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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여행하다 1 -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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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여행하다 1 -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소

Dog君 2009. 8. 8. 01:02
1. 진주MBC사옥에서 진주역 방면으로 가는 길인 새벼리길을 지나다보면 왼쪽으로 갈색의 팻말이 하나 서있다. 전국 최초의 백정해방운동이었던 형평衡平운동을 이끌었던 백촌栢村 강상호姜相鎬 선생의 묘소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주인없는 무덤 마냥 방치되어 있었던데다가 정비 이후에도 정기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내가 찾았을 때는 잡초가 무성했다.

[Dog君, 2009.]


2. 강상호는 1887년 경남 진주에서 강재순의 4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재순은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내기도 한 천석꾼으로 부유한 가정환경 덕에 강상호는 일찍부터 신학문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진주는 전통적으로 경상우도 학맥의 중심이었고 당시에는 축산업과 면포생산의 중심지로 신문물의 유입이 활발했다. 1910년에 진주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학생만을 위한 반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런 조건들 속에서 강상호가 차별없는 교육의 중요성에 눈떴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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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는 일찍부터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국채보상운동, 학교설립운동, 3.1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920년 즈음에는 이미 진주 일대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그는 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17년에 그는 자신의 마을에 살던 몇몇 농민들이 너무 가난하여 세금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오랫동안 대납해주었는데 이 사실은 무려 8년동안 계속되고 나서야 신문지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4. 3.1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강상호는 장지필, 이학찬 등과 뜻을 같이하여 1923년에 드디어 형평사를 조직하고 백정들의 권익을 증진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형평운동은 초기부터 일본 수평운동의 급진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지만 강상호는 결코 운동을 비합법운동의 수준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강상호는 형평운동을 급진적인 계급투쟁으로 끌고가기보다는 합법운동의 틀 내에서 최대한을 획득하는 쪽으로 이끈다.

5. 하지만 장지필을 비롯한 형평운동 급진파와의 의견충돌은 계속되었고 강상호는 결국 형평사에서 손을 떼고 신간회 진주지회에서 잠시 활동한 후 공식적인 사회활동에서 모두 손을 뗀다. 1930년대 들어 형평사는 친일단체로 변질되고 말았는데 이때 다시 강상호는 억지로 부위원장으로 추대된다. 하지만 강상호는 곧 낙향해버리고 만다. 사회운동에 환멸을 느꼈는지 가산을 모두 써버렸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사회활동을 접은 후 강상호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저항감을 느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창씨개명도 거부하는 등 식민권력과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일생을 살았다. 합법운동의 틀 속에서 형평운동의 활로를 모색했지만 그것이 식민권력에의 완전한 투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6. 강상호의 이름은 한국전쟁기 북한군의 점령기간에 다시 등장한다. 북한군에 의해 또다시 억지로 진주시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화한 성품의 그는 결코 북한군의 의도에 부합하는 냉정한 계급투쟁의 전위가 될 수 없었다. 강상호는 다시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강상호의 이름이 가지는 선전효과를 잘 알고 있는 북한군은 그 이후에도 한동안 그가 진주시 인민위원장인 것처럼 선전했다. 그 때문에 북한군 퇴각 후 그는 부역자로 고초를 겪는다. 이 즈음에 이르게 되면 가산은 거의 탕진되어 강상호는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 형편이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식을 사립학교에 보낼만한 형편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노년의 강상호는 그렇게 사회적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지고 가난에 시달리던 끝에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다.

[Dog君, 2009.]


7. 친일과 반일이라는 거대한 이분법만으로 일제시대를 바라본다면 강상호는 과연 어디에 위치될까. 식민권력에 얼마만큼이나 무모하게 저항했느냐만으로 당대의 지식인을 평가한다면 사실 강상호와 같은 인물은 배치될 곳이 마땅치 않다.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강상호가 '독립유공자'라는 유일한 국가적 판단잣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강상호는 식민권력과의 협상과 교섭을 통해 형성된(혹은 '식민권력이 허용한') '공간'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했다. 식민지의 회색지대에 존재했던 형평운동과 강상호의 사회적 위치는 해방 이후 수십년동안 형평운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친일과 반일이라는 관점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복수의 역사’ 속에 배치되는, 형평운동과 같은 식민지 시대의 사회운동에 대한 새로운 연구관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Dog君, 2009.]


8-1. 강상호 묘소 바로 옆에는 그의 부인의 묘(그냥 전주이씨라고만 써있어서 이름을 알 수가 없다)도 함께 있다. 자고로 남편이 사회운동에 열심이면 부인이 불만이 많다던데 어쩐 일로 이 부부는 나란히 묻혀있다. 어찌보면 좋아보이기는 하는데 나름 이런저런 비석도 서있는 강상호의 묘에 비해 부인의 묘는 나무로 된 작은 팻말만 하나 박혀있어서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미루어보건대 생전의 강상호였다면 두 사람의 묘를 똑같이 치장하라고 한소리 하지 않았을까. ^^

[Dog君, 2009.]


8-2. 묘 앞에는 강상호의 모친(이 역시도 그냥 전주이씨라고만 써있다;;;)의 시덕비施德碑가 서있다. 다들 이것에 대해서는 좀체 주목을 안 했는지 관련자료도 찾을 길이 없어서 어쩐 연유로 시덕비까지 세워놨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좀 찾아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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