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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想나부랭이

일베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Dog君 2014. 1. 13. 19:45

  『역사문제연구』 30호(2013년 하반기)에 실렸다. 남들처럼 학술논문 한 편 제대로 싣지 못하고, 짤막한 에세이 정도로 처음 이름을 올렸다. 아, 이건 사실 열라 쪽팔려야 맞는 거다.


  일베를 운운하면서 거개의 이야기들이 진영논리로만 빠져드는 것 같아 보였고, 그건 좀 아니다 싶어서 이리저리 글을 좀 써봤다. 사실 지난 여름에 쓴 글인데, 지금 시점에서 보면 좀 거시기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만은... 에 뭐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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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1. 일베를 만난 우리의 자세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만큼이나 빠르게 성장한 인터넷 커뮤니티도 없을 것이다. 2011년 1월 500여 명 정도에 불과했던 일베의 월 평균 PC접속자수는 2년 반이 지난 2013년 7월에는 191만 명에 이르렀다. 디씨인사이드, 네이트판 등 유사한 성격의 커뮤니티 사이트의 PC접속자 수가 줄곧 하락세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연 돋보이는 성장세다. 모바일 접속자수의 상승폭은 더 가팔라서, 일베의 월평균 모바일 방문자 순위는 1년 만에 5위에서 3위로 뛰어올랐다.[각주:1] 일베의 유명세는 단지 많은 사람이 접속한다는 사실에서만 기인하지 않는다. 일베가 ‘일베 현상’이라고 할만한 사회적 반향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적 언사들(“김치년”[각주:2])과 원색적으로 표현되는 지역감정(“홍어”[각주:3]), 정치인에 대한 도를 넘어선 희화화(“쩔뚝이”, “노알라”[각주:4]) 등,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마저 상실한 듯한 선정적 표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베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사람들까지 너도나도 일베를 입에 올리게 되었으니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대중성을 획득한 인터넷 커뮤니티도 드물 것이다.

  일베의 인지도가 급상승하면서, 일베라는 문제적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 무성한 말들이 오갔다. “쓰레기 저장소”(황상민), “루저”(진중권), “파시즘”(김동춘), “막장 중의 막장”(이택광) 등의 논평이 쏟아졌고, 일베의 반민주성에 대한 규탄들이 뒤를 이었다. 일베에 대한 세인의 비판적 관심은 일베(혹은 ‘일베충’[각주:5]으로 의심되는 이들)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로 이어졌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한 아이돌가수는 라디오방송에서 무심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는 말을 흘린 덕분에 여론의 뭇매를 두들겨 맞았고, 또 다른 아이돌그룹의 SNS에 등장한 “여러분 노무노무 멋졌던 거 알죠?”라는 문장에서 시작된 일베충 논란은 직렬5기통춤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민주주의의 기초적 원칙조차 위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베에서 나타나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퇴행적인 역사 인식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일베에 대한 세인들의 반발 역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명확한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당사자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에 대해 린치를 가하는 것은 일베의 ‘종북딱지 붙이기’와 행동 구조가 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요란스러운 대처법이, 애초 별다른 무게감이 없었던 일베에게 오히려 정치적인 존재감을 부여하는 효과를 낸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 역시 지울 수 없다.[각주:6] 물론 일베라는 문제적 현상을 앞에 두고 “알고 보면 너나 나나 일베”라는 식의 양비론을 펼치는 것 역시 딱히 바람직하지는 않다. 일베를 폐쇄한다거나 일베에 게재되는 광고를 끊도록 광고주를 압박하는 등의 대응도 1차원적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일베에 대처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는 일베를 타자화시키고 그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베 현상을 낳은 사회적 배경은 무엇인지, 일베 현상을 추동하는 사회적 힘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일이다. 일베의 주축인 청년 세대가 그간 진보 정치의 주된 지지기반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성찰은 더더욱 중요하다.



