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도입과 전개과정 (김수행,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본문

잡冊나부랭이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도입과 전개과정 (김수행,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Dog君 2016. 10. 1. 15:24


1. ‘뉴라이트’가 다른 우익들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전향’한 사람이 많다는 거 아닐까 싶다. 80년대 중반 정도까지만 해도 진보진영의 결속력은 꽤 단단했던 것 같은데, 87년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90년에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이탈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재오, 김문수, 하태경 등등 요즘도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락내리락 하시는 분들 아이냐.


2-1. 학계에서는 유독 경제사 분야에서 그런 케이스가 많은 것 같다. 이영훈, 안병직 등이 대표 케이스 되겠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실제로 숫자를 따져보면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2-2. 내가 전공으로 삼은 경제사가 그렇단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당장 나만 해도 내가 쓰는 글과 내가 하는 생각이, 성장지상주의에 갇혀서 정작 중요한 것을 내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의식하려고 애써야 한다.


3. 그런 점에서 얼마 전에 다 읽은 ‘이대근 트릴로지’는 꽤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80년대말까지만 해도 완연한 종속론자였던 저자가, 조금씩 자리를 옮겨 지금은 정반대의 위치에 서는 과정을 3권의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안병직이나 이대근 같은 학자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극적으로 자기 입장을 바꿀 수 있었을까. 세간에서야 ‘변절’이니 ‘전향’이니 하는 단어로 편하게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지만, 경제사를 공부하는 내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런 도덕적 비난들이 썩 흡족하지 않다. 개인의 자질이나 인성 때문에 그랬다고만 설명하고 나면, 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전향’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더 관심있는 것은 그들의 변화에 담긴 내적인 논리나 일관성이고, 그걸 알아야 나도 그것을 미리 경계할 수 있다고 믿는다. (10여년 정도 더 지나고 나면 그들 역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리라.)


4.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골라든 책이 이 책…인데 그 궁금증에 대한 시원한 답변은 이 책에서도 찾기 어렵다;;; 제목에서처럼 한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흐름에 대해 정리하고는 있는데, 분량이 너무 적은 탓에 아주 흡족한 설명은 아닌 것 같다. 최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연구동향을 설명하기 위한 데이터로 서울대 경제학과의 박사학위논문 목록을 사용한 부분 정도 오면… 아, 서울대부심 너무하시다 싶기까지.


5-1. 핵심은 성장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직 이영훈과 안병직의 글에서 성장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그보다는 성장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아 그것의 성취 여부에 역사적 판단이 딸려오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5-2. 내가 지금 하는 공부는 거기서 또 얼마나 다르겠나 싶어서 뜨끔 한다. 50년대 이후 한국 경제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불필요한 인건비를 조정하고, 쓸데없는 인력을 정리하고, 원가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노동자들의 노동효율을 끌어올리고 하는 이야기들 뿐이다. 그런 자료들을 정리해서, 다시 나는 그런 논의들은 당대의 산업계가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고, 또 그런 방향으로 경제가 개발되었다…는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고 쓰고 보니 이게 좀 전까지 내가 손가락질했던 이들의 이야기와 얼마나 다른가 싶다.


5-3. 뉴라이트 변절자 나쁜 놈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손가락질 하기 전에, 정작 내가 쓰는 글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더 경계하고 조심하기로.


(전략)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안병직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위에서 보듯이, 그는 계속 자본주의의 성장, 한국자본주의의 선진화에 관심을 가졌지, 노동자계급의 해방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제성장이야말로 한국경제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0~70년대에는 노동운동이 활성화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노동운동·노동해방에 관한 평가나 태도가 마르크스주의자인가 아닌가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따라서 정부가 주도하는 파시즘적 경제계획이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이해되기도 했고, 남한의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민주주의자들이나 북한경제의 발달을 찬양하는 사람들, 또는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도 모두 마르크스주의자로 잘못 인식되고 있었다. (pp 16~17.)


  셋째로, 한국자본주의는 선진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있는 ‘중진자본주의’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사실상 신고전학파의 개발경제학이 계속 주장해 온 것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적 한국경제사 연구자라고 알려진 안병직에 의해 제기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보진영에서 내세운 우리 경제의 왜곡성과 종속성, 그리고 파국적인 전망이 현실의 경제발전에 의해 ‘부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우리 경제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으며,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소득분배가 어느 정도 개선되고, 중산층적 생활방식이 확산되며, 국제적으로 한국 자본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무역흑자로 외채문제가 해소되는 등의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자,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종전의 주장들은 설 땅을 잃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중진자본주의론은 진보진영의 고식적인 논의의 반사적 산물이었는데, 이것을 공공연히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변화와 진보진영의 분화를 실감나게 하는 것이었다. (p. 3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