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이 내용은 2000년대 초 소설가 김진명이 발견하여 국내에 보고한 이른바 '에조 보고서'에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를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남긴 서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진명이 자신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 사건』에서 인용한 '에조 보고서 453호'라는 이름의 문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여기에 담겼다고 하는 윤간&amp;middot;시간 관련 내용 역시 김진명의 상상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 내용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범선이 이를 행했다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는 아마도 &quot;윤간 및 시간이 이뤄진 현장에 우범선이 있었다&quot;는 내용(위키피디아 '우범선' 항목, 검색일: 2026년 5월 5일)을 저자가 &quot;우범선이 시간을 했다&quot;로 변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이 책 외에는 그런 식으로 쓰인 텍스트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는 안그래도 출처가 불분명한 낭설을, 저자가 자기 상상력까지 더하여 부풀린 결과로 보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런 것들에 비하면 세도정치기를 헌종과 철종 대의 30년이라고 했다가(11쪽) 얼마 안 가 순조까지 포함한 60년이라고 하며(27쪽) 스스로 갈팡질팡한다거나, 이제는 당대의 사료로는 가치를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인용(149~150쪽)한다거나, 단발령과 상관 없는 사진을 단발령 사진이라고(185쪽)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그저 사소한 실수로 넘어갈 수 있는 정도입니다. (물론 이 역시 역사학을 직업으로 삼은 이로서의 엄정함을 잃었다는 비판은 면키 어렵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제가 일전에 같은 저자의 『황현필의 진보를 위한 역사』에 대해 감상을 쓴 후에 들었던 여러 반응 중 하나는 '왜 이렇게 정색하고 반응하느냐'였습니다. 독자는 물론이고 동료 연구자들도 그런 반응을 전해주었는데요, 저 역시도 이 책의 여러 아스트랄한 서술들을 읽으면서 '내가 이런 글을 굳이 정색하고 다룰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에 담긴 사실관계의 오류와 진영논리 등이 역사학은 물론이고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하기에, 저자와 마찬가지로 역사학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몇 마디 말을 보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이 책이 상당히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했고, 저자 또한 사회적 영향력이 적지 않기에 그런 걱정은 더 큽니다. 그러고보니 저자가 최근에 꽤 중요한 직함을 얻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저의 걱정이 그저 그의 책에 대한 우려로만 그치기를, 그의 공적인 발언까지 우려하는 일은 생기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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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6 May 2026 21:37:0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지금 당장, 정의 실현 (황준서, 오월의봄, 202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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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361.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ePk7IP/dJMcafzJxLD/QMxCaLJr4gP8zBYmVEohK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ePk7IP/dJMcafzJxLD/QMxCaLJr4gP8zBYmVEohK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ePk7IP/dJMcafzJxLD/QMxCaLJr4gP8zBYmVEohK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ePk7IP%2FdJMcafzJxLD%2FQMxCaLJr4gP8zBYmVEohK0%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361.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amp;nbsp;1940년대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한 실험실,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아서 갤스턴(Arthur W. Galston)은 (...) '2,3,5-트리오도벤조산2,3,5-Triiodobenzoic acid, TIBA이라는 화합물을 흡수한 식물은 성장이 빨라지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모든 잎을 떨어뜨리며 말라죽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1943년에 〈개화의 생리학: 콩 작물의 개화 시기 연구를 중심으로Physiology of flowering: with especial reference to floral initiation in soybean〉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이후 여러 학술논문도 발표했다.&lt;br /&gt;&amp;nbsp; (...) 갤스턴의 박사논문은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살상무기 개발에 활용되었다. 바로 '고엽제defoliant'다. 우리에게는 여러 고엽제 중 하나인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55갤런 드럼통을 오렌지색 띠로 둘렀기 때문에 생긴 명칭)로 잘 알려진 '나무의 잎사귀를 마르게 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제초제'가 바로 그것이다.&lt;br /&gt;&amp;nbsp; 말레이시아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다. 세계 고무 생산의 중심지인 이곳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고엽제가 처음 사용된 땅이기도 하다. 영국은 1946년 일제를 몰아내고 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1948년 말라야연방이 수립되고, 말라야공산당이 무장투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같은 해 6월 16일 '말라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말라야공산당 계열 무장 조직들이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 작전으로 맞서자, 영국 공군은 하늘에서 고엽제를 살포했다. 열대우림과 농작물을 죽이면서 말라야 민족해방군이 밀림 속에 숨지 못하게 차단하고, 그들을 모두 굶어 죽게 하려는 의도였다.&lt;br /&gt;&amp;nbsp; (...)&lt;br /&gt;&amp;nbsp; 1952년 6월부터 10월 사이 말라야반도 약 510헥타르에 제초제가 살포되었고,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만 명 이상의 줌니들이 장기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살포된 제초제들은 땅으로 흡수되어 지하수로 유입되었고, 새로운 작물들을 자라나지 못했다. 참고로 여의도 면적이 290헥타르 정도이니, 말라야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제초제가 뿌려졌을지 상상해보길 바란다.&lt;br /&gt;&amp;nbsp; 말라야를 뒤덮었던 제초제 중 하나인 '트리오신Trioxone'은 이름도 복잡한 2,4,5-트리클로로페녹시 초산과 2,4-디클로페녹시아세트산을 50 대 50의 비율로 섞은 화합물이다. 갤스턴의 연구 대상이었던 2,3,5-트리오도벤조산은 이 화학물과 같은 구조C67H3O2를 공유한다. 영국 정부는 갤스턴의 연구를 바탕으로 화합물의 분자 구성을 조금씩 바꾸면서 무기화 실험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지금까지도 당시 제초제 사용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는 나라들에 고엽제를 살포할 수 있도록 실험 정보를 제공해 미국이 훨씬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고엽제를 악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영국이 고엽제 무기화에 대한 윤리적,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듯 미국 또한 영국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 했다.&lt;br /&gt;&amp;nbsp; (...)&lt;br /&gt;&amp;nbsp; 미군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약 10년 동안 베트남에서 C-47과 C-123 등 대형 항공기를 이용해 베트남에서 약 8000만 리터(2000만 갤런)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베트남 전체 국토 면적의 18%, 전체 삼림 면적의 20%에 달하는 지역이 오염되었다고 한다. 이 군사작전의 명칭은 '랜치 핸드Ranch Hand'였는데, 누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정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랜치'가 '농장'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는 점에서 섬뜩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농장에 제초제를 뿌리듯이 인도차이나반도에 제초제를 뿌렸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이 살포한 여러 고엽제 중 가장 유명한 유형이 '에이전트 오렌지'였다.&lt;br /&gt;&amp;nbsp; (...) 미국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저지른 만행은, 특히 1960년대 새로운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등장한 환경운동단체들로부터 환경전쟁environment warfare이라고 비난받았으며, 전쟁에서 환경파괴릐 비윤리성과 법적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을 촉발했다.&lt;br /&gt;&amp;nbsp; 고엽제로 에코사이드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바로 갤스턴이 고엽제가 파괴한 베트남을 방문한 후 그 용어를 사용해 미국을 강력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갤스턴은 미국의 고엽제 무기화에 반대하기 위해 1970년 2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전쟁과 국가의 책임에 관한 회의Congressional Conference on War and National Reponsibility'에 참가해 다음과 같이 에코사이드 금지 및 처벌의 필요성을 강변했다. 한국에서는 에코사이드 처벌운동의 역사적 맥락이나 갤스턴의 주장이 심도 있게 소개된 적이 없어서 그의 주장 중 일부를 옮겨보았다.&lt;br /&gt;&amp;nbsp;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결과로 우리는 인간이 구성한 집단의 전체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의도적인 파괴를 인류에 반하는 범죄인 제노사이드genocide로 정당하게 비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유사하게 인간이 자립해서 살아갈 공간을 제공하는 자연환경을 의도적이고 영구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도 에코사이드라는 용어를 써서 인류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가장 고도로 발전한 나라들은 이미 자신의 나라 곳곳에서 자기파괴적 에코사이드autoecocide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고엽제와 제초제를 광범위하게 살포하는 방식으로 아마도 유일하게 다른 나라에서도 에코사이드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유엔이 나서서 에코사이드 금지를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lt;br /&gt;&amp;nbsp; (...) 1933년 폴란드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은 인간으로서 도리를 저버린 악행barbarity과 예술&amp;middot;문화&amp;middot;공공시설을 비롯해 사회적 재산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행위vandalism를 통한 집단파괴와 집단학살을 범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목격하면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해 및 파괴를 뜻하는 'cide'를 합쳐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를 고안해 국제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호소했다.&lt;br /&gt;&amp;nbsp; 뉘른베르크 법정은 나치의 유대인과 다른 사회집단에 대한 잔인한 대우 및 살인 행위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제노사이드 행위를 처벌하지는 못했다. 다만 제노사이드에 대한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렘킨과 그의 동료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유엔 회원국들은 제노사이드 범죄 및 방지 처벌 필요성을 인정하여 1948년 12월 9일 '집단살해죄의 방지외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이하 '집단살해 방지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은 제2조에서 집단살해를 &quot;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서 행하여진 이하의 행위&quot;로 규정하고, 해당 행위 자체는 물론 공모, 교사, 미수, 공범까지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lt;br /&gt;&amp;nbsp; '집단살해 방지협약'은 다양한 방식과 차원에서 발생하는 집단살해를 전부 다루지는 못하고 있으며, 법률로 만들어지면서 '의도성' '살해의 규모' 등 범죄의 구성요건들이 실제로 법 적용을 어렵게 하고, 정작 협약 위반에 대한 처벌과 집단살해 예방 수단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지적받아왔다. (...) 그렇지만 '집단살해 방지협약'은 집단살해를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에 따라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선언했다는 점, 이 책에서 이후 살펴볼 다른 국제협약들, 특히 환경협약들과 다르게 미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과 그들의 동맹국들도 비준했다는 점,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각국 정부에 제도사이드 방지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lt;br /&gt;&amp;nbsp; 갤스턴은 '집단살해 방지협약'이 가지는 장점을 근거로 '국제 에코사이드 금지협약'을 채택해야 한다고 강변했고, 미국 정부의 에이전트 오렌지 사용 금지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펼치면서 과학자의 생명윤리 책임에 대한 여러 저술을 출판했다. 그가 초토화된 베트남을 방문한 후 쓴 논문 〈과학과 사회적 책임Science and Social Responsibility〉은 다시 고엽제가 초래한 참상을 목도하고 느낀 후회의 감정이 담겨 있다. (33~4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제도화된 살상은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고, 너무나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탓에 문제를 인지하기 시작하면 그 규모에 압도당할 수 있다. 그래서 일상의 에코사이드는 평범한 사람들이 저항하기에는 복잡한 일이라서 기술적 해결책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처럼 비친다. 죽음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데도 말이다.&lt;br /&gt;&amp;nbsp; 재해(또는 재난)를 규정하는 기준은 사회마다 서로 다르지만, 그 말에는 '손쓸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터진 대형사고'라는 공통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산업재해와 사고는 아무리 기술을 발전시켰다 하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주는 동시에 얼마나 부주의하고 무모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또한 사고에 가장 책임이 큰 자들이 사고 발생 사실 자체를 감추거나 사고의 규모를 축소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환경재난과 산업재해는 대부분 취약집단이 거주하는 공간이나 위험물질을 다루는 시설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지리적 분포와 중첩한다.