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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창비, 2014.)

Dog君 2014. 11. 23. 20:46



1.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은, 이야기를 하다가 뭔가 문득 울컥할 때, 애써 침 같은 걸 꿀꺽 삼키면서, 그렇게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내리누르면서, 목구멍에서 힘들게 끄집어내는 말 같다. 우리가, 아니 최소한 내가, 살다가 문득 울컥할 때,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도 그런 식 같다. 그게 사람이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같다.


나기네 어머니의 이름은 순자.

순자의 순은 어째선지 열흘,이라는 의미의 순旬.

그러면 순자씨의 도시락은 어떻게 된 걸까.

그즈음에 비로소 나는 그걸 생각하게 되었다.

순자씨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아 번 돈으로 나기와 둘이서 살아가고 있었다. 일찍 집을 나선 뒤 종일 바깥에서 지내다가 해가 지고도 한참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피곤했을 것이다. 한겨울에 사과궤짝을 들다가 뇌출혈로 죽고 만 남편이 남긴 빚도 상당해 경제적인 면으로도 간단하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런데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신발장 위에 나나와 내 몫의 도시락까지, 납작하게 얹혀 있었다. 나나와 내가 급식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육년이나.

정말 맛있었지.

특별하게 화려한 반찬도 없었는데.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순자씨는 나를 한번 쓱 바라보더니 연륜,이라고 대답했다. 나이를 말하는 거냐고 묻자 단순하게 그런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끼를 먹여본 손맛이지.

그런 연륜,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p. 43.)


그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라고 결심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p. 104.)


모세씨는 한숨을 쉬면서, 등받이 쪽으로 푹 꺼지듯 기대앉더니 부부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두사람은 부부잖아요, 부부 사이에 그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 말을 끝으로 이제 이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탁자 쪽으로 몸을 당기고 왕성하고도 완강하게, 샐러드를 먹었습니다. 나나는 접시에 놓인 올리브를 포크로 굴리며 내려다보았습니다. 모세씨에게 부부는 그런 것, 하고 생각합니다. 모세씨에게 가족은 그런 것, 남이 아닌 것. 그러면 나나도 모세씨의 가족이 되면 남이 아니게 되는 걸까. 모세씨네 이상한 텔레비전 시청. 그것은 시청이라고 해야 할지 대화라고 해야 할지. 나나도 언젠가는 텔레비전을 향해 말하게 되는 걸까. 나란히 앉아서도 텔레비전을 향해 묻고 텔레비전을 향해 대답하는, 어쨌든 남이 아닌 사람들. 보통의 가족이란 그런 걸까. 나나와 소라는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걸 모르는 것뿐일까. 하지만...... (p. 148.)


내 어머니의 소망은 할머니가 되는 것.

가족을 잃고 쓸쓸하게 자란 그녀는 손주가 많은 시끌벅적한 집을 소망하지만 나는 그 소망을 이뤄줄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내가 만나는 여자도 없느냐고 타박하듯 물어왔는데 요즘은 별로 그러지 않는다. 며느리는 바라지도 않을 테니 어딘가에서 아기라도 만들어 데려오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벌써 단념했는지도 모르고 아직 단념하지 않았으므로 일부러 말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후자로, 일말의 소망 정도는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 정도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다. (p. 170.)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p.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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