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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일본의 역사학 (나가하라 게이지, 삼천리, 20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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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일본의 역사학 (나가하라 게이지, 삼천리, 2011.)

Dog君 2017. 5. 6. 17:05


1-1. 이상하게 일본에서 나온 학술서에는 손이 잘 안 간다.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운 문장이 좀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느낌이라서 그렇다. 정도는 덜 하지만 영미권에서 나온 책도 약간 그런 걸 보면 기본적으로는 내 독서근육의 문제겠지만은, 아니 그래도 잘 안 읽히는 건 우짤 수 엄는 건 엄따. 거기에 사학사라니. 수없이 많은 이름과 제목과 주장이 난무하는 사학사의 특성을 생각하면, 내가 이 책을 내 자의로 고를 일은 0에 수렴한다고 하겠다. 직장에서 하는 독서모임이 아니고서는 전혀 읽을 일이 없는 책. 그러니까 눈에 띄는 곳 몇 군데를 옮기고 간단한 인상만 덧붙이기로.


  따라서 일본의 '동양사학'은 중국한테서 배우기보다는 중국사 지식이나 중국사 상을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중국사 연구를 통해 배우는 경향이 강했다. 본디 나이토 고난처럼 '동양 문화'에 강한 신념을 갖고 "동양 문화의 진보 발전에서 보자면 국민의 구별이라는 것은 작은 문제이다"(《新支那論》)고까지 하며 아시아를 하나의 보편으로 파악하려는 역사가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의 연장선에서 중국을 아시아적 정체 또는 그 원인으로서 동양적 전제주의 사회라는 규정성 속에서 팡가하고, 일본과 중국을 대비시켜 상호 이질성을 드러냄으로써 일본이 구미에 접근하고 추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것은 결국 조선과 중국에 대한 멸시나 자국 우월적인 이해와도 이어지며, 전전 일본의 자국중심 사관의 독선과 깊숙이 결부되어 간다. 그러나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쇼와(昭和, 1926~1988년)기에 들어서서이다. (후략) (p. 62.)


2. 스테판 다나카의 일본 동양학의 구조미야지마 히로시의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에서 얼핏 보았던 내용이다. 메이지 유신을 거쳐 형성된 일본의 지식 체계가 어떤 인과를 거쳐 전후 일본의 (전전을 반성하지 않는) 정신세계로 이어졌는가에 대한 이야기.


  남북조 정윤론(正閏論) 사건은 그 직후인 1911년 2월 4일 중의원 의원 후지사와 모토조(藤澤元造)가 국정교과서 (1909년 개정 《尋常小學日本歷史》)가 남북양조병립설을 따르고 있는 것(이 점을 《요미우리신문》이 사설에서 "대역사건을 뛰어넘는 국정교과서의 실수"라며 비난한 것을 받아)에 대한 질문서를 제출하면서 터졌다. 야당인 입헌국민당은 바로 정부 탄핵결의안을 의회에 제안했고, 국수주의 단체의 정부 공격도 끓어올라 교과서 편수관 기다 사다키치(喜田貞吉) 앞으로 "너희들은 실로 고토구 일당이다"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당시 제2차 가쓰다 다로(桂太郞) 내각은 급거 남조를 정통으로 정한다는 정치 조치를 취했고, 2월 27일 기다 사다키치를 휴직 처분했고 사료편찬위원 미카미 산지도 사임했다. 4월에는 북조 천황을 연표에서 빼고 교과서의 정정을 명하여 '요시노(吉野, 남조의 본거지-옮긴이)의 조정'으로 고치게 했다.

(중략)  그러나 이 양조병립 문제는 본래 사실(史實)에 관한 학문적 사안이며, 순서로 보자면 학자들 간의 충분한 토론을 바탕으로 내려진 결론을 역사교육에 반영해야 할 일이다. (중략)

  그런데도 가쓰라 내각은 자신의 대응 방식이 학문과 교육의 근간에 관련된다는 점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검토할 시간도 없이 '남조 정통'을 그야말로 정치적 강관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지'(智)야말로 자유와 문명의 근원이라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이래의 이상을 완전히 무시한 절대주의적 결정 방식이었던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로 보자면 이 사건보다 더한 굴욕은 없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 권력에 의해 지배된다는, 본디 있어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길을 열어 준 셈이 되었다. (후략) (pp. 69~70.)