2. 일베를 통해 표출되는 청년의 좌절


  따지고 보면 일베에서 통용되는 지역감정 조장이나 종북딱지 붙이기 등은 이미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나 소위 ‘애국보수단체’들의 활동을 통해 친숙해진 장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베 현상이 그토록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아마도 그것이 20대를 중심으로 한 청년 세대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수구보수 세력에 맞서고, 진보를 지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청년 세대의 저항정신이 다름 아닌 진보 세력에게 칼끝을 겨눴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진보 세력에게 냉소적인 비난을 퍼부으며 공개적으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청년 세대의 모습이 곧장 한국 사회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지표로 인식되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청년세대에게 부여된 당위적인 시대정신이란 것은, 사실 그들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만들고 싶었던 기성 세대(아마도 386 세대라고 불리는 선배 세대)에 의해 덧씌워진 이미지였을지도 모른다. 온라인의 청년 세대에 대한 그간의 이미지는 인터넷의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로이 암약하다가 특정한 국면에서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기도 하는 레지스탕스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 속에서는 왜 청년 세대(의 일부)가 갑자기 일베와 같은 표현을 쏟아내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이 도출되기 어렵다. 기껏해야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현실과 인식의 괴리 정도나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일베 현상의 원동력을 찾기 위해서는 “과연 일베 현상을 ‘우경화’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흔히 일베 현상은 “보수이데올로기”나 “우경화”라는 표현으로 설명되기 마련이지만 사실 이들 단어로는 일베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일베와 보수정치세력은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베의 정치적 표현에서 두드러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반공주의에 과도하게 치우쳐 있었던 기존 보수정치세력의 구호에서는 전면에 내세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반공주의 역시 일베의 성향 중 하나인 것은 맞지만 반공주의만으로 그들의 구호를 특징짓기는 어렵다. 일베의 주된 적의(敵意)는 반공주의라는 추상적 구호에 머무르기 보다는 실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이나 이주노동자 등의 소수자집단을 향한다. 일베에서 여성과 이주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거나 그러한 권리를 과도하게 향유하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여기에는 이들 때문에 자신들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침해당했다는 피해의식 내지 박탈감이 깔려 있다. 일베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소수자이자 피해자로 자리매김하고[각주:7] 기득권(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청년 세대가 온라인에서 나타내는 보수적 성향을 분석한 다카하라 모토아키와 일본의 넷우익을 심층취재한 야스다 고이치의 논의는 참고할 가치가 있다.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삼인, 2007.)에서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회사주의’의 좌절과 중간층의 분열에서 파생된 ‘개별불안형 내셔널리즘’이야말로 온라인에서 나타나는 보수 이데올로기(내셔널리즘)의 진짜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그간 일본사회를 강고하게 지켜오던 ‘회사주의’의 붕괴는 젊은 세대에게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앗아가 버렸고 종신고용과 성장에 대한 낙관까지 덩달아 박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간 ‘회사주의’를 통해 지탱되던 중간층은 상하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사회적 보호망을 상실한 개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표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별불안형 내셔널리즘’으로 기울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야스다 고이치가 『거리로 나온 넷우익』(후마니타스, 2013.)에서 보여주는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의 모습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일 한국인의 ‘특권’ 때문에 피해를 입는 소수자이자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며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들을 보여주지만, 실제 그 구성원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오히려 사회나 가족이 제공하는 사회적 안전망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개별화‧파편화되어 흩어진 이들일 따름이다. 이들에게 재특회 활동은 오프라인에서는 상실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사회적인 자존감을 획득하는 수단이다. 일본의 사례에 대한 이상의 분석들은 일베 현상과도 일정 정도 상응하는 측면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에 내몰린 청년 세대의 피해의식과 자존감을 획득하려는 욕구가 일베라는 폭력성으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청년 세대가 처한 한국의 현실이란 가히 살풍경이다. 대학입시의 링에서 겨우 살아남아 대학에 들어왔건만 대학은 이미 취업을 놓고 벌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되었고, 그 전장의 분투 끝에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갖춰도 취업문은 여전히 바늘구멍이다. 안정적인 고용의 꿈은 말 그대로 꿈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러하니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해 좌절과 분노가 치밀지만 그것은 결코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개별화‧파편화된 개인이 사회구조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개인적인 저항만으로는 거대한 구조에 그 어떤 타격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야 독재정권을 사회적 모순의 근본적 원인으로 설정할 수 있었지만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오늘날에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적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개별화된 청년 세대의 분노는 일상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여성과 이주노동자 등을 목표물로 설정하게 되고, 이렇게 뭉친 사회적 분노가 일베라는 공간적 계기를 통해 표출된다. 당연히 그 표현방식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좋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 들끓었던 거대한 사회적 비판에 대해서도 일베가 그다지 개의치 않았던 것 역시 일베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즐기는 방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만으로는 일베의 비판 대상이 왜 보수 세력이 아니라 진보 세력인지, 그리고 일베의 표현형식은 왜 그토록 폭력적으로 왜곡되어 있는지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또한 일베의 구성원을 하층으로 내몰린 청년 세대로만 보는 것도 지나치게 획일화된 분석이다.[각주:8]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일베 현상의 또 다른 뿌리인 인터넷 문화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베의 근저에 깔린 남성중심주의나 내셔널리즘, 반권위주의 등은 인터넷 문화가 줄곧 견지해왔던 특징이기 때문이다.