&lt;br /&gt;&amp;nbsp;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nrich Beck은 근대사회가 실증과 계산에 기반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발전에 대한 빋음을 바탕으로 발전해왔지만, 정작 발전을 거듭할수록 가회 내부에서 통제 불가능한 위험이 증가한다고 지적했다. 근대사회는 '위험에 의존하는 사회risk society'이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재난은 불가항력에 의해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들이 상호작용해 '만든' 위험이 누적되어 터진 결과물이다. (81~83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환경재난과 산업재해로 발생하는 환경파괴를 범죄로 처벌하기는 정말 어렵다. 첫째, 기업들이 법의 공백을 악용해서 환경 피해를 초래하고도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범죄는 '화이트칼라 범죄white-collar crime', '권력형 범죄'로 간주할 수 있다. 둘째,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피해를 봤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개 피해자들은 피해를 특정하기 어렵거나 법정에서 명확한 인과관계를 입증하기가 어렵다. 서서히 발현하는 에코사이드 사건들은 특히 더 그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지어 '피해자가 없는victimless'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셋째, 기업과 정치가 결탁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지역사회 일자리 창출, 지역발전기금 기부, 은밀한 뒷거래 로비 등 각종 '달래기' 수단을 가진 기업과 정치가 결탁해 정의 실현 의지를 저버리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넷째, 인간(더 구체적으로는 경제적 가치) 중심으로만 재난 피해 규모를 측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정의 실현 과정에서조차 자연생태계와 동식물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부정의가 발생한다. (86~8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기후변화와 생태계 붕괴를 걱정하는 여러 정치인과 미디어, 환경단체는 '기후변화는 인간 모두의 문제'라는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모두가 위험에 취약해진다고 해도 실제로 동등한 수준으로 위험을 경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모두가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 지구를 망치는 두 개의 쳇바퀴가 굴러갈수록 지구에서 살아남을 '승자'와 그렇지 못할 '패자'의 구도가 점점 명확해진다. (91~9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누가 기후부정론을 생산하고 퍼뜨리는지 파헤치기 위해서는 기후부정론이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사회현상이 아니라 돈과 권력, 사회적 정체성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하나의 정치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의 등장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지구를 망치는 쳇바퀴들을 계속해서 돌아가게 하려는 권력집단의 작품으로 봐야 한다. 2020년 11월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의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주도했던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인 기후부정론자이다. 트럼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기후변화를 '사회주의자들의 거짓말'이나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려는 중국의 음모'로 폄훼했는데,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화석연료 규제를 반대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lt;br /&gt;&amp;nbsp; 이들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윤을 재창출하기 위한 동맹을 구축하고 더욱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기후 행동 및 광범위한 환경보호 조치를 비난한다. 이미 미국의 석유회사 엑슨모빌이 1990년대 교토의정서 체결에 반대하기 위해 기후부정론자들의 활동에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 미국 공화당의 '최대 돈줄'로 알려진 코크 인더스트리Koch Industries는 화석연료, 비료, 건축자재, 부동산 전자부품, 신재생 배터리 등 각종 산업에 손을 뻗치고 있는데, 이들은 미국의 환경정책 강화 흐름을 방해하기 위해 정치인은 물론 각종 로비스트와 돈에 양심을 판 사이비 과학자들을 후원해왔다. 기후부정론자들에 대한 기업의 후원은 자선사업이 아니라 상부상조하는 관계를 매개하는 수단이다. 최근 기후 소송에 직면해 있는 기업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기후부정론자들이 퍼뜨린 역정보를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104~106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도 강력한 위력을 떨치고 있는 '토건국가'는 개발독재의 잔재이다. 본래 부동산 개발을 통해 경제를 부양하던 일본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토건국가 개념은 한국 맥락에서는 온갖 탈법과 편법을 동원해 &quot;토건업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quot; 정치체제로 해석할 수 있다.&lt;br /&gt;&amp;nbsp;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전후 복구 및 국가건설을 이유로 댐과 도로 등 대규모 건설사업을 추진했으나, 본격적으로 토지를 국가관리체제에 편입하고, 개발에 나선 시기는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한국전력공사,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한국수자원공사, 한국도로공사 등 공기업을 설립해 국토개발 분업체제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건설산업을 시행하기 위한 각종 법과 제도가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quot;국토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건설부와 산하 공기업들은 ...... 각종 개발사업을 통해 민간 기업들과 결합하고 토건업의 확장에 대한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되면서 중앙 단위의 성장연합을 구축&quot;했고,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서 주요한 권력집단으로 군림하고 있다. (121~12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이 한창일 때 지역 돌봄체계의 부재 속에서 노인과 장애인, 빈곤층, 노숙인 등 취약계층 보호가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한 교수는 &quot;'빠른' 생태파괴, 대량의 '빠른' 육류 생산을 위한 공장식 가축사육, '빠른' 대규모 국경 이동&quot;을 코로나19 유행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하면서 &quot;바이러스는 우리 몸과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먼저 찾아간다&quot;고 경고했다. 에코사이드도 마찬가지다. 생태계 붕괴 위험은 가장 취약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도시는 이미 생태계가 죽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힘없는 종과 개체일수록 환경오염으로 인한 죽음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래서 에코사이드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사고나 재난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부당한 일'인 것이다. (173~174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EU ECD는 로마규정과 마찬가지로 법률불소급의 원칙에 따라 과거에 발생한 환경파괴를 처벌할 수 없다. 따라서 환경파괴가 인류가 직면한 중대한 위험이라고 말하면서, 환경위기를 일으킨 과거 잔학 행위에 대한 반성은 빠진 자기모순에 가깝다. 더 나아가 유럽 나라들이 도입한 에코사이드 처벌법에는 평화와 안보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벨기에의 법에서만 구분 차원에서 전시와 평시가 언급된다). 만약 에코사이드가 인류의 평화와 안보에 반하는 범죄라면, 유럽의 역사적 책임 문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의심이 든다(그리고 국가가 관리하는 환경자원을 훼손하는 행위로만 환경범죄를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다).&lt;br /&gt;&amp;nbsp; 이처럼 자기반성 없는 환경범죄 처벌은 다른 나라들의 '탄소중립'이나 '유지 가능한 발전'을 촉진한다는 미명으로 유럽이 주도하는 '녹색기술 협력'(이라고 쓰고 녹색식민주의라고 읽는) 앞에서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lt;br /&gt;&amp;nbsp; 그렇다면 유럽연합 회원국들을 포함해 지구가 이렇게 망가진 데 큰 책임이 있는 유럽이 진정으로 윤리적&amp;middot;정치적 책임을 다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유럽연합은 '역사적 생태계 붕괴에 대한 책임 지침' 같은 정책을 도입하여 식민 배상과 수탈한 토지의 반환, 기업의 환경배상기금 강제, 탈성장으로의 저노한 등 포괄적인 자기제한self-limiting 조처를 해야 한다. (214~215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교정. 초판 1쇄&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85쪽 밑에서4줄 : 2020년에는한국기업인 -&amp;gt; 2020년에는 한국기업인&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86쪽 10줄 : 책임을 책임을 지지 -&amp;gt; 책임을 지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97쪽 10줄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술자본주의 흐름에 편승해서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정부와 기업의 방종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기술을 활용할 방안을 고민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amp;gt; 하지만 기술자본주의 흐름에 편승해서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정부와 기업의 방종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기술을 활용할 방안을 고민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05쪽 밑에서5줄 : 코크 인더스트리Koch Industrie는 -&amp;gt; 코크 인더스트리Koch Industries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53쪽 5줄 : 3000칼로미터에 -&amp;gt; 3000킬로미터에&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53쪽&amp;nbsp;11줄&amp;nbsp;:&amp;nbsp;산양&amp;nbsp;인구의&amp;nbsp;-&amp;gt;&amp;nbsp;산양&amp;nbsp;숫자의&lt;/p&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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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5 May 2026 05:53:3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지금부터 조선 젠더사 (하여주, 푸른역사, 2025.)</title>
      <link>https://doggun.tistory.com/1035</link>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400.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N04Nu/dJMcai4ciHQ/W8zQ2E6THDdVBSYWLsYzd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N04Nu/dJMcai4ciHQ/W8zQ2E6THDdVBSYWLsYzd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N04Nu/dJMcai4ciHQ/W8zQ2E6THDdVBSYWLsYzd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N04Nu%2FdJMcai4ciHQ%2FW8zQ2E6THDdVBSYWLsYzd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400.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역사 속 여자, ○○하다'와 이 책은 무척 닮았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공통점은 빼더라도 여성의 욕망과 주체성을 서술의 중심에 놓았다는 점이나 사료의 겉면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 분투한 결과물이라는 점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니 이 책의 가치와 성취는 '역사 속 여자, ○○하다'와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온 시점까지 고려하면 이 책을 '역사 속 여자, ○○하다' 시리즈의 프리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렇지만 여성을 서술의 중심에 둔다거나 여성을 주체적인 존재로 서술한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별달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역사서술에서 여성의 존재가 상당 부분 누락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저 당대 사회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었기 때문이지 역사서술이 의도적으로 여성을 선택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 시리즈에 담긴 사례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역사상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며느리'와 '딸' 사이에서 애매하고 유동적인 지위를 유지하며 친가와의 긴밀한 관계를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 '효 이데올로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한들, 자신의 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기호와 취향을 드러내며 흡연을 즐겼다 한들, 이들은 돌출적 사례일 뿐 남성 위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도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완전히 달리 보게끔 하지도 않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그런 독자에게는, 역사란 단지 과거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진 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라고 역사를 이해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그 많은 이들에게 일일이 감정이입을 하다 보면, 이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거대한 존재는 되지 못했을지언정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분투하고 욕망하는 존재였음이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그들이 그저 서술의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 지금의 나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도요. 그리고 그런 태도가 지금 당장 내 주변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 또한 물론이고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유교 이념에 따르면 효는 하늘이 정한 이치이며, 부모에 대한 효를 단절하는 것은 인간이길 포기한, 인륜을 망치는 패륜이다. '시집온' 여성은 출가외인이므로, 부모를 시부모보다 낮은 위치의 존재로 배치해야 한다. 여성이 효를 다하는 주 대상은 시부모이고, 보조 대상은 부모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효부 표현'은 효녀로 이름이 났고, 천성이 효성스러웠다는 것이다.