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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 中 '밤은 말한다' 2012년 10월 11일. 본문

잡事나부랭이

'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 中 '밤은 말한다' 2012년 10월 11일.

Dog君 2012. 10. 14. 14:39

  "글이 잘 써지는 날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13월이라거나 제8요일 같은 것이다. 글이란 1년 내내 잘 안 써지게 돼있다. 커튼을 내리고 있으면 게으르거나 무기력해지기 쉽고 그렇다고 활짝 열어놓으면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햇빛이 환하고 맑은 날엔 산만해지기 마련이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기분이 가라앉아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 기분 좋은 소식이 오는 것도 반길 일이 못 된다. 기분 좋은 생각이란 한번 머리 속에 들어오면 좀처럼 다른 생각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반대로 안 좋은 소식이 왔다면 그건 말하나마나이다. 기분 나쁜 날 글이 잘 써질 정도로 인생에 의외의 일이 자주 있는건 아니니까. 더구나 의외라는건 주로 나쁜 방향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모든 상황이 이것처럼 고통스럽게 돌아가는데도 작가에게는 책상 앞을 벗어나는 현명한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다. 대가라고 불리는 이들마저 글은 엉덩이로 쓴다거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는 말로 작가의 도로를 격려해왔다."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中)


  네, 그러니까 언제나 술술 쉽게 잘 풀리는 일, 그런 것은 없습니다. 글은 좀처럼 안 써지기 마련이고 공부도 제대로 안 되기 마련이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데도 마감이라는 것은 늘 쫓기기 마련이고 아무리 쥐어짜내려고 해도 아이디어라는 것은 거의 항상 떠오르지 않기 마련이구요. 말하자면 일이 잘 안 되는 것은 그 날 날씨라거나 혹은 당일 기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이라는게 원래부터 잘 안 되도록 되어있다는거죠. 하고 싶은 작업의 능률을 더하기 위해서 분위기를 잡고 컨디션을 맞추려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욱더 초조해지고 일은 더더욱 안 풀리기 마련입니다.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프로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아무리 예술가라고 해도 영감을 기다리지 않고는 작업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추어라는겁니다. 프로들은 그저 영감이 생기든 안 생기든 꾸준하고도 묵묵히 일을 해나간다는거죠. 걸작이 단 한번 섬광처럼 번뜩이는 영감의 결과로 만들어진다는 믿음은 그저 창작과정에 대한 몰이해나 기껏해야 천재에 대한 과장 가득한 신화에 불과하기 십상입니다. 훌륭한 예술가는 천재라기보다는 황소에 더 가깝습니다.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레프』라는 작품의 마지막 챕터에서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거대한 종을 만들 줄 안다고 거짓말을 했던 소년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권력자의 명에 따라서 계속 종을 만들어나가던 소년은 마침내 타종식날 공포와 긴장으로 벌벌 떱니다. 하지만 시범적으로 종을 쳐보자 신비롭게도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그림 그리기를 그만둔 채 묵언수행을 해 오던 화가 안드레이 류블레프는 그 모든 장면을 치켜본 끝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나는 가서 그림을 그릴테니 너는 계속 종을 만들어라."


  어쩌면 우리가 해야하는건 그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묵묵히 어제도 했던 일을 계속 하는건지도 모릅니다. 설령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그 일의 끝에선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서 지치거나 두려워지기 쉬워도 말입니다. 적어도 삶에는 아마추어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 中 '밤은 말한다' 2012년 10월 11일 방송분.


한창 멘탈이 안 좋은 이 때 힘이 되어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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