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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창작과비평사, 200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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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창작과비평사, 2001.)

Dog君 2013. 2. 23. 14:00


1. 저기 써있는 말마따나 나는 참말로 '삶에서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 모습이 있기 위해서는 그간 내 삶의 아주 작은 것들 모두가 영향을 끼쳐야 하기 때문이다.


2. 그런 점에서 역사학이라는 학문은 좀 냉정한 면이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 중에서 중요한(혹은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살아남아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뭐가 중요하고 뭐가 안 중요한 건지 가끔 헷갈리는 나로서는 이런 자세가 지나치게 냉정하지 않나... 마 그리 생각한다.


3. 그렇기 때문에 소설책을 읽으면서도 작은 일 하나하나에 모두 애정을 잃지 않는 역사학도가 되어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


4. 그나저나 은희경은 어떻게 이렇게 남자들의 세계를 잘 묘사한거지. 소설가라서 그런걸까 아줌마라서 그런걸까.


  어쨌든 무다리 소녀의 도움으로 소희네 펜팔부와 만날 약속은 뜻밖에도 쉽게 정해졌다. 바로 두 주일 뒤였다. 그동안 조국과 승주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써먹을 영어 인사말 몇개라도 외우자고 써클룸에 모여앉아서는 기껏해야 여자애들은 언제 겨드랑이 털이 생기는가, 하루에 한반에서 몇명이나 생리를 하고 있을까 등등의 화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pp. 25~26.)


  두환네 패거리 중 하나가 우연히 「소림사 18동인」이라는 중국 무협영화를 본 모양이었다. 다른 무협영화와 달리 그 영화에서는 기합을 질러내고 자빠지고 구르고 날고 하는 낭자한 싸움장면이 눈길을 끄는 게 아니었다. 대신 온몸에 황금가루를 칠한 협객, 이른바 동인(銅人) 열여덟 명이 동상처럼 정렬된 채로 바람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적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비장한 음악을 배경으로 긴 허리띠만을 일제히 바람에 나부끼며 무표정하게 서 있다가 조금의 흥분도 없이 일사불란한 무술을 펼치는 18인의 구리인간. 두환네는 그것을 모델로 조직을 재정비하리고 했다. 일단 숫자로 적을 제압해놓으면 심리전에서 유리하니 11전 9패의 전적을 가진 그들로서는 그처럼 좋은 지략이 없을 듯했다. 그 말을 곧이들을 얼빠진 고등학생 열여덟 명을 모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두환은 하는 일 없이 마음만이라도 몹시 분주했다. (p. 27.)


  날이 완전히 저물어 운동장은 어둑어둑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미 학교를 빠져나간 뒤였다. 나는 혼자 운동장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내 몸이 어둠속에 묻혀드는 것을 느끼며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허탈하고 아니꼽고 막막하고 배고프고 싸늘하고 짜증나고 나른하고 - 내가 느끼는 그 복합적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쭈그리고 앉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올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 검은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 입에서는 술냄새가 풍겼다. (p. 86.)


  밥을 먹을 때도 조국과 승주는 미영에게 인상을 남기기 위해 꽤나 부산했다. 승주야 당연하고 조국이 설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사내들이란 꼭 무슨 가능성이나 대가를 계산하고 여자들에게 촉수를 뻗는 것이 아니다. 잠깐 동안 택시 합승, 그보다 더 짧게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경우까지도 여자와 함께 있게 되면 어떻게 해볼 마음도 아니면서 사내로서 존재증명의 본능이 가동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p. 96.)


  결혼식 전날 밤 나는 방에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고, 상대가 운총이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가슴이 답답했다. 문을 박차고 나가서 땀이 나도록 참바람 속을 한바탕 뛰었으면 싶긷 하고 그대로 새벽기차를 타고 아무데로나 떠나버리고 싶기도 했다. 소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골목의 외등 아래서 짙음 음영이 드러워져 있던 소희의 얼굴, 팔꿈치가 닿자 짧게 울리던 자전거 경적, 그리고 뒤돌아보며 지어 보이던 불안하고도 아름답던 웃음. 나는 잔에 남아 있던 술을 단숨에 비웠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나는 것일까,라고 중얼거리고 나니 눈가가 약간 젖어들었다. 마지막 전화라도 해줘야 하는 여자가 있나 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건 없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그러고 있다가 어머니가 불 안 끄냐고 소리치는 바람에 내일 장가갈 일도 있고 해서 그만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p. 103.)


  우리는 시위대에 섞여서 걸었다. 적당한 술집을 찾아 퇴계로나 명동 쪽으로 가고 있었으므로 시위대와 행로가 비슷했다. 조국과 두환은 취했다. 어깨동무를 한 그들은 시위대가 구호를 외칠 때마다 자기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뒷부분을 따라서 복창했다. 목소리가 크고 몸짓이 가열차기는 시위대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으며 또한 분노와 탄식에서도 결코 모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한 약국 앞에서는 주인이 시위대엑 박카스를 나눠주고 있었다. 승주가 뛰어가 네 병을 받아왔다. 조국과 두환은 광고에 나오는 남성미 넘치는 모델 못지않게 호쾌하게 마개를 따고는 그것을 들이켰다. 떡장수 아주머니 하나는 팔던 떡과 김밥을 시위대의 손에 쥐여주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처지인만큼 우리는 기필코 떡도 하나씩 얻어먹었다. 그러고는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하자 엉거주춤 건물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p. 153.)


  지식인들은 언제나 자기의 시대를 위기라고 말해왔고 애국자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시대를 국난이라고 했다. 그들처럼 간뇌도지를 부르짖으며 간과 뇌수로 바닥을 칠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우리는 그런 인생이 아니다. 그래서 잘못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들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운전을 하다가 산속에서 기름이 떨어져간다면 잘난 놈들은 남은 연료로 연비를 계산하거나 지도를 펴놓고 주행거리를 줄이 궁리를 하거나 혹은 그 자리에서 도움을 기다리며 기름을 비축해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주유소를 찾아 돌아다닐 뿐이다. 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차 안에 누워 있다가 굶어죽거나 얼어죽으면 그만이다. 오리털 파카에 오리털이 몇올밖에 안 들어 있다고 불평하면서, 가늘고 길게 살고자 했던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해 분해하면서. (p.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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