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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함정,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제임스 M. 블로트, 푸른숲, 200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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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함정,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제임스 M. 블로트, 푸른숲, 2008.)

Dog君 2008. 12. 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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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참으로 간만의 글이라는 점을 미리 알리면서... 그동안 내가 바쁘긴 바빴나보다. 근데 어째 해놓은건 하나도 없는걸까.

1-1.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이고 아마도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길로 먹고 살 것 같은 내 상황상 새삼스럽게 이 자리에서 유럽중심주의가 왜 나쁜 것이고 그것이 왜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주구장창 떠들 이유는 없어 보인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널리고 흘러넘치는 그런 지식을 재생산하는게 내 임무는 아니라고 믿거든.

1-2. 제목만 봐도 딱 느낌이 오는 것처럼, 이 책 역시 유럽중심주의에 관한 또 하나의 탁월한 비판서의 대열에 포함된다. 굳이 장점을 꼽자면 현재 서구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학자들의 글을 직접, 즉 대놓고 까는 글이라는 것. 비전공자들에게는 다소 까다롭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논쟁의 지점도 확실히 잡힌 편이고 그래서 비교적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그래서 굳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 대신 이 책에 대해 가할 수 있는 몇 가지 비판을 제기하는 것으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하니, 일반적인 서구중심주의 비판 내용을 기대하신 분은 집에 가시고.

2-1. 먼저,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럽’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 이 책에서 ‘유럽’ 개념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중부 유럽과 앵글로 아메리카 등지를 일컫는 실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역들이 대부분의 경우 옥시덴트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사카이 나오키 센세-가 말씀하셨던 쌍형상화co-figuration의 도식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은 옥시덴트와 오리엔트라는게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언제나 두개가 동시에 배치되어 비교될 때만 성립이 된다는 거. 예를 들어 설명하면, 내가 사는 왕십리는 신촌이나 홍대에 비교하면 아무래도 이거... 완전 오리엔트다. 근데 어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버스도 잘 끊기는 그런 동네에 비하면 확실히 옥시덴트거든. 유럽도 마찬가지. 독일 같은 나라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교될 때와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와 비교될 때 그 의미가 달라진다.

2-2. 자, 그렇다면 '유럽=옥시덴트'라는 등식은 맥락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거지. 자꾸 서구를 고정적인 개념으로만 판단할 경우 유럽 내부에서의 동/서 구분 짓기나 동아시아에서의 동/서 구분짓기가 포착되지 않는 맹점이 있거든. (이 얘기는 전에 썼던 '일본 동양학의 구조'를 참고하시면 이해가 빠르실거외다.)

3-1. 둘째는 분석 대상이 서구로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 비판 대상으로 삼는 텍스트가 서구에서 생산된 텍스트로만 한정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논박도 非서구의 경험을 서술하는 것 대신 비서구도 그에 못지않은 발전을 이뤘다는 주장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결국 논의의 수준은 아시아가 서구의 발전양상과 얼마나 비슷한 수준을 이룩하고 있었느냐를 증명하는 것에서 머무르고 있다. 이렇게 되니까 보편적인 비교기준이 서구가 되고, 그래서 아시아의 역사는 아무리 잘나도 ‘서구에 비겨보아 무엇인가 결여된 역사’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거. 저자의 전공분야가 트리컨티넨탈에 대한 지리학적 연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더 아쉽게 다가온다.

3-2. 이 점에서 글로벌 히스토리 분야에게 제기하고 있는 ‘상호비교reciprocal comparison’라는 분석방식은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상호비교의 방식은, 케네스 포메란츠에 따르면 어느 한 편을 보편적 기준norm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비교대상이 가진 ‘편차deviation’를 통해 양측을 동등비교하자는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어느 정도 해결책을 제시하는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요. 위에서도 설명했던 쌍형상화의 도식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서구중심주의라는 인식구조는 옥시덴트와 오리엔트의 경험을 동등하게 분석할 때에만 극복이 가능할 것이여.

4. 셋째로 기왕지사 논의의 대상을 서구의 텍스트로 한정하려 했다면 앗싸리 그것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이나 그것이 변호하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지, 그 속에 내재된 지향은 무엇인지에 논의의 무게중심을 좀 더 싣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거 때문에 이 책은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안도출에 있어서는 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서구중심주의를 푸코적 의미의 '담론discourse'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구중심주의적 텍스트를 정태적이 아닌 고고학적으로, 즉 그러한 논리들이 만들어져 온 과정과 그 속에 녹아있는 권력의 의지를 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게 내 생각. (물론 그거 죵니 어렵다. 푸코 개새끼!) 그래서 내 결론은... 서구중심주의의, 서구로부터의 해체는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거.

5-1.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건 블로트가 보이는 환경결정론에 대한 지극한 거부감. 특히 '총, 균, 쇠'에 대한 비판에서 절정에 달하는 이러한 냉소적인 태도는 그의 글 속에서만 한정해서라면 서구중심주의에 도전하는 매우 타당한 자세가 될지도 모르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양날의 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최근에 쏟아지고 있는 많은 (서구중심주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글로벌 히스토리의 성과물들이 환경결정론에 대해 부채를 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우려는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재의 '저발전'이 환경적 요인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행위 혹은 역사'의 결과라는 블로트의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 혹은 역사'라는 것이 결국은 서구의 근대제국주의가 빚어낸 결과들에만 국한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같은 지적은 반서구중심주의의 논의를 결국 진부한 (근대)민족사national history의 틀로 회귀시킬 위험성을 품고 있다.

5-2. 현재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결국 근대민족국가의 결과로만 규정되기 때문이다. 프라센짓 두아라는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에서 민족사의 틀이 다양하게 산포dispersal된 소문자 역사들histories의 경험을,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전달transmission된 대문자 역사History로 전유하는 과정을 그려낸 바 있다. 다양한 역사를 민족사의 틀로 형질전환시키는 것이 결국 서구적 보편성으로의 통합을 의미했다는 두아라의 지적을 상기시켜 본다면 블로트의 환경결정론 비판은 좀 더 엄밀하게 재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6-1. 전문번역가의 번역답게 문장은 말끔한데, 영 말도 안 되는 번역이 종종 눈에 띈다. '총, 균, 쇠'를 '총기, 병균, 강철'이라고 번역한 것이라든지, decolonize에 과거청산의 의미를 강하게 넣어서 번역한 것이라든지... 특히 후자의 경우는 의역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전공자들로서는 다소 까리한 부분.

6-2. 지난 번에 썼던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처럼 이 녀석도 발표문으로 썼던 것을 대충 수정했다는 사실을 자백하면서... 어차피 뭐... 수업시간에 읽으려고 쓰는 글이나 블로그에 후려갈기는 글이나 개발새발인건 마찬가진걸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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