&lt;br /&gt;&amp;nbsp; 심지어 어느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친부모 봉양하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까지 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본인에 대한 효는 물론이고, 친어머니에 대한 효심도 잃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lt;br /&gt;&amp;nbsp;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났다는 기질이라는 의미의 '천성', 무릇 천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효부 담론은 이중적이며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효부 표현을 만든 것이다. 양반 남성들은 효를 옮겼다는 둥, 천성이 효성스러웠다는 둥, 이런 현실성 없는 말을 지어냈다.&lt;br /&gt;&amp;nbsp; 왜 이러한 표현이 반복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 실제로 조선의 양반 여성들은 '며느리와 딸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었던 존재라고 결론을 내려볼까 한다. 물론 앞서 알아본 출가외인 이념은 여성과 친가의 완전한 단절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가 입장에서 며느리가 친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 (91~9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효 이념은 유교에서 가장 중시하였던 실천 이념이었기에 양반 여성에게 전략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었다. 17세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비율의 양반 여성들이 친가와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친가와의 관계 유지 방법이 조금 소극적으로 바뀌었지만, 그들이 딸로서 살아가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시가와 친가 사이에서 애매하고도 유동적인 입장을 갖고 유교식 효 이념을 이용해 친가를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렇기에 양반 남성들은 출가외인의 틀에서 벗어났던 기혼 여성의 모습을 유교 이념의 최상위 가치인 효로 포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 승리가 따로 없다. 이렇듯 효 이념은 젠더에 따라 달리 이용되는 역설을 낳았다. (106~10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조선 여성들은 결코 유교 세상 안에 갇혀 있지많은 않았다. 그들은 남성들이 만든 단단한 틀에서 틈새를 찾아 경계를 넘나들며 원하는 것을 얻어내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친가 식구들과 대면&amp;middot;비대면으로 소통하면서 내 가문을 지켰다. 이러한 젠더 규범 이탈자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여성들을 막을 수 없었기에 '효' 이념을 동원해서 정신 승리하고야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들은 보란 듯이 조선의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어 남성들의 신경을 긁었다. 여성들은 지치고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혹은 기호와 취향에 따라 흡연을 즐겼다.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말이다. 지배계층으로서 유교 이념을 잘 따랐으리라 예상되는 한국 전통 여성상의 전형인 양반 여성의 얼굴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14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교정. 1판 1쇄&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20쪽 밑에서11줄 : 처벌법은 1876년 갑오개혁 때 -&amp;gt; 제한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경국대전의 재가자 자녀 과거 응시 제한을 &quot;처벌법&quot;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07쪽&amp;nbsp;4줄&amp;nbsp;:&amp;nbsp;이용되는,&amp;nbsp;역설을&amp;nbsp;-&amp;gt;&amp;nbsp;이용되는&amp;nbsp;역설을&lt;/p&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doggun.tistory.com/1035</guid>
      <comments>https://doggun.tistory.com/1035#entry1035comment</comments>
      <pubDate>Sun, 3 May 2026 07:56:4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역사 속 여자, ○○하다' 시리즈 (푸른역사, 2026.)</title>
      <link>https://doggun.tistory.com/1034</link>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399.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upuzh/dJMcacJLuE6/T0wD4dqKYCahW82QKmEa5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upuzh/dJMcacJLuE6/T0wD4dqKYCahW82QKmEa5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upuzh/dJMcacJLuE6/T0wD4dqKYCahW82QKmEa5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upuzh%2FdJMcacJLuE6%2FT0wD4dqKYCahW82QKmEa5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399.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권 : 여자, 기록을 가로채다 (장지연&amp;middot;윤민경)&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2권 : 여자, 기어이 욕망하다 (황향주&amp;middot;이민정&amp;middot;장지연)&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3권 : 여자, 조용히 살지 않기로 하다 (윤민경&amp;middot;한보람)&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4권&amp;nbsp;:&amp;nbsp;여자,&amp;nbsp;생존&amp;nbsp;전쟁을&amp;nbsp;치르다&amp;nbsp;(이아리&amp;middot;권혁은)&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시리즈는 7명의 필자가 쓴 9개의 주제, 4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성만 들어서는 거질巨帙의 세트나 벽돌책일 것 같지만 각각의 책은 100여 쪽 남짓한 문고판 정도에 본문 편집도 시원시원하기 때문에 분량이 많을 거라는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흥미로운 소재를 딱딱하지 않은 문체로 다룬 덕분에 오히려 여느 책보다 훨씬 편하게 읽히는 편입니다. 그런 덕분인지 요 며칠 제 타임라인에는 이 책에 대한 상찬이 가득합니다. 제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기획부터 편집까지의 만듦새는 물론이고 주제를 고르고 이야기로 다듬어내는 개별 필자의 안목과 글솜씨에도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글들의 응집력입니다. 무려 7명의 필자가 참여했음에도 각 글들이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고 높은 응집력을 유지하며 시리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문제의식)가 그만큼 확고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시리즈의 문제의식은 제목에서 이미 강하게 드러납니다. '여자, ○○하다'라는 능동형 표현에서 오랜 시간 피동형으로만 묘사되었던 비주체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욕망하고 결정하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여성에 주목하겠다는 마음가짐이 강하게 느껴지거든요. 그러다보니 각 주제의 제목들도 하나같이 '의절하다', '복수하다' 등 능동성과 적극성을 강조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특히 전근대에서 두드러지는데요, 대부분 남성에 의해서 쓰여진 전근대의 기록(사료)의 특성상 그 안에서 여성의 능동성을 읽어내는 작업은 표피로 드러난 의미 뿐만 아니라 행간에 숨겨진 내용들까지 읽어내는 섬세한 독해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섬세한 독해가 확고한 문제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점은 두말하면 입만 아픕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확고한 문제의식'은 이 시리즈의 방법론적 성취와도 연결됩니다. 역사란 언제나 사료를 통해서 우리 앞에 현현顯現하기에, 원칙적으로 우리는 사료(기록)를 남길 '권력'을 가진 이의 관점을 통해서만 역사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종종 '기존의 사료는 승자가 만든 것이기에, 모든 역사는 승자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회의론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역사학자가 주어진 사료(의 관점)에 갇혀서 기계적으로만 사료를 읽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주어진 사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역사학 연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거든요. (이걸 '사료비판'이라고 하지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시리즈는 기존의 사료에서 직접 드러나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를 읽어내기 위해 사료를 매우 적극적으로 독해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1권의 「여자, 기억하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글의 방법론적 성취는 이 시리즈의 백미라 할만합니다. 이 글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려 절부 조씨나 재상의 아내들 이야기처럼 『고려사』의 (아마도 가부장 남성이었을) 저자가 알기 어려운 내용들이 전언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 이야기들을 들려준 것은 분명 여성들일텐데, 이는 기록을 남길 권력이 없는 여성들이 구전의 형식으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손을 빌린 기록이라 해도 그 속에서 이들의 경험과 기록을 읽어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같은 저자의 「여자, 수절하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조선시대의 열녀 풍조와 이를 다룬 사대부 남성의 기록 속에서 당대의 여성이 처했던 조건과 그들의 선택을 읽어냅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까지 한다고 해서 열녀로 추앙받을 확률이 딱히 큰 것도 아닌데 왜 여성들은 자결을 택했을까요. 당대의 사대부 남성들은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글은 과부에게 만연했던 당대의 성폭력과, 개가 이후 사회적 지위가 점점 열악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절을 추앙하는 문화는 여성의 선택에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할 수 있었죠. 그러니 조선 후기의 열녀 현상은, 개별 여성들이 '열녀'(와 정조 등등의) 담론에 대해 '지키면서 거스르는' 전략을 취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독해는 이 두 글을 쓴 저자 장지연의 전작인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에서 이미 단초가 보였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여성이 생산했던 송사 관련 비한문 문서에, 여성이 스스로의 사회적 지위의 열악성을 어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 역시도 여성 담론을 '지키면서 거스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지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여성을 온전한 주체로 이해하지 못했던 사대부 남성 중심의 질서는, 여성이 기존의 질서를 '지키며 거스르는' 능동적 전략을 취하는 순간부터 당황하고 균열하기 시작합니다. 3권의 「여자, 복수하다」는 산송 사건에 연루된 여성들의 처분을 두고 조선의 사법체제가 얼마나 난처해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무덤을 파헤친 사건에서, 여성이 그런 일을 했을리가(혹은 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 이를 돕거나 지시했을 남자 자손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며 이를 찾아오라고 한 관찰사의 지시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집니다. (진심으로, 조선시대 배경의 단막 블랙코미디 대본으로 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방법론적 성취는 궁극적으로는 기존 지배 질서를 어떻게 균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 지침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겠다 싶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런 때문인지 이 시리즈가 말미에 이르러 개별 주체의 능동성을 넘어 투쟁과 연대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젠더 질서란 늘상 남성에게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자신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발휘하는 과정은 소수자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4권의 「여자, 회사 가다」는 노동시장에 진입한 여성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엄을 찾기 위해 분투했고 또 그에 연대했던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분투와 연대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런 정도(물론 이것도 여전히 최선의 상태는 아니지만!)의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거겠죠.&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칭찬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방법론적 성취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그간 많은 역사학자들이 '결을 거스르는 독해'라느니 '두터운 묘사'라느니 하면서 사료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찾기 위해 분투해 왔습니다. 저는 이 시리즈에 실린 모든 글이 그러한 고민들의 구체적인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학부 초년생을 대상으로 하는 '사료독해방법론' 같은 강의가 있다면 이 책이 더없이 좋은 교과서가 될 것 같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제 깜냥이 못되어 두서너 글만 언급하긴 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여기에 실린 글 하나하나에 대해서 모두 코멘트를 붙이고 싶습니다. 그런 정도로 재미있고 뜻깊은 책입니다. 제 역사책 추천 리스트의 젠더 부문이 오랜 정체를 끝내고 드디어 업데이트되겠네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조씨의 일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기만 한다면 대서특필될 것이며, 그러면 '주려'에 정표하게 될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문려'가 아니라 '주려'라는 점을 주목하자. 중국의 수많은 효자, 충신, 열녀들은 가문의 영광이다. 하지만 조씨 같은 사례는 그 집안만이 아니라 고려라는 지역의 영광까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그런 바른 풍속을 지닌 고려인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곡의 욕망이었다. (...) (1권, 「여자, 기억하다」, 51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고려사》에는 규방에서나 알 법한 일이 어떻게 알려졌나 싶은 기록들이 꽤 있다. 앞에서 말한 &quot;재상 중에 마누라를 무서워하여&quot;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충렬왕과 공주가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며 기뻐한 노인들의 이야기처럼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이 알려지고 실렸을까 궁금해지는 것들이 꽤 있다. 여기에서는 바로 이런 기록들이 절부 조씨 같은 전쟁 생존자, 특히 성비 때문에 많을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남긴 이야기일 것이라 추정한다.