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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유시민, 돌베개, 2018.) 두번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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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유시민, 돌베개, 2018.) 두번째

Dog君 2018. 9. 8. 11:09


0. 책의 안에 대한 이야기를 앞에서 했는데,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있다.


1. 『역사의 역사』가 비판받아 마땅한 점은 내가 열거한 것 외에도 얼마든지 더 많을 것이다. 나 같이 멍청한 연구자가 그저 일독을 했을 뿐인데도 저 정도로 걸려 나오니, 사학사 방면으로 빠삭한 분이 보시면 또 얼마나 더 나오겠는가. 글타. 『역사의 역사』 하나 비판하는 거, 쉽다.


2. 문제는 그 다음이다. 뭐가 틀렸는지 명확하니까 안티테제는 단단하게 세울 수 있는데, 그 다음이 뭐냐는 거다. 『역사의 역사』의 대체물로서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얼마 전에 읽은 『새로운 역사학의 명저를 찾아서』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 독자를 위해서 쓰인 것이기 때문에 한국 독자에게는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많다. 물론 강양구가 추천한 『호모 히스토리쿠스』를 대안으로 내놓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거 말고 다른 주제, 그러니까 설민석이니 누구니 하는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다른 주제에서는 어떤가 하는 거다.


3. 갖가지 종류의 인문학들, 예능인문학이니 대중인문학이니 유사인문학이니 하는 것들(앞으로는 그냥 ‘예능인문학 부류’라고 줄여서 쓰겠다)에 대한 비판은, 너무 쉽고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비판은 가만 내버려둬도 계속될 것이다. 그게 지난 수천 년동안 학문이 해왔던 본래의 임무였으니까.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다음’에 대한 고민 아닐까.


4. 혹자는 더 깊은 연구를 대안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다른 혹자는 또다른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일일이 따져볼 필요는 없겠고, (그에 관해서는 따로 발표를 준비 중이다. 한 달 남짓 남았다. 두둥...) 일단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경험 데이터가 극히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이 근거하고 있던 텍스트 환경이 대대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인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는 높아지는데, 그렇다면 지금 인문학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시장화된 세태를 개탄하는 것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방구석에 앉아서 책만 열심히 보고 있으면, 아니면 연구자들끼리만 둘러앉아서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는 고담준론을 나누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문명文名이 널리 퍼져서 천 리 밖에서도 손님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거라 생각하고 있는가.


5. 과거 언젠가에 그런 시대도 있기는 했던 것 같지만, 글쎄, 그런 시대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인문학의 경쟁력은 결코 강하지 않다. 재미 면에서는 스마트폰에 뒤지고, 논리의 단순함 면에서는 예능인문학 부류를 이기기 어렵다. 논리가 단순한 게 무슨 미덕이냐고? 미덕은 아니지만, 세상을 설명할 때만큼은 그게 강점이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주변의 세상을 설명하고 싶어하기 마련인데 한 두 개의 문장과 키워드로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는 예능인문학 부류가 여기에 정확히 호응한다.


6. 이 이야기에서 주어를 ‘인문학’으로 바꾸면 '인문학이 과연 세상을 설명하는 유효한 도구인가?'라는 질문이 된다. 이걸 다시 좀 더 능동형에 가깝게 바꾸면 ‘인문학은 자신의 성과를 충분히 사회화하고 있는가?’가 된다. 1980년대에 한국역사연구회가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을 말했을 때, 거기에는 명백히 역사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하고 더 낫게 바꿀 수 있다는 전망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역사학과 인문학은 한국 사회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설명할 때 인문학을 직접 인용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설민석을 읽고 최진기를 보는 것이 그냥 단지 웃기고 좀 재미있어서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7. 어쩌면 역사학은 그저 비판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학술발표에서도 ‘토론’이란 곧 ‘비판’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계에서는 그래도 된다. 학술발표라는게 어차피 그런 비판을 기꺼이 듣기 위해 마련된 자리인 거고, 듣기 싫으면 그냥 안 들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예능인문학 부류에 대해서까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그것은 곧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나는 그래서 최근 들어 ‘대중화’라는 말이 살짝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대중화’라는 말에 더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학문적 엄정성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분석의 깊이는 더 얕게 하며 퍼포먼스의 성격을 더 강화하는 등의, 뭐랄까 일종의 ‘타협’ 비슷한 뉘앙스가 묻어있는 것 같고,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거만하다는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대신 ‘사회화’라는 단어가 좀 더 나은 것 같다. 역사학이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자신의 성과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8. 그러면 대안이 뭔데? 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나도 모른다. 내 말은, 모르기 때문에 뭐든 해야 한다는 거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경험 데이터’라니까요. 뭐가 맞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는 거다. ‘비판’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 연구자가 머리 싸매고 새롭게 내놓아야 하는 것은 ‘다음’에 대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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