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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근현대 음식 (주영하,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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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근현대 음식 (주영하,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Dog君 2021. 5. 21. 00:27

 

  하루 세 번, 매일 먹는 밥에도 길고긴 역사와 문화는 켜켜이 쌓여있다. 밥 벌어먹는 일상은 늘 지겹지만 그 시간과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 그 일상도 조금은 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대단한 고준담론이나 복잡한 사료검증도 좋다만, 가끔은 이렇게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 좋을 때가 있다. 이런 책 한 권 읽어두면 어디 가서 아는 척하며 한 마디 거들기도 좋고.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내는 '서울문화마당'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다 재미있다. 무엇보다 주제가 굉장히 다양하다. 왕실 혼례, 제례, 음식, 복식, 주택 정도까지는 그냥저냥 끄덕끄덕했는데, 최근에 야구, 농구, 배구까지 나오는 거 보고는, 야 이거 진짜 대단하구만... 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다음에는 또 뭐가 나올랑가) 서울역사편찬원(옛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은 어째 이리 재미있는 책들을 많이 내나 모르겠다.

 

  이 카페가 동아시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88년 4월의 일이다. 도쿄의 우에노에 '가히사칸可否茶館'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생겼다. 비록 4년 후에 문을 닫고 말았지만, 이곳은 커피 하우스이면서 동시에 술집으로 영업을 하였다. 사실 '가히可否'는 커피를 가리키는 일본식 한자어이다. 거기에 '사칸茶館'이라는 말까지 붙인 이유는 당시 일본인들 중에서 커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곧 커피를 마시는 '다관'이라는 의미로 이 상호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 커피 하우스는 점차 '카페'라는 이름으로 변하였다. 결국 카페는 커피와 술, 그리고 여자 웨이트리스가 남자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그 정체가 바뀌어버렸다.
  20세기 초반 서울에서도 카페는 커피 하우스이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바bar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920년대 말부터 여자 웨이트리스를 두고 남자를 접대하는 일본식 카페가 서울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64~66쪽.)

 

  이렇듯 조선총독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1926년 즈음에도 조선인은 여전히 음력 설날을 쇠고 있었다. 당연히 설이라는 이름도 신문에 떳떳하게 등장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설이라는 이름이 신문지상에서 사라진다. 심지어 떡국을 먹지 말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쌀밥 먹기도 어려운데 왜 아깝게 떡국을 먹느냐는 주장이었다. 이 모두 전쟁에 미쳐버린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114쪽.)

 

  1945년 연말이 되자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던 서울의 장충동·충무로·필동 일대에는 적산 가옥 천지가 되었다. 평양이 공산화의 길로 가는 모습을 일찌감치 눈치 챈 평안도의 부자들은 이 적산 가옥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사서 이사를 왔다. 그들이 이 일대에 자리를 잡자 냉면을 비롯하여 만두를 판매하는 면옥도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장충동과 충무로, 그리고 필동 일대에 평안도식의 대만두와 냉면을 판매하는 '면옥'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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