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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독자를 찾아서 (이성규, 스리체어스,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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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독자를 찾아서 (이성규, 스리체어스, 2018.)

Dog君 2018. 8. 22. 09:47


1. 저널리즘과 역사학은 닮은 점이 있어 보인다. 텍스트 생산을 독점하면서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SNS와 팟캐스트와 유튜브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각자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 중인데, 그런 와중에 골라든 책.


2.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100쪽 안팎인데, 장과 장 사이의 공백이나 앞의 차례나 속표지에 몇 페이지 떼어준 것까지 빼면, 좀 길게 쓴 논문 2~3편 정도 길이 밖에 안 된다. 그러다보니 주장은 있으되 구체적인 사례나 논증이 약간 부족해서, 독자 입장에서는 좀 더 설명을 들었으면 싶은 느낌이 든다. 주장은 명확한데, 지면이 부족해서 충분히 설명을 못 들은 느낌이랄까. 저자가 내 앞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꽤 있다.


3. 전통적인 지식 생산방식으로는 지금의 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는 큰 주장부터, 수용자에게 친화적인 방향으로 방향키를 돌려야 한다는 작은 주장까지, 책 전체의 주장에 대해 대체로 동의한다. 수익모델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거나 하는 것은 눈에 좀 걸리지만, 내 입장에서는 전체 논지에서 큰 걸림돌이 아니다. 다만 이 책의 주장을 ‘저널리즘/역사학 전체’에 대한 방향 전환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저널리즘/역사학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쪽이 아니라, 변화하는 플랫폼에 대응할 수 있도록 텍스트의 다양성와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변화는 엄밀히 말해 플랫폼의 변화인데, 이러한 변화는 불과 몇 년 뒤에는 또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저널리즘/역사학이 갖춰야 할 미덕은 다양성과 그에서 비롯하는 유연성이지 변화하는 플랫폼에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네축구의 전략은 아니다.


4. 변화하는 텍스트 환경에 대한 저널리즘의 고민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지난 번에 읽었던 『뉴스가 위로가 되는 이상한 시대입니다』도 그렇고, 경청할만한 주장이 많다.


(전략) 기계 복제에서 디지털 복제 시대로 넘어가면서 정보는 폭증했다. 디지털 기술은 미디어 진입 장벽을 낮췄고, 자율성과 다양성을 갈망하던 대중은 이를 마음껏 향유했다. 대중은 스스로 매체를 만들고, 메시지를 유통했다. 정보 습득의 경로 의존성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엘리트들의 계몽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의 원심력은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면서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기대에 역행하며 효율적 통제에 집중하던 대중 매체는 점차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추락하던 대중 매체의 신뢰도는 디지털 단계어선 급전직하하는 수모를 겪었다. (중략)

  점멸적 존재로서의 개인 혹은 대중에게 획일적인 정보는 무용하며 무가치하다. 엘리트의 소비나 통치 제어를 위한 입에 발린 교화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 유용하며 그들의 권력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맞춤형 정보가 절실하게 부상하는 이유와 근거가 여기에 있다. 연결에만 주목한다면 여전히 획일적 정보의 생산에만 집착하겠지만,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들의 다양한 관심과 이익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 연결성과 개인화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pp. 19~20.)


  점멸적 개인이라는 새로운 독자에 빠르게 대처하면서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선점한 것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포털과 SNS 같은 플랫폼 사업자들이었다. 이제 언론사는 포털과 SNS의 도움 없이는 사용자 개개인에게 도덜하기 어려운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후략) (p. 27.)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뉴스는 원자화된 형태로 유통된다. 원자화된 뉴스는 그 자체로 가치를 보전하기 어렵다. 외부 플랫폼에 의존할수록 자체적인 정보 서비스 구성은 어려워진다. 뉴스 자체의 상품적 성격에 집착할수록 미디어의 미래는 나락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후략) (p. 35.)


(전략) 기사 역시 다르지 않다. 독자들의 몰입을 자극하기 위해 다양한 문맥적 장치를 심어 놓고 독자들의 주의를 기다린다. 몰입과 상호 작용성은 서로를 부추기고 자극하며, 이야기의 힘을 증폭한다. 이런 모든 과정을 가리켜 스토리텔링이라고 부른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서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와 이야기하기, 이야기판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이야기판에 따른 이야기의 변주까지도 포함한다.

(중략)

  청자의 관여를 배제하고 참여를 차단해 온 역사는 SNS 등의 새로운 플랫폼에 의해 뒤집혔다. 디지털에 밝은 실리콘밸리의 기술 전문 그룹들은 새로운 이야기판을 만들어 더 쉽게 청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고, 기사라는 딱딱하고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술적 형태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을 낮췄다.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는 설화가 구연되는 사랑방과도 같은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pp. 48~49.)


  단순한 해법은 뉴스가 다시 물질성과 결합하는 것이다. (중략)

  잠시 애플의 사례를 살펴보자. 애플은 콘텐츠와 물질성의 결합을 포기한 적이 없다. 음악의 탈물질화가 진행되는 순간에도 애플은 아이팟으로 재물질화를 실행했다. 음반에서 뛰쳐나간 음원을 기기로 재결합하면서 독창적인 논리적 레이어로 서비스를 재구성했다. 애플 수익의 대부분은 아이폰, 아이패드, 맥 등 하드웨어에서 만들어진다. 가치 실현이 어려운 비트화된 음원을 물질성을 갖춘 미디어와 결합시킴으로써 수익성을 높여 온 것이다. (pp. 54~55.)


  이제 저널리즘이 가야 할 방향을 분명해졌다. 붕괴한 지점에서 신뢰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중략) 수용자들은 뉴스도 신뢰하지 않지만 페이스북이 뿌려 대는 정보의 배열 방식도, 네이버 머신러닝의 알고리즘도 믿지 않는다. 뉴스를 비롯한 정보에 대한 불신은 기술에 대한 회의감으로 점차 번져 가는 중이다.

  저널리즘을 위기에서 구해 내기 위한 두 가지 과제가 저널리스트들에게 주어졌다. 그 한 가지는 수용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다. 전자가 수용자들에게 도달하는 전략이라면, 후자는 수용자와 교감하기 위한 조건이다. (후략) (pp. 92~93.)


  그러나 이제 저널리즘의 전통적인 정의는 새로운 기술적 환경으로 도전받고 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교양 있는 시민을 양성한다는 전통적 저널리즘의 정의와 역할론은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 비춰 보면 빈틈이 적지 않다. (중략) 상대적으로 정보량이 적고 무지했던 수용자들에게 지적인 우월성을 바탕으로 교양과 교육을 제공하고 진리의 교리를 설파하던 기존의 저널리즘은 정보량의 폭증 시대엔 철 지난 교만에 불과하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저널리즘은 강의가 아니라 대화로 정의돼야 한다. 강의가 일방향성을 상징한다면 대화는 인터넷으로 파생된 기술적 조건의 특성을 상징한다. 저널리즘이 대화로 정의되기까지 두 가지의 조건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수용자가 생산자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전통 기자와 시민 간의 협업이 필수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특정 영역에서 기자보다 더 우월한 지적 교양을 지닌 시민들이 저널리즘에 대한 회의를 품고 생산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저널리스트들은 현명한 시민들과의 대화와 협력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밖에 없게 됐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인터넷으로 시작된 미디어의 인터페이스 변화가 대화를 촉진하고 있다.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상호 작용성을 갖추고 있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속성에서 출발해 다양한 형태의 인터랙션이 비교적 손쉽게 구현됐고, 수용자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후략) (pp. 9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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