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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답이라는 해답 (김태호, 창비, 20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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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답이라는 해답 (김태호, 창비, 2021.)

Dog君 2022. 4. 20. 20:24

 

  문과와 이과로 크게 나뉘는 한국의 교육체계를 기준으로 하면 나는 과학과는 퍽 거리가 먼 사람이다. (과학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을 2차함수에서 포기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물리-화학-지구과학-생물 순으로 한 과목씩 포기하면서 어른이 됐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몇 년 전부터 과학책에 손을 대고 과학 팟캐스트를 즐겨듣게 된 건 꽤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도 시험의 압박이 없다는게 가장 큰 이유일 거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과학을 알면 내 주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제가 누리는, 실내난방을 하고 스마트폰을 보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보통의 일상 대부분이 과학의 발전 덕분에 가능한 것들이니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은 무척 크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결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착오와 "오답"(과정)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와 사람들과의 관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 과정을 알면 우리는 지금의 일상을 좀 더 비범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얼핏 보기에는 많은 에피소드를 짧게짧게 보여주는 것 같은 이 책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에게 의외의 감동을 준다. 인간이 과거보다 더 나은 지혜와 문명을 얻게 된 것은 질문하고 대답하고 의심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은 그 무한한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직관을 과신하지 않았고 자연 앞에서 겸손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혹은 '너무 길다, 세줄 요약 좀'이 횡행하는 요즘에야말로 재차 곱씹어볼만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합리적인 설명을 추구하다보니, 인간은 때로 익숙한 경험이나 직관과 반대되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 설명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내었다. (...) 어떤 이들은 낯설고 불편한 설명을 끝까지 거부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용기를 내어 "과연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한발 더 나아가본다.
  과학의 힘은, 그리고 과학이라는 체계를 일구어낸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이렇게 직관을 배반하는 결론이라도 과감히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추구한 결과, 과학이라는 거대한 체계를 만들어냈다. 과학 덕분에 근대 인간은 편안한 경험과 직관의 세계를 벗어나 불확실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용기를 낸 덕에 그전 세계에 살던 인간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힘을 갖게 되었다. (5~6쪽.)

 

  (...) 용어의 변천 과정에는 한국 과학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한국이 과학을 어디서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어디에서 영향을 받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는 창문과도 같은 것이 바로 과학 용어의 역사다.
  일본이 근대화학을 배워온 창구는 당시 화학이 가장 발달했던 독일이었으므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원소와 화합물의 이름도 대부분 독일식이었다. (...) 이와 같은 일본식 용어는 광복 후 순화되어서 독일식 발음에 조금 더 가까운 한글 표기로 대체되었다. (...)
  그런데 이렇게 순화된 과학 용어들은 어느새 새로운 과학 용어에 밀려났다. 대한화학회가 2016년 화합물 명명법을 개정하면서 영어식 이름을 따라 나트륨은 소듐(sodium)이, 칼륨은 포타슘(potassium)이 되었다. (...) 이미 100년 가까이 써 온 용어들을 버리고 새 용어를 채택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외부의 변화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전세계 과학계를 평정한 미국과 영어의 힘이었다.
  (...)
  화학계에서 미국식으로 용어를 개편한 것은 화학계 내부의 합의를 따른 것이고, 충분한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학에 관련된 일이라고 모두 과학자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본질적인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 용어의 변천을 되돌아보는 일에는, 그 길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했음을 알려준다는 의미가 있다. (78~81쪽.)

 

   (...) 달력은 민중의 문화와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음력으로 챙기던 조상의 생일과 기일을 버릴 수 없었던 민중들은 양력 1월 1일 을 '왜놈 설'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휴일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던 음력설과 추석을 꼬박꼬박 쇠었다. 하지만 근대화를 위해서 서양과 같은 달력을 써야 한다는 국가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 탓에 일제강점기에도, 심지어 광복 후에도 음력의 풍습은 미신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했다. (...)
  음력설과 추석이 다시 휴일이 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민주화운동이 거세어지던 1985년,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음력 1월 1일에 '민속의 날'이라는 궁색한 이름을 붙이고는 올해부터 하루짜리 휴일로 정한다고 공포했다. 민속의 날은 1989년부터는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오늘의 위상을 회복했다. (98~99쪽.)