&lt;br /&gt;&amp;nbsp; 절부 조씨의 이야기는 이곡과 같은 당대 유명인을 매료시켰다. 1298년 시골에서 태어난 이곡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곡을 매료시킨 이런 이야기들이 이곡과 같은 이들을 경유해 《고려사》에까지 실리지 않았을까. 이동과 통신이 제한적인 시대일수록 기록자를 경유한 구전 지식의 전달 가능성을 고민해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근대 여성 대부분이 직접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고 하여, 그들의 목소리 찾기를 섣부르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lt;br /&gt;&amp;nbsp; 그녀들은 기억되기를 원했다. (...)&lt;br /&gt;&amp;nbsp; 그들은 기억하고 말했다. 그 말이 모두 휘발되지 않았다.&lt;br /&gt;&amp;nbsp; 어머니, 할머니, 이웃의 아주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기억하며 그 힘을 가늠해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의 렌즈를 통과해 만들어진 기록을 헤집고 들어가 그녀들의 기억을 찾아내 구성해 내려는 의지와 방법론이다. (1권, 「여자, 기억하다」, 73~75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사실 이건창의 관심은 가련 자체에 있지 않았다. 가련이라는 인물을 천한 기생마저 네 편 내 편 갈라야 했던 당쟁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삽화로 삼은 것이다. 〈가련전〉의 장면 장면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련전〉에서 남이은 기생과 마주 앉아 당론을 즐기는 이들로, 노론은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서 자기네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생마저 잡아 죽이려 한 이들로 그려진다.&lt;br /&gt;&amp;nbsp;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이건창의 당색은 남인도, 노론도 아닌 소론이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였으나 18세기 영조 연간 조상들이 역모로 처벌받으면서 타격을 입었다. (...) 조선 당쟁에 대한 이건창의 시각이 유달리 비판적인 것도 이러한 가정사의 영향이 없지 않다. 요컨대 〈가련전〉을 독해할 때에는 정치적으로 패배한 소론의 일원으로서 이건창이 보는 당쟁에 대한 과장과 비판, 남인&amp;middot;노론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소론에 대한 에두른 옹호가 기저에 놓여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가련은 〈가련전〉의 주연이되 조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1권, 「여자, 기억되다」, 96~9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어쩌면 안정궁주는 왕박의 처지를 간파하고 간통의 전 과정을 영악하게 주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이 자신의 부정을 고발하며 자멸의 길로 뛰어들지는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그리고 무슨 잘못을 하든 숙부인 명종과 할머니 공예태후가 자신을 비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권력의 정점에서 태어나 그 권력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축으로 살아온 그녀는 본능적으로 권력 관계를 파악했고, 이를 활용하는 영민함을 발휘했을 것이다. (2권, 「여자, 바람피다」, 68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조 귀인이 주술을 이용하는 방법은 단순하지 않았다. 저주가 사람을 해치는 범죄라는 당시의 인식을 십분 활용하여 경쟁자를 제거하기도 하고, 주술의 실제적인 효과를 믿는 심리를 이용하여 타인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기도 했다. 비록 자신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지만, 마지막에는 복수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저주를 감행했다. 여러 방식으로 주술을 이용한 조씨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녀가 조선 남성들의 기준에서 유식하고 교양 있는 여성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터부시되던 무속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조 귀인을 재앙의 결정체, 악녀로 규정하게 만들었다.&lt;br /&gt;&amp;nbsp;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는 '악녀 조 귀인'은 유학 이념에 충실한 남성과 무속신앙에 기대는 여성이라는 조선의 젠더화된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며 욕망에 사로자힌 비도덕적인 여성이 선택하는 저주라는 수단은 조선의 상층 남성들이 좀처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의 사레에서 확인되듯, 사실 그들도 현실에서는 무속신앙의 힘을 인정했다. 다만 그것을 공식적으로 표하지 않을 뿐이었다. 이들의 고아하고 절제된 이미지는 조 귀인 같은 여성들이 대신 무속과 저주를 수행하며 지켜 준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조 귀인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저주하는 여성이 악'녀'화된 사례는 흔하게 관찰된다. 그리고 이 구조화된 클리셰는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2권, 「여자, 저주하다」, 123~124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열녀가 되면 자신을 기리는 수많은 글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재탄생할 수 있다. 자손이 없어도 자신의 무덤을 지역 사람들이 때마다 찾아주며 훌륭한 위인이 된 자신을 기억해 준다. 박씨처럼 남편과 함께 묻힌 경우라면, 완벽하게 이상적인 한 쌍의 부부를 완성하며 영원의 세계에서 함께한다. 멋지지 않은가?&lt;br /&gt;&amp;nbsp;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 남성은 여성에게 이렇나 명예욕이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 (2권, 「여자, 수절하다」, 149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살 만한 집안에는 열녀가 많지 않은 데 비해, 가난한 집안에서 열녀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딱히 정려가 되는 명예를 노렸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그런 계층이 정려를 받을 확률은 1~2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하층의 여성들은 왜 자살을 하는 것인가? 사대부 남성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lt;br /&gt;&amp;nbsp; 하층 여성은 왜 자살했을까? 여기에서 생각해 볼 지점은 당대의 만연한 성폭력 문화다. (...)&lt;br /&gt;&amp;nbsp; 요즘으로 따지면 납치 강간이라고 할 법한 범죄이지만, 당대에는 과부에 대한 이 같은 성폭력이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고, 관에서도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lt;br /&gt;&amp;nbsp; 과부 보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부잣집이나 권세가에서 인물이 반반한 과부를 억지로 첩으로 삼으려 한 이야기도 흔하다. 하층 여성일수록 이러한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lt;br /&gt;&amp;nbsp; 향랑 역시 비슷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소박맞은 후 개가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도 극렬하게 개가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사대부들이 상찬하듯 정절의식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새로운 결혼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혹은 그냥 결혼이 싫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아버지도, 숙부도, 시부모도 그녀의 선택을 인정해 주지 않고 무작정 개가시키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을 자유' 따위는 꿈꿀 수도 없는 상황. 갈 곳도, 기댈 곳도 없어진 그녀의 자살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절망에서 비롯했던 것 아닐까. (2권, 「여자, 수절하다」, 165~166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하층 여성들의 열녀 현상은 성폭력에 대한 저항의 의지, 자신들의 주체성을 천명하고자 한 의지의 표출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여성의 정절을 추앙하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자, 이들은 더욱 과감히 이를 결행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이 부여한 규범에 예속되는 과정이었으나, 동시에 그러한 종속을 통해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층의 여성들까지 권력의 규범에 예속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들은 주체가 되었고, 그 권력의 규범은 모순에 빠지며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하층민까지 타고난 천성이 이미 완벽하게 도덕적이라면, 그들이 하층민으로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lt;br /&gt;&amp;nbsp; 조선 후기의 열녀 현상과 열녀 담론은 권력 체제의 균열이 일어나는 지점들을 보여 준다. 열녀 담론이 주인공들의 자결 동기를 정확히 담아 내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하며 현상과 담론을 면밀히 읽으며, 사대부 남성들의 진정한 우려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2권, 「여자, 수절하다」, 169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장씨 부인의 친정인 옥산 장씨 집안, 시가인 순흥 안씨 집안, 외가인 광주 이씨 집안 모두 당색으로는 남인이었다. 장씨 부인은 어려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친정과 시가, 외가의 남성들이 정치활동을 하다가 크고 작은 고초를 겪는 것을 지근거리에서 보아 왔다. 여성이라고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장씨 부인은 다른 명문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집안이라는 운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풍파를 함께 겪어 내야 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한다면 장씨 부인의 아들과 손자가 남인에서 노론으로 전향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신념의 수정을 넘어서는 행위였다. 그것은 조상 대대로 지켜 왔던 가치를 부정하는 일, 즉 불효와도 직결된 문제였다.&lt;br /&gt;&amp;nbsp; 게다가 당색을 바꾸면서 인근의 남인 인사들과 대립하게 된 것은 향후 지역 사회의 외면과 압박을 일상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장 후손의 혼사는 어찌할 것인가. 어떤 남인 명문가가 노론으로 변절하여 집이 부서질 뻔했다고 소문난 집안과 혼인을 약속하겠는가. 무형의 것이지만 그간 어렵사리 지키며 쌓아 왔던 가격家格 실추의 대가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3권, 「여자, 의절하다」, 39~40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당연히도 사회는 여성이 산송의 당사자가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회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마이 웨이'를 한 여성들이 나타났다. 노씨와 조씨 집안 과부며느리들처럼, 그녀들은 사회가 기대하지도 않은 행동을 기어이 해 냈다. (...)&lt;br /&gt;&amp;nbsp; (...) 세상이 그녀를 행위 주체자로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사건을 보고받은 관찰사는 곧바로 그녀가 아닌 남자 자손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관찰사의 견해로는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여자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곁에서 도왔을 가까운 남성 친척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lt;br /&gt;&amp;nbsp; (...) 여성들은 산송에서 범인으로 지목될 자격도 없었다.&lt;br /&gt;&amp;nbsp; 두 과부며느리, 그녀들 때문에 조사관과 관찰사가 난감해졌다. 조목조목 따져 주장한 끝에 자신들이 실제 범인임은 인정받았으나 여성이라서 적용할 법률도 고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lt;br /&gt;&amp;nbsp; &quot;부녀자라 어찌 처벌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quot; 사건을 재판한 관찰사가 그녀들의 처분을 어찌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법부에 질품한 이유였다. 남성의 영역에 난데없이 침범한 과부들 때문에 국가는 곤란해졌다. (3권, 「여자, 복수하다」, 108~110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진고개의 '오모니'들을 바라보는 못마땅한 시선은 이렇게 애꿎은 조선인 가정을 향하게 되었다. 조선인 가정에서 너무 하대하니까 일본인 가정까지 일하러 가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인 언론들은 '남의 집 살이 하는 부인'들을 아껴 주어야 하며, 하대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시작하였다.&lt;br /&gt;&amp;nbsp; 1930년대 중반 '어멈의 대우를 개선해 주자'는 논의는 더욱 구체적인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민족지 《조선중앙일보》의 1934년 8월 26일자 논설 한 편은 &quot;하고 많은 말 중에 '어멈'이라고 부르지 맙시다. 부르는 사람은 교양 없어 보이고,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쁩니다!&quot;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1930년대 초까지도 집안일을 도맡아 해 주는 여성 가사노동자를 '어멈'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이 하인을 하대하여 부르는 호칭이라는 지적이었다. '어멈' 호칭의 대안으로 제시된 말은 다름 아닌 '식모食母'였다. 이후 한국에서 가사노동자를 부르는 말은 점차 '식모'로 자리 잡아 갔다. 이듬해 4월에는 &quot;식모에게도 한 달에 한 번 노는 날을 주자&quot;고 식모의 휴가를 논하는 논설이 다시 한번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장식하였다.&lt;br /&gt;&amp;nbsp; 조선 여인들의 일본인 집 식모살이는 일제 식민지배의 정치적&amp;middot;경제적 결과물이었다. 조선인 식모들은 언어와 관습이 낯선 일본인 집에서 새로운 고충과 민족 차별을 맞닥뜨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근대적 위계 관계를 벗어나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급료와 노동조건을 찾아가려는 당대 여성들의 선택이기도 했다. 1930년대 가사노동자를 존중해 주는 말로서 제시된 '식모'라는 호칭은 반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한국 사회의 편견에 의해 멸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식모가 파출부로, 다시 가사도우미로 바뀌어 가는 동안에도 가사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노동조건과 지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4권, 「여자, 식모 살다」, 55~5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농가의 경제적 몰락이 가속화하면서 식모살이를 위해 상경하는 여성들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 경제학자의 추계에 따르면 1925~1930년에만 대략 20만 명이 이농했으며, 1930~1935년 사이에는 대략 30만 명, 1935~1940년 간에는 약 110만 명이 농촌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중 남성 다수는 해외로 유출되었고 여성들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로 와 식모 수요를 뒷받침하였던 것이다.&lt;br /&gt;&amp;nbsp; 1930년 《조선국세조사朝鮮國勢調査》는 상세한 직업 통계를 전국 단위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자료이다. 이에 따르면 '가사 사용인'으로 분류된 사람은 전국에 12만 877명이 있었다. 이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976만 5,514명 중 농경 종사자가 75퍼센트를 넘는 상황에서 비농업직 단일 직업으로는 첫손에 꼽힐 만한 규모였다. 10년 뒤인 1940년 국세조사에서 가사 사용인 수는 17만 2,813명으로, 1930년 대비 약 43퍼센트 증가하였다. 이러한 통계는 앞서 언급한 이농 현상이 실제로 도시 내 식모 노동력 공급으로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lt;br /&gt;&amp;nbsp; 요컨대 당대 언론이 요란하게 떠들었던 '식모 전성기'는 조선 농가의 대규모 경제적 몰락과 극심해져 가는 실업난이라는 어두운 이면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4권, 「여자, 식모 살다」, 66~6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그녀가 대자보를 붙일 때 그것을 찢으려는 이들을 막아선 학생들, 대학본부와 학과의 외면 속에서도 먼저 진상조사단을 꾸렸던 학내 단체들, 끝없는 법정투쟁을 함께하며 곁을 지켰던 활동가들, 멀리서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 온 시민들. 그들이 있었기에 단 한 장의 대자보가 시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첫걸음은 어려웠지만, 여성들은 곧 달리기 시작했다. 그후로 30년, 아직 달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 (4권, 「여자, 회사 가다」, 138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교정.&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3권 32쪽 밑에서9줄 : 안동었다는 -&amp;gt; 안동이었다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3권&amp;nbsp;78쪽&amp;nbsp;밑에서4줄&amp;nbsp;:&amp;nbsp;상태+를&amp;nbsp;-&amp;gt;&amp;nbsp;상태를&lt;/p&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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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doggun.tistory.com/1034#entry1034comment</comments>
