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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20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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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2014.)

Dog君 2017. 2. 12. 19:23


1-1.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자연수명에서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할 때까지 쓰는 처음 십 몇 년과 몸의 기력이 쇠해서 죽음을 기다리느라 쓰는 마지막 몇 년을 빼면 길어야 60~70년 정도 되지 않을까.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적 시간’에 비하면 너무 짧은 시간이다. 임기 5년 짜리 대통령은 12~14명 볼 수 있고, 가계는 자기 할아버지부터 자기 손자까지 본다고 치면 5대를 본다. 운이 좋으면 핼리혜성은 2번 볼 수 있고, 2월 29일은 20번을 채 못 본다. 요새 들어 매스미디어가 발달하고 정보화도 엄청나다고는 하지만, 주어진 시간 자체가 짧다보니 우리가 보고 겪을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적다.


1-2. 역사 공부의 장점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역사적 시간’ 속으로 뛰어들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폭이 크게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겪을 수 있는 것도 함께 늘어난다. 보고 겪는 것이 늘어나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성찰과 통찰도 당연히 늘어난다.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재미도 없는) 역사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가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2. 생물학적으로 따져봤자 이제 겨우 서른 몇 해를 산 내 입장에서, 이 세상이 굴러온 길은 굉장히 좆같아 보인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좆같아서 사람들은 이걸 “헬조선”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세상이 전반적으로 다 좆같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세간에서 말하길 대략 ‘IMF 사태'를 기점으로 줄곧 ‘좆같음'이 심해졌다고 하던데, 그 말인즉슨 내가 철이 들기 시작한 10대 중반부터 이 ‘좆같음’이 쉼 없이 심해졌다는 뜻이다. 이 추세로 미루어보자면, 앞으로 이 ‘좆같음’이 덜해질 것 같지도 않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다.


3. 이런 생각을 나 혼자만 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의 기라성 같은 역사학자들도 이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주로 2차 세계대전이나 사회주의의 몰락 같은 것에서 그런 절망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지고 인간의 합리성이 점점 발달하면 세상도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라 씨발 그 끝에는 대량학살과 대기근이 기다리고 있더라는 식스센스급 대반전. 그로부터 포스트 어쩌고 탈脫 저쩌고 하는 일군의 지적 흐름이 생겨났다. 그들은 ‘발전/성장’이나 ‘합리/이성’ 같은 개념을 의심했고,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낙관도 버렸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변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역사가, 더 많은 경험이 누적되면서 사회를 조금씩이라도 더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포스트 어쩌고 탈 저쩌고의 시대에는 ‘과연 과거에 비해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것이 더 당연하고 어쩐지 좀 더 ‘있어' 보이는 질문이 되었다.


4. 미국의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통해 그 ‘있어' 보이는 질문에 이의를 제기한다. 수천 년에 걸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보니, 적어도 폭력의 정도와 빈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역사는 꾸준히 나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경향을 평화화 과정, 문명화 과정, 인도주의 혁명, 긴 평화, 새로운 평화, 권리 혁명의 여섯 가지로 정리하는데 각각의 경향은 지난 수천 년부터 최근 수십 년에 이르는 다양한 변화를 포괄하고 있다. 예컨대 그가 말하는 "평화화 과정”이란 수렵채집사회에서 농업문명으로 이행하는 수천 년간의 장기적 흐름 속에서 점차 폭력이 배제되는 과정을 의미하고, “긴 평화”란 2차 대전 이후 지속된 수십 년간의 장기적인 평화가 사실은 칸트적인 의미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식이다. 물론 양차 대전을 비롯한 거대한 폭력이 있기는 했지만 인간의 긴 역사에서 볼 때 그것은 단지 예외적인 돌출에 불과하고 장기적인 경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폭력의 감소 경향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대규모의 역사적 이벤트라는 관점에서 보면, 안록산의 난 같은 것이 더 큰 비극일 수 있다.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환산하면, 안록산의 난의 영향이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씬 더 많은 비율의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구로 환산하면 4억 2900만이라고;;;)


5. 물론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20세기 이후의 폭력에 대한 역사적 성찰은 단지 많이 죽고 적게 죽고 하는, 양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물질문명과 합리성이, 부메랑처럼 인간에게 돌아와서는 인간의 삶 자체를 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도구적 이성’이니 ‘악의 평범성’이니 하는 ‘있어 보이는' 말들은, 어쩌다가 인간의 합리성이 도리어 인간 자체를 말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한 반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 맥락을 빼버리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처럼 단지 통계적으로 사람이 적게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성찰의 가능성을 닫는 일이 될 수도 있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없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책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과거부터 우리가 해왔던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 믿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신념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이기도 하다. 우리는 불과 몇 십 년을 살지 못하고, 겨우 몇 주 전에 일어난 일도 가물가물 기억나지 않는 필부에 불과하며, 지금 당장의 세상에는 납득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하지만, 분명 우리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세상은 좀 더 나아지고 있다. 그러한 믿음과 신념과 낙관은, 절대 부서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기득권에 맞서기 위해 촛불 하나 달랑 들고 묵묵히 광장으로 모인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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