3. 일베의 또 다른 뿌리, 인터넷 문화


  오프라인과는 다른 독자적 영역으로의 인터넷 문화가 형성된 것은 2000년대 초반 디씨인사이드 등의 커뮤니티 사이트와 딴지일보 등의 온라인 매체의 발달이 주요한 계기였다. “아햏햏”, “스타쉬피스” 등의 용어는 기존의 언어 습관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새로운 형태의 오프라인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었고,[각주:9] 딴지일보 등의 온라인 매체는 이미지 합성과 거침없는 언사를 통한 풍자와 패러디를 통해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하위문화적 영역을 개척했다. 여기에 인터넷의 익명성이 결합되면서, 마침내 온라인은 사회의 보수적 금기에 자유롭게 도전하는 장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온라인의 정치 담론은 급기야 오프라인에서의 거대한 정치적 에너지로도 이어졌는데, 여중생 촛불시위나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 등이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존의 사회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온라인의 성격은, 온라인에 기반한 청년 세대를 새로운 (진보적) 정치주체로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랬던 온라인이기에 일베는 더더욱 이질적으로 보인다. 물론 진보적 정치에 적극 공감했던 네티즌과 일베의 구성원은 다르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일베가 견지하고 있는 남성중심주의나 내셔널리즘 등의 요소가 그간 인터넷 문화가 지속적으로 견지해왔던 특징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면 양자를 뚜렷이 구분하기는 어렵다. 진보적 정치를 추동했던 인터넷 문화에 이미 일베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터넷 문화의 남성중심주의나 내셔널리즘의 위험성에 대한 지적들은 일찍부터 있었다.[각주:10] 예컨대, 온라인에서 오고간 거개의 성(性) 이야기는 그간 금기시되었던 성에 대해 좀 더 솔직하게 접근해보자는 시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남성중심적인 성 관념과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이기도 했다. 딴지일보 등의 진보적 매체에서 정치인에 대한 패러디는 곧잘 성적 희화화로 연결되었고, 디씨인사이드 등의 커뮤니티에서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남성들의 노골적인 취향들이 오고 갔다. 한 때 논란을 일으켰던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의 “생물학적 완성도” 발언 등은 나꼼수가 기반했던 청년 세대와 그들의 인터넷 문화에 여전히 남성중심주의적 인식이 강고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과민반응으로 치부되거나, 당면한 보수 이데올로기와의 싸움 앞에서 부차적인 문제처럼 인식되곤 했다. 진보/보수로 양분화된 정치 현실은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방해했고, 보수 이데올로기와의 당면한 싸움 앞에서 그러한 것들은 크게 문제시되지도 않았다.

