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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想나부랭이

관부연락선 메모

Dog君 2009. 7. 12. 00:02
0. 나름 평균 이상의 독서량을 자부하는 편이지만 양에 비해 독서의 폭은 매우 협소한 편이다. 어지간해서는 안 읽는 책이라면 대개는 자연과학 관련서적이나 소설류인데, 자연과학은 일단 읽어도 모르니까 안 읽는다지만(가장 최근에 읽은 것이 얼추 2년 반쯤 전에 읽었던 상대성이론 관련 책자) 소설을 안 읽는다는건 내가 생각해도 퍽이나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문학이라 하면 모름지기 역사학도라면 철학과 함께 반드시 일정 수준의 교양을 쌓아둘 필요가 있는 영역이 아닌가! 어쨌든... 동학들과의 세미나 모임이 아니고서야 이 책을 읽을 일도 아마 없지 않았을까.

1-1.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은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배편이다. 관부연락선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이유와 욕망, 갈등이 교차되는 공간이다. 푼돈이라도 벌어보려 일본으로 건너가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3등칸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일본 본토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민족적 멸시와 가혹한 노동이다. 반면 일본 본토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은 중일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병사들로 그들은 아마 전선戰線 어딘가에 배속되어 전장의 소모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관부연락선은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열어주는 매개로 기능하지만 그 새로운 환경이 희망의 신세계는 아니다. 양측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암울한 미래 뿐.

1-2. 이렇듯 관부關釜의 양측 모두 참담한 미래 뿐이지만 그것이 민족 간의 차별의 무화無化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태림은 3등칸을 이용할 때 조선인으로서 느껴야할 모멸감과 물리적 불편함 때문에 애써 2등칸에 타려하지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인 친구 E는 말도 안 되는 감상(요즘은 이런걸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더군)으로 3등칸을 고집한다. 부산에 내린 E는 처음 보는 부산의 정경에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그것은 결국 제국 지식인의 변방에 대한 호기심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유태림은 그런 부산의 풍경이 부끄러울 뿐이다. 조선과 일본으로 양분된 세계는 비록 관부연락선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양측의 간극은 크기만 하다.

1-3. 꽤나 넉넉한 살림에 관부연락선 2등칸을 누리며 조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물리적 불편함을 능히 피할 수 있으며 일본인 친구들과도 격의없는 사이인 유태림은 그런 의미에서 양분된 세계의 중간 어디쯤에 걸쳐있다. 관부연락선은 유태림이 위치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을 지칭하는 지명일지도 모른다.

2-1. 해방되고 세상은 다시 둘로 갈린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양 극단 속에서 중간지대는 없으며 민족 어쩌구 하는 소리는 낭만주의로 치부된다.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이 양 극단 어딘가에 스스로를 위치시켜야 한다.

2-2. 유태림의 위치는 이번에도 중간 어디쯤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좌익 교사와 학생들과의 신경전은 얼핏 그의 이념적 위치가 오른쪽 어디쯤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도 만들지만 정확히 말해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어디쯤이다. 좀 배운 처지이기는 하지만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그 역시도 "판단이 정확하게 서지 않"기 때문이다. 유태림은 고급부 2학년 학생들과 함께 비어있는 교단에 (상상 속에서) 이승만을 세워보기도 하고 김구나 박헌영을 세워보기도 하지만 누구든 마뜩찮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유태림의 자세를 '우유부단'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다소 부당해보인다. 정확히 둘로 쪼개질 수 없는 세상을 억지로 둘로 쪼개놓고 어느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하는 상황 자체가 부조리한 것 아닐까.

2-3. 선택지가 둘 밖에 없는 문제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의 비극은 그나마의 확신도 없다는 것이다. 어디에 대충 '정답없음' 같은 선택지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마저 없으니 고민만 하게 되고 결국엔 이도 저도 못하고 50%의 확률도 못 잡고 만다. 유태림이 도망치듯 학도병으로 지원한 것은 친일에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물리적 가혹함을 통해 정신적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선택은 아니었을까.

3. 소설이라는 글의 형태가 글쓴이의 주장과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작가인 이병주는 유태림을 통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은 거라 미뤄볼 수 있겠다. (실제로 유태림과 이병주의 삶은 유사한 측면이 많다.) 계급적으로든 민족적으로든 명확하게 한 쪽 극단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유태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의 최대한 합리성을 유지하는 것 뿐이다. 학도병 부대 내에서의 공산주의 서클을 준비하는 것에 협조하지 않은 것은 그 대의에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초래할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서였고 학교에서 좌익 교사들과 학생들과 대립한 것 역시 명확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이 지녀야 할 어떤 당위성을 지키기 위함에 가깝다. 좌익활동가로 변신한 서경애를 바라보는 유태림의 감정에는 '미안함'이라는 것이 충만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이념에 대한 동조라기보다는 휴머니즘적 시선에 가깝다. 유태림은 어떤 식으로든 이념으로 편가르기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한다.

4. 대부분의 경우 세상은 둘로 나뉜다. 정확하게 말하면 둘로 나뉜다기보다는 우리가 세상을 둘로 나누는 것에 익숙한 것이다. 실제로 두터운 중간지대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점은 대개 무시된다. 그리고 둘로만 나뉜 세상은 쉬이 극단화된다. 이 틈바구니에서 결국 죽어나는 건 그러한 상황을 좀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먹물'들이다. 어쩌면 유태림은 극단의 시대를 살아왔던 이병주의 '자기 변명'인 동시에 극단의 시대에 대한 이병주 나름의 통분의 아이콘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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