 

  (...) 낯섦이야말로 역사 연구가 계속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쓰는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기술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쓰는 형태로 진화해야 할 필연적 이유 같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 이것이 과학기술의 역사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141쪽.)

 

  물론 우장춘이 1950년에 귀국하여 남긴 업적 중 배추의 품종개량이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김장용 배추 하나로만 우장춘을 기억한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좀 길고 복잡하더라도 평생에 걸친 그의 연구 업적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국제 생물학계의 흐름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장춘을 상징하는 우표 속 아이콘이 수박이 아닌 배추가 되었다는 것도 물론 바람직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대표적인 상징이나 문장 하나로 인물을 기억하려는 우리의 버릇도 반성해보아야 한다. 무조건 '간단 요약'을 선호하는 마음을 파고드는 데는 속설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148~149쪽.)

 

  서양인과 일찍 또 자주 만나서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이면 근대화로 이어지는가? 사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은 아니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다름 아닌 일본을 의식해서다. 막부가 제한적으로나마 나가사키 등을 통해 네덜란드의 과학과 의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메이지유신 이후에 서양 과학기술을 효과적으로 익히고 나아가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사는 일본에서도 먼 훗날 자신들의 '성공'을 어떻게든 설명 해야겠다는 목표 아래 구성된 것이다. 일본 사학계 안에서도 19세기 말 일본의 급성장은 국내외적으로 여러가지 행운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보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행운도 실력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서양인과 얼마나 자주 또는 일찍 접촉했는지가 과연 그렇게 결정적인 요인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
  더구나 일본처럼 서양과의 만남이 좋은 결과를 불러온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일본이나 중국보다 일찍 유럽과 만났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로 전락하여 가혹한 수탈을 감내해야 했다. 네덜란드의 군대가 몰려가서 격렬한 전쟁으로 수많은 선주민의 목숨을 빼앗고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 식민지를 건설한 역사를 생각하면, 군대를 실은 멀쩡한 배가 들어오지 않고 하멜이나 벨테브레이 등이 도움이 필요한 처지로 떠내려온 것은 조선에 오히려 행운이 아니었겠는가?
  역사는 과거를 탓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루지 못한 근대화에 대한 아쉬움은 한국인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당시 일어나지 않았고 예상할 수도 없었던 미래에 끼워 맞춰 과거의 일을 재단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226~228쪽.)

 

  생활의 근대화를 주창하던 이들은 서양식 난방이 온돌 난방보다 열효율이 높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더 뛰어나는 등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당장 내 등 따뜻한 것이 중요한 사람에게 공학자가 계산한 열효율 같은 숫자를 들이밀어봐야 무용지물이었다.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사람들의 불 만을 반영하여 한국인이 선호하는 난방을 최대한 구현하고자 했다. 아파트에 층층이 구들장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지마, 온돌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위한 여 러가지 궁리가 이어졌다. (248~249쪽.)

 

  과학 교과서 속의 과학사는 현재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과학 이론들을 마치 최종 완성된 '결론'인 것처럼 보여준다. 잘 정리된 지식을 전달한다는 교과서의 목적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실제로 과학이 걸어온 길은 이와 다르다. 오늘의 오답이 어제의 해답이었을 수 있으며, 오늘의 해답으로 여기는 것이 내일의 오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오답'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완전히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새 이론이 옛 이론보다 어떤 면에선가 한발 더 나아갔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 탐구의 역사는 어딘가 숨어 있는 절대 진리를 찾아냄으로써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다듬어나가면서, 끝없이 전진하고 끝없이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수학에 비유하자면, 한 점을 통과하는 직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직선에 무한히 가까워지지만 거기에 다다르지는 않는 점근선에 가까운 모습이다.
  한없이 가까워지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니 덧없는 일이 아닌가,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덧없는 일은 아닌가, 허망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나가는 과정은 비록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자체로 즐겁고 보람찬 일이다. 우리는 백년 전, 천년 전의 선조들과 비교해보면 놀랄 만큼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앎의 과정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인류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수많은 기술을 개발했다.
  현장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우리가 지닌 과학 지식의 한계를 알고 자연 앞에 겸손하다. 동시에 그들은 오늘의 과학에서도 한발 더 나아갈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 (373~375쪽.)

 

교정. 초판 1쇄

137쪽 11줄 : 141면 -> 139면

226쪽 13줄 : 네덜란드의 문물 과학과 의학을 -> 네덜란드의 과학과 의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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