      <pubDate>Sat, 2 May 2026 18:37:5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쇳돌 (이라영, 동녘, 2026.)</title>
      <link>https://doggun.tistory.com/1033</link>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354.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3TpQ8/dJMcaflQU2M/LLcYW6Rded9e2qqbWdAIX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3TpQ8/dJMcaflQU2M/LLcYW6Rded9e2qqbWdAIX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3TpQ8/dJMcaflQU2M/LLcYW6Rded9e2qqbWdAIX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3TpQ8%2FdJMcaflQU2M%2FLLcYW6Rded9e2qqbWdAIX0%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354.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철광석을 의미하는 '쇳돌'은 대한철광 양양광업소, 즉 양양철광의 폐광 이후 수도권으로 이주한 광산노동자들이 만든 모임의 이름입니다. 양양철광의 노조위원장이었던 저자의 아버지 역시 이 모임의 구성원이죠. 저자의 아버지는 젊었을 적에는 양양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끝내 광산노동자로 양양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양양철광이 폐광되면서 반강제로 양양을 떠나게 되었고, 수도권으로 이주하여 주택관리사로 살아갑니다. '쇳돌'의 나머지 구성원들 역시 삶의 궤적이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쇳돌'이라는 이름에는 양양철광에서의 노동과 폐광, 그리고 이주의 경험이 농밀하게 압축되어 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라영의 『쇳돌』은 저자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써내려 간 노동이주사입니다. 크게는 식민지기의 할머니부터 학업과 생업을 위해 양양을 떠나 외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저자에 이르는 3대의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핵심은 아버지와 광산노동에 있죠.&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공업화가 시작된 1930년대 이래로 오랜 시간 광업은 한국 산업의 중심이었습니다. 석탄을 비롯한 지하자원은 공업화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니까요. 그런 덕분에 산업화 시대에 광부는 꽤나 각광받는 직업이었습니다. 1971년 북한의 땅굴을 발견한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이 포상으로 요구한 직업이 광부였다는 사실이나 으레 광산촌에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곤 했다는 이야기들은 광산노동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석탄의 수요가 줄면서 광업도 함께 위축되었고, 광산노동자의 삶도 마찬가지로 후퇴했습니다. 정부가 1989년부터 시행한 '석탄산업합리화'는 대부분의 광산노동자에게는 그저 실직失職의 다른 표현에 불과했습니다. '합리화' 정책은 국가 경제에게는 '합리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실직한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이 속한 지역공동체에게는 별달리 '합리적'이지 않았던 겁니다. 『쇳돌』은 그렇게 클리오의 수레바퀴 밑으로 사라져가는 산업과 지역공동체를 뒤로 한 채 노동과 생활의 현장을 반강제적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민徙民의 행렬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아낌없이 표현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제가 생각하는 『쇳돌』의 미덕은 이 지점에서부터 발휘됩니다. 『쇳돌』은 자신과 가족의 삶을 학문적 언어로 반추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그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식인'의 자기기술지autoethnography가 지금 여전히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 연민 내지는 희화화로 빠지고 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미명 하에, 안전거리 바깥에서 '지금 그곳'을&amp;nbsp;&amp;nbsp;타자화하는 거죠. 하지만 『쇳돌』은 퇴락한 광산촌일지언정 여전히 그곳에서 자기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이들을 추상적이고 계급적인 편견에 가두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 책이 후반부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지금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것은 아마도 그런 때문일 겁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책이 말미에서 지적하듯, 이 책의 이야기는 광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노동과 일자리들이 '사양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중입니다. 산업구조 전환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 속에 있는 개개의 삶까지 쉽게 외면당해서는 안 되겠지요. 기실 외면당하는 노동은 지금 당장 우리 곁에도 많습니다. 출근 전에 건물을 말끔하게 치워야 하는 (그래서 근무시간에는 잘 보이지 않는) 청소노동, 매일 새벽 싱싱한 식재료를 현관문 앞에 대령하는 배달노동, 세련된 말투와 옷차림으로 고객을 응대하되 고객 화장실에는 출입할 수 없는 백화점 판매노동 등, 이들 노동은 물리적으로 사라지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인식에서부터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에서 슬며시 사라진 순간, 그 안에 존재하는 개별 노동자의 삶과 인격은 훨씬 더 쉽게 '(폐기 가능한) 자원'이 되겠지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2026년 현재 우리는 AI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급격한 산업구조의 전환을 논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고 급격한 산업구조의 전환을 목도하는 중이지요. 그러한 변화들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야지 않을까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세상이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직업도 사라지고 새로 생겨난다. 어떤 직종은 어차피 '없어질 직업'이기에 사라지는 수순으로 가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러나 직업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사라지진 않는다. 직업은 사라져도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로 꾸준히 이동한다. 그들이 다 죽을 때까지 사회가 그들의 이동 경로에 무심할 뿐 사람들 대부분은 사는 동안 꾸준히 일을 바꿔가며 생존한다. 무언가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견디는' 삶은 이름 없이 소멸하고, 이 삶의 경력은 무수한 노동으로 채워진다. (45~46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방영된 이후 '하숙의 추억'이 흘러 넘쳤다. 물론 하나같이 하숙생의 추억이다. 그중 얄궂은 시각도 있다.&lt;br /&gt;&amp;nbsp; &quot;주인 가족은 절대 하숙생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주인네 밥상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겸상을 하지 않는지 짐작할 수 있다.&quot;&lt;br /&gt;&amp;nbsp; 주인 가족이 하숙생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 이유를 '주인네 밥상'에서 찾는 시각은 내게 새로웠다. 하숙생들이 먹는 음식과 달리 주인이 먹는 밥상이 더 좋다는 암시다. 나와는 완전히 반대의 기억이다. 맛있는 반찬은 하숙생들이 다 골라 먹고 나는 남은 것들을 먹었다. 게다가 주인 가족도 식사 시간만큼은 가족끼리 앉아서 보내고 싶다는 것, 그들도 사생활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발언이다. 하숙집은 영업장이면서 동시에 가정이다. 그러나 하숙생은 자신들이 돈을 지불했기에 영업장으로 여길 뿐 그곳이 누군가의 가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또한 하숙노동에 대한 몰인식에 기반한 짐작이다. 하숙집 가족들은 하숙생들이 식사하는 동안 한가하게 함께 식사하기 어렵다. 그들이 밥을 먹기 위해 누군가는 주방에서 계속 분주하게 일해야 한다.&lt;br /&gt;&amp;nbsp; 하숙집은 사생활을 포기하고 돈을 버는 구조다. 밥이라도 가족끼리 먹으려고 애쓰지만 이조차 쉽지 않다. 그러려면 하숙생들 오기 전에 먹거나 하숙생들 식사가 끝난 후에 먹어야 한다. 대체로 하숙생들 식사가 끝난 후에 우리가 식사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우리 가족이 먹을 음식이 떨어지기도 했다. 혈기왕성한 스무 살 언저리 남자들이 예고 없이 친구들을 데려오기라도 하면 우리가 먹을 밥까지 싹싹 먹고 갔다. 나는 '남은 찌끄러기'를 먹는다고 어느 날 어머니에게 불평했다가 혼이 났다. 그러나 그보다 가장 필요했던 것은 가족끼리 앉아서 편히 먹을 수 있는 시간의 확보였다. 밥시간이 되면 나는하숙생들을 부르고 밥상으로 음식을 날랐다. 그들이 앉아서 먹기 시작하면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가 끝나고도 자리를 뜨지 않고 티브이를 보며 이상아가 더 예쁘다, 이미연이 더 예쁘다를 논하는 학생들은 우리의 저녁 식사 시간을 늦췄다. 24시간 '남의 식구'와 어울려 사는 가정에서는 그 작은 밥상조차 편안히 누리기 어렵다. 밥에 묶인 삶이니 외식은 아예 불가능하다. (195~196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R양 언니를 유난히 부모님이 챙겨줬던 이유는 차차 알게 되었다. R은 노조 민주화 과정에서 함께했던 동지였다. 소장이나 다른 간부들이 있는 사무실에도 경리로 일하는 여성 직원들이 있었다. (...) 그러나 여성들은 결혼 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연락이 끊겼는지 이 자료집에서도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히 나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기억하는 여성들이 있고, 고모를 통해 이야기를 들은 사무직 여성들도 많다. 아버지와 다른 노동자들의 기억에도 사무직 여성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나는 1988년 비대위가 노조를 점거하고 노조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활약한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예상치 못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lt;br /&gt;&amp;nbsp; 기존의 노조 위원장, 지부장, 총무부장 등이 1988년에 어용 노조로 불신임을 받고 모두 자리를 떠나는 동안 노조에서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인물은 R이었다. 어릴 때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나는 무의식 중에 이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넘겼다. 어용 노조 불신임-비대위-민주 노조라는 흐름에서 '사무실 여직원'이 어떤 주체적 역할을 했으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이다. 투쟁과 무관한 사람이라 경리직은 바뀌지 않은 것이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해왔다. 나의 무지와 선입견이었다. R은 노조 사무실에서 일하며 어용 노조를 민주 노조로 바꾸는 데 동참한 동지였다. 아버지와 이인수는 공통적으로 &quot;R양은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한 사람&quot;이라며 &quot;소리 없이 지지&quot;했다고 말한다. R의 '목격'은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회계 업무를 하면서 노조 위원장의 부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숫자로 아는 사람이었다. R은 비대위 사람들과 조심스럽고도 가깝게 지내면서 다른 부서의 여성 경리 직원들이 협력해서 위원장의 부정한 정황이 담긴 회계 자료를 비대위에 제공했다. 그것이 노조 위원장의 비리 정황을 회사에 구체적으로 밝히는 결정적 증거 자료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lt;br /&gt;&amp;nbsp; 노조 위원장이 물러난 후에 R은 비대위에 함께 일했다. &quot;비대위 때 우리는 사무 업무를 잘 모르잖아. R이 업무를 분담해서 알려줬어. R이 좋은 일 많이 했어. 노동조합법에 나오는대로, 임시대의원 뽑고, 직선제로 선거 개편하면서 그걸 법으로 명시하고, 이런 일을 도와줬지.&quot;&lt;br /&gt;&amp;nbsp; 광산을 그만두고 결혼 후 R은 보험 설계사로 일했다. 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의 편견도 발견했다. 대학생도 아니며, 공장노동자도 아니며, 노동 현장에 있지만 사무직인 소수의 젊은 여성들이 1980년대 민주화 흐름 속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간과했다. 정작 내가 생각한 그 '아저씨들'은 &quot;R이 좋은 일 많이 했지&quot;, &quot;걔가 우리 편이었어&quot;, &quot;걔가 입이 무거워. 말은 안 하지만 다 보고 있었지&quot;, &quot;말은 안 하는데 판단을 하는 애였어&quot;라며 동료의식을 가졌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이 있지만 말 없이, 조용하게 참여했던 여성들이 직장을 떠난 후에도 자신이 했던 일을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말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1988년에 노조에 복귀한 뒤 조용히 중요한 활동을 했던 몇몇 경리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찾아갔으나 일부는 이미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건너 건너서 '어디로 시집 갔대'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222~224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1989년부터 시행한 '석탄산업합리화'란 공식적으로 말하면 '비경제탄광을 폐광하고 경제성 있는 탄광을 건전 육성'하겠다는 취지의 정책이다. '비경제탄광'과 '경제성 있는 탄광'이라는 구별로 폐광이 결정될 때 이 '경제'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광산 회사의 '경제'이지 광업소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경제'는 고려되지 않았다. 