  인터넷 문화, 더 나아가 일베 현상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진보/보수’의 틀이 과연 얼마나 유효한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5.18의 북한군 개입설을 부정한 조갑제마저 일베에서는 종북주의자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은[각주:11] 일베가 공격 대상을 설정하는 방식이 사회적‧이데올로기적으로 통용되는 ‘진보/보수’의 틀과는 무관함을 보여준다. 오히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터넷 문화의 특징은 ‘진보’라기보다는 ‘권위’와 ‘다수’에 대한 저항, 즉 ‘반권위주의’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 문화가 그간 견지했던 보수 정치에 대한 저항은 보수에 대한 진보적 저항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반권위적 저항에 가까웠던 것이다.

  일베가 서로를 “루저”나 “게이”[각주:12]로 지칭하는 것은 이러한 기호들을 사용하는 자(커뮤니티 내부)와 그렇지 않은 자(커뮤니티 외부)를 구분지어, 스스로를 사회적 다수와 구분되는 소수자로 위치시키는 방편이다.[각주:13] 스스로를 사회적 패배자의 위치로 격하시킬 때 비로소 권위에 대한 적개심의 근거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서 이야기했던 ‘청년 세대의 좌절’이 인터넷 문화와 조우한다. 기존 질서에 꺾이고 좌절하며 소수자‧패배자의 위치로 전락한 청년 세대의 좌절은 인터넷 문화와 만나며 ‘권위’(혹은 ‘다수’)로 의심되는 거의 모든 것을 향한 분노로 전환된다.

  한편 지난 10여 년 간의 경험은 지금의 야당과 진보정치세력 역시 기존의 권위적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노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금의 야당은 10년간의 집권 세력이었고, 진보적 정치세력 또한 원내에 진출하여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획득하며 사회적 권위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야권 내부의 이합집산과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 등을 통해 그들이 획득한 사회적 권위 역시 기존의 권위적 문화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진보 정치가 언제까지고 반권위주의의 무풍지대에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 담론이 청년 세대의 ‘다수’로 점했다고도 볼 수도 있다. 지난 정권에서의 ‘反MB정서’는 특히 청년 세대에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정권이 한국 사회를 정치적으로 크게 퇴보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反MB’만이 당연한 상식이자 진리이고 그러지 않은 것은 개념 없는 것이라는 식의 도덕적 판단들이 횡행했던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정치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다수의 힘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설교를 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권위’가 가장 오랫동안 의지했던 방식이었다. 인터넷 문화의 반권위주의가 진보 정치를 타겟으로 삼게 되는 조건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온라인의 청년 세대가 정치를 표현하는 형식이 권위에 대한 유희적 조롱과 비틀기로 나타나는 것 역시 정치에 대한 이들의 반권위주의를 반영한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2012년의 나꼼수 열풍을 보수적 정치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독해했지만, 기실 그것은 권위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과 정치에 대한 유희적 소비가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따라서 나꼼수를 통해 표현된, 폭력성과 남성중심주의를 여전히 해소하지 못했던 반권위주의는 권위화된 진보에게도 동일하게 겨눠질 수 있는 칼날이었다.[각주:14]



