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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想나부랭이

아버지

Dog君 2013. 6. 20. 20:33

1. 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휘파람을 불며 골목 끝을 돌아오는 퇴근길 모습이다. 아버지에게 내가 뛰어 갔는지, 그런 나를 아버지가 나를 안아주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고, 그냥 휘파람을 불며 골목 끝을 돌아오던 그 모습, 그 짧은 장면만 기억 난다.


2-1.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딱히 사춘기도 아니었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으며, 지금 와서 암만 생각해봐도 재미있는 추억 하나 없는 중학교 생활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어쩐 일로 아버지가 집 소파에 앉아 전화를 받고 계셨다. 전화통을 붙들고 하는 말이라고는 그저 "예... 예..." 뿐이었다. 어머니는 말 없이 굳은 얼굴로 옆에 앉아 계셨다.


2-2.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에 들어갔다. 아마도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했을 것이다. 그 날은 아버지가, 평생 만져보지도 못했던 액수 만큼의 부도를 맞은 날이었다. 아마 저녁도 먹었을 것이고 TV도 보았을텐데, 뭘 먹었는지 뭘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그 날 아버지가 한 명의 가장으로서 떠안아야 했을 절망과 좌절이 어느 정도의 크기였는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2-3. 소심하지만 또 그만큼 악착 같았던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삼켜냈다. 그 날의 부도란, 아버지와 갑을관계에 있었던 (더 정확하게는 '갑'이었던) 내 친구의 아버지가 종적을 감출 정도로 큰 일이었지만 내 아비는 지박령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못박혀 서있었다. 아들들에게 그 모든 일들을 함구한 채로, 그 빚들을 모두 갚아내는데 15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지만, 어쨌거나 내 아비는 아내와 함께 그 모든 일들을 모두 감당해냈다.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을 지켜냈다.


3.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아비의 삶은 그다지 성공적인 삶은 아니었다. 가난한 좌익 전력자의 맏이로 태어나 의무교육만을 겨우 이수하고 쫓기듯이 하루하루에 내몰렸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들이란 항상 고단한 것이었다. 희망이고 뭐고 말하기 전에, 자식들이 꽤 큰 다음에도 겨우 하루 세끼 굶지 않고 밥 먹을 수 있다는 정도에도 감사하는 날들이었다.


4-1. 아버지의 통장에 대한 기억도 하나 남아있다. 오십 몇 만원이 찍혀 있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친 후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고단한 육체노동자였던 그가 받았던 한 달 품삯은 그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공장을 그만두고 집 구석에 기계 몇 대를 들여놓고 일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편해졌다거나 수입이 딱히 나아진 것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계 소리가 시끄럽다며 아버지에게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우리 집이 마을 사람들과 썩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4-2. 그래도 무척 감사할 일인 것은 그 이후로 사정이 계속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올해로 스물세해째를 맞는 공장은, 지금은 번듯하게 성장하여 꽤나 모양이 난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순전히 빈손에서 시작해서 이뤄놓은 것임을 잘 알고 있다.


5. 아버지가 다니시던 공장을 그만두시던 무렵인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집 앞의 야트막한 언덕에서 작은 나무가지들을 몇 개 끊어오시고는, 며칠 뒤 어느 바람 많이 불던 날에 얼레를 만들어주셨다. 톱으로 자르고, 사포로 문지르고, 잘 달군 연탄집게로 구멍을 뚫어 꽤나 멋진 얼레가 만들어졌다.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고이 포개 접어서 가슴 한 켠 어딘가에 접어두었을 재능과 꿈과 희망이 그 얼레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얼레를 받아들고 동네사방 뛰어다니던 아이의 함박웃음이 그의 보람이었을 것이다.


6.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의 아버지에게 세상이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마땅히 더 쉬웠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다 감내했다. 세상을 살아낸 그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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