항상 경제를 말할 때 국가와 기업의 경제를 말할 뿐 노동자 개개인의 경제사정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노동자만이 아니라 광산 주변의 상권도 큰 타격을 받는다. 정부에서는 석탄산업합리화를 시행하지만 광산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탄광촌에는 대안이 마련되지 않아 갑작스러운 시행이었다. 석탄산업합리화로 1980년대 후반부터 석탄광은 대폭 축소되었다. 1988년 전국 347개에 이르던 석탄광업소는 석탄산업합리화 시행 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6년에 11개로 급감했다. 6만 8,500명이던 탄광노동자는 2000년에 들어서는 8,200명으로 줄어들었다. 강원도 탄광의 경우 1989년부터 1996년 사이에 171개 탄광 중 166개가 폐광했다. 무려 97퍼센트의 탄광이 문을 닫았다. 우리나라 최대 석탄 산지인 강원도의 1988년 탄광노동자의 수는 4만 3,831명이었는데, 1996년에는 9,28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한 산업이 정부 정책에 의해 극단적으로 감소했지만 그 수많은 노동자에 대한 '합리화'는 없었다. 석탄산업합리화 여파로 탄광촌인 강원도의 태백시, 삼척시, 정선군, 영월군 등은 인구가 급감했고, 광산 마을에는 폐교와 폐가가 늘어났다. 공동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경제성, 합리화, 건전성 등의 언어로 포장된 정책은 국가 경제를 위해서는 경제적이며 합리적이고 건전한 방향일지 모르나 개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붕괴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합리화'는 노동자들의 언어가 아니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라는 이름은 어떠한 문제도 지시하지 않는다. 직장을 잃은 광부에게, 그의 가족들에게, 이들이 거주하던 마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합리화'는 어떠한 부정적 의미도 드러내지 않는다. (251~25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quot;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났지.&quot; 폐광 전에 떠난 사람들을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인수는 내게 &quot;경비하던 삼촌&quot;은 잘 지내냐고 물으며 &quot;그때 떠나길 잘했지. 외삼촌이 머리가 좋아. 광업소 있었으면 망가지고 말아&quot;라고도 했다. 나는 뒤늦게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폐광 때가지 광업소를 떠나지 않았을까. 동지도 친구도 처남도 다 떠나고, 젊은 시절 그토록 떠나려고 했던 광산인데 왜 정작 아버지는 폐광이 현실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와중에 끝내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때 아버지는 왜 떠나지 않았냐고 30년이 지나 물었을 때 아버지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광산을 벗어나려고 했던 아버지는 어느새 광산이 아버지를 뱉어내기 전에 스스로 먼저 떠나기는 어려웠다고만 했다. 아버지에게 광산은 이제 떠나야 하는 직장이 아니라 &quot;광산이 있어서 우리가 학교도 다니고 먹고살 수 있었던&quot; 장소가 되었다. 노조 위원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비장한 이유가 아니었다.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면서 아버지는 이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일을 선뜻 시작하기 어려워했다. &quot;할 줄 아는 게 없어서.&quot; 직업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했던 아버지는 20년 넘게 광산/노조에 몰두하며 살았고, 그사이 다른 직업을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260~261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그사이 아버지의 동료들도 서울과 수도권에 자리를 잡았다. 부천, 인천, 서울, 수원 등으로 이주해온 아버지의 동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의 이름은 '쇳돌'. 철광석으로 모인 이들이다. 아버지는 주택관리사로 자리 잡은 뒤에는 기술이 있는 옛 광산 동료들을 아파트 기술직으로 추천했다. 아버지에게 세차를 소개했던 도준과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던 박열도 아파트에 기술자로 취직했다. 박열과 도준은 같은 아파트에서 일했다. 같은 직장에서 교대근무를 하는 도준과 박열은 동시에 쇳돌 모임에 참석할 수는 없었다. 2교대 근무를 하는 아파트 업무 특성상 그들은 같은 직장에서 일하지만 같은 시간에 근무하진 못했다. 두 사람은 10대 때부터 광산촌에서 함께 일했다. 중학교 졸업 후 광산 극장에서 함께 일하던 그들은 성인이 되어 광산에 취직했고 폐광을 앞두고 수도권으로 이주해 아파트 기술자로 일했다. 평생을 동지로 살았다. 광산에서 3교대 근무를 하며 땅속에 일하던 노동자들은 이제 도시로 이주해 아파트 지하에서 2교대 근무를 했다. (28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의제가 되는 시점부터 보수화되는 페미니스트가 있다. 한때는 스스로 여성주의자라고 하던 여성 중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오히려 '요즘 젊은 여성들'을 향해 저들은 진정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quot;우리 때와는 다르다&quot;라는 익숙한 말이었다. 진보라는 이름이 현실 정치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면 진보와 거리 두는 사람이 있다. 이념이 현실과 약간의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는 이념을 외치지만 정작 이념이 현실에 적용되려고 하면 한 발짝 물러나 &quot;아직은 시기상조&quot;라 주장하는 얼굴을 본다. 그렇게 한때의 급진적 인물들은 보수화되고, &quot;내가 해봐서 아는데&quot;라는 대사를 읊는다. 저들은 이제 권력을 가졌고 진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투쟁이 세대를 거듭하며 뒤에 오는 세대의 방식을 앞선 세대가 불편해하곤 한다. 아버지는 서서히 진보 정치를 비판했다. 더 좋은 방향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적 입장에서 비판한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심상정이 언젠가 꼭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 2017년 대선 당시 유세장에서 &quot;사람을 완전히 끌어들여!&quot;라며 심상정에게 환호했다. 연단에서 내려와 지나가는 심상정을 가까이에서 봤다며 &quot;대통령 꼭 하세요!&quot;라고 말하는 걸 미처 못 했다고 아쉬워했다.&lt;br /&gt;&amp;nbsp; 진보 정당에 소신 투표를 하던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내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어떤 '미움'에 사로잡혔다. '위선자들'이 싫다며 점점 아버지는 그들을 혼낼 수 있는 반대 세력을 차라리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지향하는 가치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증오심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사람이 얼마나 급격하게 다른 방향을 향할 수 있는지 아버지의 모습에서 보았다. 그러다 비상계엄이라는(윤석열의 12&amp;middot;3 비상계엄이라는) 충격적인 사태를 마주하고 다시 아버지는 혼란에 빠졌다. &quot;그럴 줄 몰랐지.&quot; 내게는 많은 물음표가 생겼고, 어머니는 &quot;네 아빠가 이상해졌어&quot;라고 말한다. (307~308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나는 노동계층의 문화가 더 성차별적이라고 보는 것을 경계한다. 마치 백인의 시각에서 흑인의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유럽인의 시각에서 아시아의 가부장제를 비판할 때 드러나는 묘한 우월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유리천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련된 방식으로 감춰져 있을 뿐 여성은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여전히 문화적 금기의 대상이다. 게다가 '방석집 논문 심사'라는 기가 막힌 일화나 이건희 성매매 의혹 동영상, 김학의 별장 성접대 사건은 어떠한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성을 은밀하고 체계적으로 착취한다. '요정 정치', '기생 회합' 등 남성 중심 정치의 한복판에서 '형님 정치'가 만개하는 동안 여성은 한국사회 어디에서든 여전히 정치적 비주류이다. 오늘날 '평범한' 회사원도 룸살롱에서 접대하고 영업한다. 여성에 대한 성적 우월감으로 남성에게 자부심을 주는 구조는 계층을 막론하고 이 사회에 뿌리가 깊다. (32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아버지가 광부였던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작가로 성공한 후 제 고향에 잠시 돌아가는데, 그의 시선에는 여전히 고향에 대한 혐오 감정과 낭만화가 동시에 드러난다. 정확히 말하면 로렌스는 고향에 '방문'했을 뿐 결코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에리봉이나 에르노도 물리적으로 다시 고향에 정착하는 되돌아가기를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되돌아가기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행위였다. 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성공한 후 자신의 계급적 출신에 대해 되돌아본다. 제 감정의 근원을 파헤치려고 하지 않은 로렌스와는 달리, 에르노와 에리봉이 남긴 계급적 수치심을 파헤친 자기기술지autoethnography는 중요한 시선이다. 많은 찬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의 책을 망설임 없이 옹호하진 못한다. 여전히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수많은 노동계층에게 이러한 자기기술지가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 양가적 감정이 찾아온다. 공감하는 면이 있으나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모두 적어도 현재는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때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말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느낀다. 수치심의 고백조차 지식인이 된 사람의 안전한 고백이다. (44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그는 태백에서 미술 기획을 하면서 광산과 이 지역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다루긴 하지만 아직 조심스럽다. 미술 공간을 운영한 지 1년 됐을 때였다. 그 미술 공간은 광산 화약고 부근에 있는데, 가끔 술 먹은 남자가 주변을 배회했다. 그 남자와 조금씩 알게 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quot;하루는 그분이 울면서 올라와요. 동료가 죽은 거지. 저 사람 괜찮을까. 진폐 보상만이 아니라 정신적이 보상도 필요&quot;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산과 노동자들을 주제로 문화 기획을 해보려 생각했지만 알면 알수록 자신이 아직은 담아내기가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다.&lt;br /&gt;&amp;nbsp; (...)&lt;br /&gt;&amp;nbsp; 그동안 김신애는 태백에서 다양한 문화 기획을 하면서 광산이라는 추상적인 세계를 많이 다뤘는데 더 구체적으로는 다루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알면 알수록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보였다. 그 다양한 삶을 자칫 잘못 다뤘다가는 오히려 단순한 이미지의 반복만 만들어내지 않을까 우려되어 망설이게 되었다.&lt;br /&gt;&amp;nbsp; (...) 어떤 대상을 멀리서 보는 사람들일수록 그 대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고 싶어한다. 어떤 집단을 일반화할 수 있는 면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집단 안의 다름을 계속 탈락시키면 같은 이미지만 지루하게 반복 재생된다. 안전모를 쓰고 있는 순간도 있지만 안전모를 벗고 일상을 살아가는 순간도 있다. 그 삶 안에 다양한 개인, 그 개인의 관계, 취미와 같은 일상이 있다. 나는 계급을 강조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에게서 때로 누구보다 계급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고를 발견할 때가 있다. 구체적 개인을 모를수록 계급과 취향에 대한 도식적 상상에 갇힌다. (...) (454~456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노동자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 이주하면서 서로 동료들을 소개해주다 보니 같은 직장에 예전 동료들이 함께 모이곤 한다. 아버지의 양양 동료들이 수도권으로 이주한 뒤 같은 아파트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는 것처럼 태백과 정선 노동자들도 서로 동료들의 일자리를 소개하며 안산으로 많이 이주했다. 그즈음 수도권 곳곳에 지역 향우회가 늘어났다. 재안산강원도미회는 1983년에 만들어졌으며 부천강원도민회는 1991년에 만들어졌다. (476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 산업이 전환되는 과정에서 노동자 개개인의 일자리 전환은 보장되지 않는다. 단지 '없어질 직업'이기에 감수하면 될 일일까. 회사가 문을 닫을 때마다 노동자들이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문제다. 광산촌이 폐광촌이 된다는 건 수익성이 떨어지는 장소가 되었다는 뜻이다. 자본의 기준에서 이윤이 나지 않는 동네가 되면 자본은 미련없이 그 장소를 벌니다.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는 그렇게 붕괴된다. 모범산업전사 표창, 대통령 표창장, 대통령 하사품 등으로 추켜세우는 듯 했지만 사람은 끝내 소모품 취급을 받았다. 경제는 성장하고 국가의 위치는 바뀌건만 노동자들은 그저 대체될 뿐이다. (...)&lt;br /&gt;&amp;nbsp; (...) 기술 발달과 산업의 변화에 따라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있다면 사라지는 일자리도 있기 마련이다. 언제나 직업의 종류는 꾸준히 생겨나고 사라져왔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업을 대체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다. 어떤 직업이 사라질 것인가.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 것인가. 인공지능이 예술을 창작하는 게 가능한가. 사라질 직업에 대한 불안, 자신의 일이 기술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대체되어왔다. 노동자들은 진동벨이 되고, 키오스크가 되고, 계산기가 되고, 서빙 로봇이 되었다. 어떤 직군은 마땅히 기술로 대체되고 그 직종이 사라지는 것을 기술과 사회의 발전이자 역사적 진보로 받아들인다. 머리가 없다고 여겨지는 손과 발이 대체될 때는 발전이라 여긴다. 머리가 없는 존재이기에 이때 사라지는 이들의 목소리는 쉽게 소거당한다. 직업이 사라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직업 안의 사람을 돌보지 않는 게 문제다. 사양산업 속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그렇게 외면해왔다.&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처럼 '없어질 직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일을 잃어버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안한 담론을 만들지 않는다. 여성의 노동이, 이주민의 노동이, 수많은 저소득층의 노동이 그렇게 쓰고 버려지고, 쓰고 버려진다. 어떤 이들은 죽어도 충격적이지 않고, 처음부터 그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 여길 뿐이다. 경제를 위해서 인간의 삶과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석탄은 꺼내도 사람은 꺼내지 않는다'는 말은 여러 위험한 직종에 적용할 수 있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은 경제 발전을 위해 폐기 가능한 삶이 된다. 그들의 일은 대체 가능해질수록 사회가 좋아진다는 방증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대체될 위험, 폐기될 위험과 늘 만난다. 사람도 곧 자원으로 불린다. 인적 자원, 끝없이 지구의 자원을 캐듯이 국가는 노동력을 캐내어 필요한 만큼 쓴다. 자원이 되어버린 인간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다만 소모될 뿐이다. '안전보다 생산', '제철보국', '증산보국'. 자원이었던 사람이 몸담은 세계가 사양산업이 되면 사람은 폐기처분해야 할 귀찮은 골칫덩어리, 산업의 짐, 곧 산업폐기물이 된다. 