3. 역사적, 학문적 논쟁이 필요한 사안을 정치의 장으로 끌고 가서 포퓰리즘적 판단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작금의 유사역사학이 하는 짓거리가 아닌가.


  학문은 어느 분야도 그렇지만, 문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상대화하고 특정의 가치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사물을 보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역사학은 지배와 피지배, 국권과 인권, 자국과 타국 등 필연적으로 갖가지 대항과 모순 관계를 지니는 현실과 추이를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이 말은 역사의 관점이 '중립적'이라든가 '공평'해야 한다든가 등의 사안과는 다르다. 역사를 보는 사람은 일정한 가치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자면 불가피하게 가치판단에 바탕을 두고 사료와 사실을 선택하므로, 그런 판단과 인식을 다양하게 하고 제기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됨으로써 역사인식의 객관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전의 국가는 자신의 모습을 긍정해 주는 사람에게만 존재를 허용하려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연구를 미리 억제하고 그런 연구가 나타나면 곧 탄압했다.

  그런 조건 아래에서 국가의 억압을 받지 않는 연구란 권력과 국가로부터 가능한 한 거리를 두는 것일 테다. 전전 실증주의역사학의 연구에는 그런 배려에서 주제 설정이 이루어진 사례도 적지 않다.

  물론 역사 연구는 소재가 되는 어떤 사실도 일정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 역사의 언저리에 있는 미미한 사실의 규명과 그 축적 위에 처음으로 기본적인 역사인식과 역사상의 구축도 가능해진다. 그런가 하면 실증주의역사학은 권력.국가.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언저리의 무풍지대에 몸을 둠으로써 자기 학문의 책임을 상실할 위험도 있다.

  무엇을 위한 개별 연구인가. 무엇을 위한 고증인가 하는 역사학의 자성적 회의는 1890년대를 전후하여 실증주의역사학이 성립된 이래 끊임없이 던져졌다. (pp. 139~140.)


4. 한국 역사학의 실증주의적 경향은 흔히 이병도로 대표된다. 이병도라고 하면, 한국 역사학을 식민주의역사학으로 몰아붙이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만악의 근원 내지는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뱀 같은 존재처럼 매도되는데, 어쩌면 이 부분이 실증주의역사학을 위한 나름의 변명이 될 수도 있겠다. 물론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자면, 논문을 위한 논문만 생산하기에 바쁜 연구 풍토를 만들어낸 학진 체제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전전.전시의 국체사관을 어떻게 청산하고 어떤 연구 체제를 만들며 어떤 일본사 상을 창출해 나갈 것인가는 역사학이 국민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지만, 당면 과제로서는 재개된 일본사 교육을 두고 어떤 역사교과서(초.중학교)를 만들 것인가가 가장 절박했다. 특히 먹칠한 교과서(패전 직후 기존 교과서의 군국주의적 기술을 삭제해서 사용-옮긴이)는 역사학.역사교육에게는 한없이 비참하고 굴욕적인 사태였다. 학문과 교육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시녀가 되었던 사실을 다른 나라로부터 지적받은 셈이었다. 문부성도 역사 교과서 편찬을 서둘러서 1946년 9월 《나라의 발자취》(くにのあゆみ)를 발행하였는데, 신화 대신에 처음으로 고고학적 사실로부터 서술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많은 점에서 전전.전시 '국사' 교과서의 잔재를 짙게 남기고 있어 역사 연구자나 교육자 일반으로부터 엄한 비판을 받았다. (pp. 158~159.)


5. 2017년 5월 10일부터 내가, 한 사람의 역사학도로서, 한 사람의 편사연구사로서,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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