4. 다시, 일베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세간에 떠도는 여러 논평들 속에서 청년 세대는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깨어있는 젊은이’와 ‘말도 안 되는 패드립이나 쳐대는 일베충’ 사이를 수시로 오갔지만 정작 그들의 사회적 처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들이 정치를 소비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과연 이것이 진보와 보수 중 어느 쪽으로 귀결될지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들의 소통 방식에 대한 성찰은 부족했던 감이 있다. 그저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당위만이 도그마처럼 남아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당면한 사회적 좌절에 맞서야 하는 청년 세대가 언제까지고 역사적 정당성과 사회적 정의에 따라 움직이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서도 잠시 인용했던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온라인에서 나타나는 일본의 보수적 내셔널리즘(혹은 우경화)은 청년 세대의 좌절이 이데올로기의 표피를 쓰고 드러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사태의 본질은 아니라고 진단했는데, 이러한 관점을 수용한다면 일베 현상 역시 청년 세대의 좌절감이 양극화된 정치 이데올로기의 외피를 통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베라는 문제적 현상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일베를 적대시하면서 일베의 보수적 언동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가 아니라 개별화‧파편화된 청년 세대의 좌절을 어떻게 매만질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문제의 진짜 원인은 일베의 잘못된 역사관이 아니라 일베 현상을 낳은 청년 세대의 좌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일베의 역사관을 준엄하게 꾸짖고 그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함양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보수’로 고착된 현실인식은 일베 현상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청년 세대의 좌절이 배출되는 통로까지 ‘진보/보수’로 고착시키는 역효과까지 일으킨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거대한 사회적 좌절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청년 세대와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다. 여기서 ‘소통’이란 단지 수사적 구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청년 세대의 시선에서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의 벽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는 일이고, 그들에게 정치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묻는 것이며, 그들이 자리한 온라인의 문법과 재생산 구조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 보는 노력이다. 그러한 소통의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일베 현상을 둘러싼 지형도도 온전히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1. 「커뮤니티 춘추전국시대 : 디시·아고라 대신 일베·뽐뿌가 대세」, MK뉴스, 2013년 8월 24일.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3&no=756820) [본문으로]
  2.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는 여성을 지칭한다고 하지만 대개는 여성 일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여성에 대한 조롱과 비하의 의미가 섞여 있다. [본문으로]
  3. 전라도에 사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4. 전자는 故김대중 前대통령을, 후자는 故노무현 前대통령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5. 일베를 이용하며, 그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 역시 조롱과 비하의 의미가 섞여 있다. [본문으로]
  6. 남재일, 「거짓 자유주의가 잉태한 홍위병」, 『나‧들』 2013년 9월호, 74쪽. [본문으로]
  7. 이 외에도 보수정치세력과 일베는 구성원 간의 세대 차이가 크고, 활동하는 공간도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사용하는 용어 역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본문으로]
  8. 일베가 자체적으로 시행한 ‘학력인증’ 결과 일베 구성원 중 다수가 해외 유수의 대학 혹은 국내 유명 대학 재학 중인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재학 중인 학교의 이름만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학벌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을 생각하면 이들을 하층 계급이라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한편 진중권은 이에 대해 “찌질함에는 학력의 고하가 없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본문으로]
  9. ‘아햏햏’은 디씨인사이드에서, ‘스타쉬피스’는 나우누리 유머동호회에서 쓰였던 말이다. 둘 다 별다른 의미 없이 사용되었지만 나우누리 유머동호회에서 ‘아햏햏’은 금칙어였다. 이 단어의 사용 여부가 각각의 커뮤니티를 구분하는 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오프라인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10. 김잠초, 「디씨 폐인과 P세대」, 참세상뉴스 2003년 6월 10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28615) [본문으로]
  11. 「조갑제, ‘북한군 5‧18 개입설’ 비판했다가... ‘종북좌파’ 뭇매」, 중앙일보 2013년 5월 21일.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577790&cloc=olink|article|default) [본문으로]
  12. ‘게시판 이용자’의 줄임말이다. ‘사전적’으로는 해당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용자 일반을 지칭하는 중립적 의미이지만, 동성애에 대한 경멸의 의미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베 이외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널리 쓰인다. [본문으로]
  13. 권위에 대한 배격은 온라인 커뮤니티 내부 구성원 사이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덕목이다. 특정한 개인에게 명망이 집중되거나 ‘친목질’을 통해 특정한 파벌을 형성하는 일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재생산을 위해서도 반드시 금지되어야 하는 일이다. 이길호, 『우리는 디씨』, 이매진, 2012, 200~235쪽. [본문으로]
  14. 일베에서 발견되는 공격적‧폭력적 언사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10여 년 전에 사용되었던 ‘아햏햏’, ‘하오체’ 등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우리 커뮤니티와 타인의 커뮤니티를 구분하는 중요한 표식이었던 것처럼, 일베에서 사용하는 폭력적 언사들 역시 일베라는 그들의 커뮤니티를 외부 세계와 구분하기 위한 일종의 기호체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외부 세계와 구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소수자에 대한 분노가 결합되면서 극대화된 공격성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성‧폭력성은 커뮤니티 내부의 ‘친목질’을 막는 효과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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