광산노동자는 대표적인 산업폐기물이 되었다. 돌이 돈이 되는 동안 사람은 돌처럼 내팽개쳐졌다. (517~519쪽.)&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산업구조의 전환 과정에서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소외되고 지역의 상공인, 시민 등의 삶에 크고 작은 피해가 발생한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오늘날 탄소중립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누군가의 삶은 크게 흔들린다. 이러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 방향이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다. 개인이 그 피해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나누고 고민해야 한다. 가능한 모두에게 정의로운 전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lt;br /&gt;&amp;nbsp; 이얼 프레스는 사회에 필요한 필수노동이지만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취급하여 보이지 않게 숨기는 노동을 '더티 워크'라 정의했다. 그가 언급한 더티 워크를 수행하는 이들은 교도관, 전쟁에서 드론 조종사, 도살장 노동자, 석유 시추선 노동자이다. 사회 곳곳에 이런 노동이 숨어 있다. 내 손에 더러움을 묻히기 싫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고 싶지 않으나 반드시 필요한 노동일 경우 이 노동의 세계를 모르려고 한다. 빌딩마다 투명하게 존재하는 청소노동자, 도로 위를 질주하는 배달노동자도 이에 해당한다. 오늘날 그들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지만 그들의 노동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윤리적 혼란 없이 육식을 즐기는 '선량한' 사람이 되려면 축산노동자에 대해 몰라야 한다. 그처럼 현대사회에서 배터리 없는 일상은 거의 불가능함에도 광산노동자의 삶에는 무관심하다. 그 무관심 속에서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사라진다기보다 인식 속에서 사라진다. 광산도 광산노동자도 '아이티IT 선진국 한국'에서는 '사라졌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우리의 일상을 위한 광물을 캐다가 사라져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간다. 오히려 광물을 캐는 노동자가 보이는 것에 놀라워한다. 유튜브에서 광산노동을 소개하는 영상 밑에는 이런 댓글이 달려 있다. &quot;아직도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군요.&quot; (520~521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서러움을 넘어선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가 분노를 표출하기보다 서러운 존재로 재현될 때 기득권은 더 안전하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서러움을 표현할 때 가부장제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한맺힌 '우리 어머니'나 서러운 '딸' 혹은 '며느리' 등은 오히려 가부장제와 공존한다. 희생이 곧 역할이기에 서럽다고 하면서도 자신처럼 희생하지 않는 사람에게 분개한다. 물론 1980년대에는 이 서러움을 기반으로 노동자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서러움이 서러움에서 멈추지 않고 이 서러움을 공격의 무기로 전환시키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감정을 기반으로 연대할 때 투쟁이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서러움에 저항적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감정은 한계도 명확하다. '덕분에'와 같은 말로 대응해버리고 구체적인 문제는 회피할 수 있다. 또한 '나의 서러움'을 바탕으로 분노하지만 '타인의 서러움'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 확장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막연한 서러움보다는 정확한 고통의 실체와 부당함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lt;br /&gt;&amp;nbsp; 사회의 많은 고통들이 연결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방치된 고통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개인의 고통은 정치적이고 제도적으로 발생하지만 무책임한 정치는 이 사회적 고통의 결과를 사적으로 감당하도록 방치한다. 희생하는 노동자라는 감정이 방치되었을 때 나타나는 양상은 꽤 복잡하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밀려났다는 생각과 동시에 밀려나지 않으려는 마음, 과거에 옳았던 나와 현재에 부정당하는 나 사이를 오가며 '요즘 세상이 잘못 가고 있다'로 향한다. (563~564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교정. 초판 1쇄&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327쪽 밑에서5줄 : 롬살롱에서 -&amp;gt; 룸살롱에서&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345쪽 밑에서3줄 : 등료들과의 -&amp;gt; 동료들과의&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442쪽 2줄 : 벤스처럼 -&amp;gt; 밴스처럼&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445쪽 14줄 : 굉장이 -&amp;gt; 굉장히&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519쪽 2줄 : ' 석탄을 꺼내도 사람을 꺼내지 않는다'는 -&amp;gt; '석탄은 꺼내도 사람은 꺼내지 않는다'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519쪽 9줄 : '안전보다 생산'. -&amp;gt; '안전보다 생산',&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612쪽&amp;nbsp;1줄&amp;nbsp;:&amp;nbsp;한에서는&amp;nbsp;-&amp;gt;&amp;nbsp;한해서는&lt;/p&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doggun.tistory.com/1033</guid>
      <comments>https://doggun.tistory.com/1033#entry1033comment</comments>
      <pubDate>Mon, 6 Apr 2026 19:53: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조지 오웰 뒤에서 (애나 펀더, 생각의힘, 2025.)</title>
      <link>https://doggun.tistory.com/1032</link>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284.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NO2DA/dJMcaibOhcK/Upka4fatOute7HHJfiJlkK/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NO2DA/dJMcaibOhcK/Upka4fatOute7HHJfiJlkK/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NO2DA/dJMcaibOhcK/Upka4fatOute7HHJfiJlkK/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NO2DA%2FdJMcaibOhcK%2FUpka4fatOute7HHJfiJlkK%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284.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amp;nbsp; 어느 유명한 소설가가 사회적으로는 시대의 스승처럼 대우받았지만 정작 가족에게는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야기라든지 또다른 유명 소설가는 제 손으로 밥상 차릴 줄도 몰라서 평생 아내의 가사노동에 의존하며 살았다는 이야기,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국만 그렇지도 않은지 독립적이고 목가적인 삶을 찬미했던 미국의 어떤 작가도 실제로는 대부분의 가사노동을 어머니가 다 해줬다고 하지요. 이처럼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 알고 보니 실제 행동은 전혀 일치하지 않더라는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덤덤함을 가지고 봐도 조지 오웰과 그의 아내 아일린 오쇼네시의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그저 위선적이라고 이야기하고 넘어가기에는 조지 오웰의 행적이 너무나도 기이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amp;nbsp; 호주의 작가 애나 펀더는 본디 조지 오웰의 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 곳곳에서 드러나는, 기묘할 정도로 강력한 여성혐오에 의아함을 가지고 이를 조지 오웰의 창작활동을 추적합니다. 추적의 결과, 애나 펀더는 조지 오웰의 창작활동과 가정생활 전반이, 인간의 자유와 양심을 위해 싸웠다는 조지 오웰의 평판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애나 펀더가 『조지 오웰 뒤에서』를 통해 폭로하는 조지 오웰의 모습은 그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완전히 재고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는 결혼 후에 아내인 아일린을 그저 밥하고 청소하는 사람 정도로만 취급했습니다. 아일린은 생계를 책임지고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았지만 조지 오웰은 메모 곳곳에서 아일린에 대한 여성혐오적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노골적으로 혼외관계를 추구하며 아일린의 인격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지인에 대해 강제적인 성관계 시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사생활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창작활동 이면에도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1984』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아일린이 그보다 한참 전에 쓴 시에서 가져왔음이 분명하고, 『동물농장』이 만들어질 때는 기획자와 편집자의 역할을 했으며, 『카탈로니아 찬가』는 취재와 창작 과정 대부분에서 아일린의 조력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아일린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지 오웰의 문학적 명성 대부분이 타인에 대한 폭력과 착취 위에 쌓아올려진 것임을 알아가는 독자의 마음은 그저 참담할 뿐입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amp;nbsp; 그런 참담함 뒤에 드는 궁금증은, 그러면 이렇게 폭력적인 관계가 어떻게 가능했고 또 유지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책에 따르면, 아일린은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여성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제약만 아니었다면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될지도 모를 정도로 촉망받았던 재원이었습니다. 타자 에이전시에 취업한 후에는 고용주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는 행동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조지 오웰과의 폭력적이고 종속적인 결혼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혹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amp;nbsp; 이 책도 그 원인을 속시원히 말하지는 못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제삼자가 충분히 재구성할 수도, 당사자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도 없으니까요. 다만 이 책은 대체로 가부장제라는 제도가 우리의 생활과 심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아일린은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과 영민함을 가졌음에도 결국에는 공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아일린은 여러 차례 사회적 좌절을 맛보면서 시나브로 가부장제에 순치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자신의 이름을 빛내기보다는 남편의 이름을 빛내는 것으로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찾게 되도록 길들여진 탓이 아닐까 싶지요.&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amp;nbsp; 이 책을 읽은 저는 이제 더이상 조지 오웰과 그의 작품들을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작품'과 그 창작자의 개인적 삶은 별개로 판단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즉 어떤 텍스트와 그것의 창작자를 결코 분리해서 해석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는 역사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조지 오웰의 작품 역시 앞으로 그저 텍스트 그 자체로만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오웰의 생각들은 읽기 고통스럽다. 여자들은 그를 혐오하고, 그는 자신을 혐오한다. 그에게는 피해망상이 있는데, 거짓된 '자신들의 모습'을 세상에 '기만적으로 내세우는' 추잡한 여자들의 정치적&amp;middot;성적 음모에 속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오웰은 여자들을, 다시 말해 아내들을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는지, 혹은 무엇을 '요구하는지'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청소는 충분하지 않고 섹스는 너무 많이 요구한다고 말이다. 그럼 아내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내게 첫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이렇다. 아마 청소는 너무 많이 해야 했고, 섹스는 충분치 않았거나 충분히 근사하지 않았을 것이다.&lt;br /&gt;&amp;nbsp; 이렇게 해서 나는 작품에서 삶으로, 그 남자에게서 그의 아내에게로 옮겨 가게 되었다. (35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아일린은 옥스퍼드에 계속 머무르며 교수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quot;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장난으로&quot; 1등급 학위를 받지 못했다. 리디아의 말에 따르면 &quot;그 실패의 경험은 아일린의 허를 찔렀고, 그 애의 동력을 앗아갔으며, 어떤 노력도 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다.&quot; 아일린이 스스로 좀 더 나은 것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느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 부당하고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 아일린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 같았지만, 아일린은 한 번도 그 일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기록된 바로는 그렇다. 어쩌면 당시에는 여학생에게는 1등급 학위를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아일린이 졸업한 1927년에는 그 과정을 듣던 어떤 여학생에게도 1등급은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에게 학위 수여 자체가 허용된 것도 겨우 다섯 해 전의 일이었다. 만약 내가 쓰고 있는게 소설이었다면, 나는 그런 종류의 성차별, 마치 공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있는 성차별을 행하는 인물을 만들어 넣었을 것이다. 그런 성차별은 아일린의 허벅지에 올려진 한쪽 손(털이 부숭부숭하든 창백하든, 반지를 끼고 있든 그렇지 않든), 점수를 대가로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키스, 혹은 더 나쁜 무언가의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그런 상황은 아일린이 &quot;나중에 심리학 수업에서 그랬듯&quot;, 그저 한 남자의 말을 정정함으로써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는지도 모른다.&lt;br /&gt;&amp;nbsp; 어쨌거나 이 시점 이후로 글쓰기를 삶의 중심에 두려는 아일린의 노력은 좌절되고 만다. 아일린은 문학을 주제로 학술적인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쓰고 있던 시들을 끝까지 쓰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아일린의 문학적 재능은 다른 사람들의 문학적 재능의 실현을 돕는 일로 승화될 것이다.&lt;br /&gt;&amp;nbsp; 1920년대에 여성의 진로는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고, 보통 결혼과 함께 끝났다. 급료가 있는 형태의 가사노동을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일린은 졸업한 뒤 다양한 일을 시도했다. (...) 아일린은 또 타자 에이전시에 들어가 &quot;신경질적으로 잔인한 데다 직원이란 직원은 모두 울리는 데 몰두해 있는 어느 만만찮은 여성 사업가&quot;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여성이 &quot;자기 직원들을 모욕하고, 그들의 노력을 너무도 가혹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비난하고, 그들을 해고해 버리겠다고 끊임없이 위협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quot; 걸 지켜보았다. 몇 달 뒤, 아일린은 전 직원을 결집시켜 그 폭군 같은 고용주에 맞서는 &quot;억압된 자들의 저항&quot;을 성공적으로 끌어냈고, &quot;의기양양하게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quot;. (74~76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지금, 친구는 내게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게 왜 좋았는지 말해준다. &quot;그런 재능 있는 사람이랑 한패가 되는 일엔 어딘가 멋진 구석이 있어 보였거든. 후광 효과였지.&quot; 그 사람의 궤도 안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에는 따스한 빛을 쬐는 듯한 기쁨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에 따라붙는 건 당신 자신의 재능을, 그리고 그것을 길러내기 위해 확보해야 하는 자기중심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lt;br /&gt;&amp;nbsp; 나는 궁금하다. 자신의 야망이 부서지고 불탄 자리에 오웰을 대신 들여놓으면서 아일린도 이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일단 오웰이 거기 들어서자 아일린은 그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오웰의 작업은 아일린의 목표가 되었다. 오웰과 그의 작업은 아일린과 그의 작업이 있어야 했던 자리를 차지했다. 아일린은 오웰의 후류 속에 있었다. (113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아일린은 다시 원고를 본다. &quot;하지만 여기가 아닌데. 아, 여기 있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내일 이 땅에 돌아온다면,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열차 칸 안에서 어린 소녀들을 강간하는 것이라고 밝혀진다면, 우리는 그가 또 다른 《리어왕》을 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에게 그런 짓을 계속하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머릿속에 두 가지 사실을, 즉 달리가 훌륭한 화가라는 사실과 역겨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품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무효화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든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quot;&lt;br /&gt;&amp;nbsp; (...)&lt;br /&gt;&amp;nbsp; &quot;내 말은,&quot; 아일린은 등 뒤의 베개들을 다시 정리한다. &quot;여기 이 글 속에 두 가지 생각이 뒤섞여 있다는 거예요. 하나는 열차 칸 안에서 어린 소녀들을 강간하는 일이―아니면 당신이 그 천재한테 시키는 일이 뭐든, 그게―어째선지 달리한테 활력을 줘서 걸작을 쓰게 만든다는 생각이에요.&quot; 아일린은 오웰을 올려다보며 콧등에 걸친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린다. &quot;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 이후에 그 이후에 그 걸작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생각이고요. 그 걸작을 만든 사람이 당신이 표현한 것처럼 이렇게 '역겨운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요. 아니면 그냥,&quot; 아일린은 오웰을 바라본다. &quot;보통의 결함 있는 인간일 수도 있겠죠. 우리는 그런 대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해되죠?&quot;&lt;br /&gt;&amp;nbsp; (...)&lt;br /&gt;&amp;nbsp; &quot;난 그냥,&quot; 오웰이 말한다. &quot;셰익스피어가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고 해도 《리어왕》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quot;&lt;br /&gt;&amp;nbsp; &quot;하지만 여기 적혀 있는 건 그런 얘기가 아닌데요.&quot; 아일린은 원고를 들어 올린다. &quot;당신은 어떤 천재가 열차 칸 안에서 어린 소녀들을 강간해야만 한다고 해도, 그게 우리가 그 사람의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암시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뒤에 우리는 그 대가를 외면한 채 작품을 즐길 수 있다고요.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 거죠.&quot; 아일린은 오웰과 시선을 맞추고 어깨를 으쓱한다. &quot;내 생각에는, 어린 소녀들만 빼고 말이에요.&quot; (326~32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몇 번, 아일린은 오웰의 행동 때문에 심하게 괴로워한다. 그리고 적어도 한 번은 그에게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장 심오한 자아를 해치는 일에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길들여지는 방식의 정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리를 이용하는 체제에 동조하도록 길들여진다. 그러고는 결국 우리가 동의했다고,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 원한 일이라고 말하게 된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분명 그것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간주되고, 우리가 고통받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로 남을 것이다. (390쪽.)&lt;/blockquote&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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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5 Apr 2026 13:04: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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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 (신병주, 한스미디어, 202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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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figure class=&quot;imageblock alignCenter&quot; data-ke-mobileStyle=&quot;widthOrigin&quot; data-filename=&quot;IMG_4216.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 data-url=&quot;https://blog.kakaocdn.net/dn/FJXff/dJMcaaECtB0/ui9rFOkzKkTvoJcCsOmQ40/img.jpg&quot; data-phocus=&quot;https://blog.kakaocdn.net/dn/FJXff/dJMcaaECtB0/ui9rFOkzKkTvoJcCsOmQ40/img.jpg&quot;&gt;&lt;img src=&quot;https://blog.kakaocdn.net/dn/FJXff/dJMcaaECtB0/ui9rFOkzKkTvoJcCsOmQ40/img.jpg&quot; srcset=&quot;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amp;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FJXff%2FdJMcaaECtB0%2Fui9rFOkzKkTvoJcCsOmQ40%2Fimg.jpg&quot; onerror=&quot;this.onerror=null; this.src='//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this.srcset='//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quot; loading=&quot;lazy&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33&quot; data-filename=&quot;IMG_4216.JPG&quot; data-origin-width=&quot;3024&quot; data-origin-height=&quot;4032&quot;/&gt;&lt;/span&gt;&lt;/figure&gt;
&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좋은 역사책 한 권만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대체로 역사책에 이제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시는 분들이 이런 부탁을 하시죠. 그럴 때마다 저는 한결같이 '한 권만 읽을 생각은 하시지 말고, 여러 권 읽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다'고 말씀드립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세계를 책 한 권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책 한 권만 읽었을 때의 위험성도 적지 않으니까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하지만 최근 들어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질문을 하시는 분이 그걸 몰라서 저한테 그렇게 묻지는 않으셨을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그 질문은, '어떤 책으로 시작하는게 좋을까요'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책은 다른 분야에 비해 진입장벽이 비교적 높기 때문에, 어떤 책으로 시작을 해야 보다 쉽고 편하게 역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신 걸테죠.&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그렇다면 이번에 읽은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한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체들(사람이건 세력이건)을 '(서로 대립하는) 라이벌'의 관계로 배치하여 각각의 주체가 가진 특성을 간명하게 드러냅니다. 김유신과 계백, 김춘추와 연개소문, 왕건과 견훤과 궁예, 고려와 거란 등의 대립을 통해서는 당대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엇갈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이방원과 정도전, 김상헌과 최명길, 서인과 남인 등의 라이벌 관계를 통해서는 당대의 정치적 경합과 타협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설명할 때 그와 반대되는 것을 견주었을 때 설명이 더 선명해지는 것처럼, 역사 속의 인물과 세력을 설명할 때도 라이벌 구도는 유용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물론 라이벌 구도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마냥 장점은 아닙니다. 역사를 설명할 때 라이벌 구도에만 갇힐 경우 자칫 이분법이나 흑백논리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책이 아주 새로운 이야기나 관점보다는 다소 오래된 통설通說에 주로 기대고 있다는 점 역시 유의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책을 고른 이유가, 역사의 거대한 바다로 나가기 위한 첫 걸음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점이 큰 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책 너머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가 자각하기만 한다면 말이죠.&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이제 막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독자에게, 역사라는 거대한 바다를 여행할 수 있는 첫 번째 배를 찾고 있는 분에게,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이 책 다음에 다른 배로 꼭 옮겨 타야 한다는 점을 꼭 유념하시구요.&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amp;nbsp;원효의 불교 대중화 노력으로,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까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입에 올리며 부처의 존재를 널리 알게 되었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나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사후에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원효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고 스스로 원효(元曉)라 일컬은 것은,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연 스님도 《삼국유사》에서 &quot;원효란 말도 또한 우리말이니 그 당시의 사람은 모두 우리말로써 새벽이라 했다&quot;고 평하고 있다. (5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성을 보였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했다. 사람들은 '광인(狂人)' 또는 '화태(禍胎, 화의 근원)'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관직에 나가서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관대(冠帶)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빈객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 언제나 완벽한 자세로 임했던 조광조의 모습은 훗날 엄격한 원칙주의자의 길을 걸어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진다.&lt;br /&gt;&amp;nbsp; 《어우야담》에는 조광조가 &quot;거울을 볼 때마다 매양 '이 얼굴이 어찌 남자의 길상(吉相)이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quot;고 한 기록이 있다. 자신의 외모가 너무 수려해서 오히려 걱정했다는 뜻이다. (187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amp;nbsp; 당시 격렬했던 모습은 《인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lt;br /&gt;&amp;nbsp;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하였는데, 예조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하여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lt;br /&gt;&amp;nbsp; &quot;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신하가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amp;hellip;)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죽을죄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quot; (242쪽.)&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교정. 1판 1쇄&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75쪽 : 문단 사이 띄우기 수정&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37쪽 : 첫 번째 문단 사이 띄우기 수정&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203쪽 밑에서3줄 : 세자궁 의문의 -&amp;gt; 세자궁에 의문의&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265쪽&amp;nbsp;밑에서4줄&amp;nbsp;:&amp;nbsp;밀집&amp;nbsp;-&amp;gt;&amp;nbsp;밀짚&lt;/p&gt;</description>
      <category>잡冊나부랭이</category>
      <author>Dog君</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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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Mar 2026 11:12:2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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