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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 (이희근, 따비,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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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 (이희근, 따비, 2018.)

Dog君 2021. 5. 21. 00:35

 

  백정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 내의 외국인이 한반도에 정착한 시기는 대부분 고려 시대까지 소급된다. 일부는 동화되었지만 대부분은 조선 시대에도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 방식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한 한반도에는 그 이전부터 다양한 인종이 끊임없이 유입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2쪽.)

 

  이들 정보 중 '한족'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대목이 특별히 주목된다. 손영종은 논문에서 목간 작성 당시인 중국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초원 4년에 "낙랑군의 총인구 28만여 명 중에서 한족 인구는 4만 명 정도로서 전체 인구의 약 14퍼센트밖에 안 되며 원 토착주민은 약 86퍼센트였다고 인정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낙랑군 초원 4년 호구부'에 따르면 당시 낙랑군의 인구는 4만 6,000여 호에 28만여 명이었고, 낙랑군 총인구 중 '원 토착주민'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총인구 중 한족 비율이 4만 명에 달하는 14퍼센트를 점했다는 수치는 상식적으로 볼 때 아주 높은 편이다. 물론 "이 4만 명도 낙랑군을 설치하고 63년 후 통계이므로 처음 낙랑군 설치 당시 한족 계통 주민 수는 1만 5,000명에서 2만 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라는 손영종의 주장대로, 이런 비율은 기원전 108년에 낙랑군이 설치된 뒤 지속된 이민移民의 결과다. 그럼에도 총인구 중 한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높았다.
  이와 같은 통계는 한족의 비율을 아주 낮게 본 종래의 견해와는 크게 다르다. 종래 학계에서는 낙랑군에 한인漢人이 많이 거주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중국의 서북부 등 다른 식민지에는 대규모 사민徙民을 추진하거나 둔전屯田을 설치해 그것을 경작할 인구를 유치한 기록이 남아 있지만, 유독 낙랑군으로 사민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없다는 데 근거를 둔 견해였다. (18~19쪽.)

 

  한편, '한족'과 '원 토착주민'의 구분은 결코 고정적인 분류가 아니었다. 한 제국의 만이蠻夷 정책의 특징 중 하나는 한인과 잡거雜居, 즉 섞여 살게 했다는 점이다. '한족'과 '원 토착주민'을 분리하여 거주시키지 않았던 상황에서 양자 간의 통혼通婚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들의 문화적 유사성을 고려하면, 낙랑군 설치 이전에 중국에서 망명해 온 유민들과 낙랑군 설치 후 이주해 온 한인의 통혼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부모 중 한 쪽만 진인이면 자녀는 진인으로 간주한 진대秦代의 규정이 이어졌다면, '한족'과 '원 토착주민' 간의 통혼 이후 자손은 '한족'으로 분류되었을 수도 있다.
  요컨대, '낙랑군 초원 4년 호구부'에 기입된 '한족'은 첫째, 낙랑군이 설치된 뒤 지속적으로 본토에서 사민된 자들이다. 또한, 무제 말기 이후 계속 이어진 흉년 등으로 발생한 대규모의 유민도 '한족'으로 등록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밖에도 통혼과 같은 방식에 따라 '원 토착주민' 중 일부도 '한족'으로 등록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고 해도, 낙랑군 총인구 중 14퍼센트라는 한인의 수치는 너무나 높다. (23~24쪽.)

 

  광무제가 낙랑군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낙랑군을 복구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한반도가 오늘날의 석유나 천연가스처럼 전략 물자에 해당하는 목재의 주요 공급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최대의 기간산업인 목재 사업장이 한반도에도 위치해 있었기에 일자리를 찾는 중국인의 이주 행렬이 이어졌다. 그 결과, 낙랑군의 전체 인구 중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비정상일 정도로 높았다. 곧 살펴보겠지만, 변방 중 변방인 낙랑군이 무려 400년 이상 장기간 지속할 수 있었던 요인 역시 목재 산업과 관련이 있었다고 본다. 낙랑군의 존속 기간 동안 왕조가 무려 다섯 차례나 교체되었을 정도로 중원의 정세는 불안정했는데도 말이다. (31~32쪽.)

 

  해방 후 남한 학계에서는 위만이 중국인이라는 일제 관변 학자들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첫째, 위만이 관리로 있던 당시 연나라의 종족 구성이 다양했다. 둘째, 그가 망명 때 조선인의 풍속인 북상투[魋結]를 틀고 오랑캐 옷[蠻夷服]을 입었다. 셋째, 한 글자로 된 중국식 국호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동시에, 위만 정권에서도 여전히 토착인, 즉 옛 조선인 가운데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 많았던 사실로 보아 고조선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다. 이것이 위만이 조선인이라는 근거라며 주장했다. 위만이 조선인이라는 견해는 이후 국내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북한 학계의 주장도 남한 학계의 견해와 대동소이하다. 다시 말해, 남북한 학계는 공히 위만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위만조선도 당연히 한국사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정황 근거만을 가지고 위만을 조선인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그다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
  결론적으로, 국호 계승, 토착인 중용 등 위만 집단이 토착 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한 조치는 그들의 세력 기반이 조선계 주민을 완벽하게 장악할 만큼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취한 무마책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위만은 조선계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계 이주민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56~58쪽.)

 

  이렇게 마한과 변진한의 주민 계통이 다른 만큼 그들 사이에는 생활 방식 등 문화상의 차이가 존재했다. 따라서 진한의 구성원이 진나라 출신의 망명자라고 분명하게 서술한 《삼국지》 〈한전〉의 기록을 부정한 채 삼한의 주민 계통이 모두 원주민이라는 주장이나, 마한의 구성원은 토착민이지만 변진한의 구성원은 북방계 이주민의 후예라는 견해는 모두 비학문적인 자국사自國史 중심주의적 편견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84쪽.)

 

  기록은 낙랑과 대방 두 군의 공격을 받고 나서 한韓이 멸망했다고 했지만, 한의 일부 지역만 차지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점령 지역도 진한 8국을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종 정착지가 아닌 진한의 이전 영역으로 보인다. 두 군의 한 지역 침략은 대방군이 설치된 뒤, 즉 3세기 초 이후에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강 중상류 유역에 정착했던 진한의 나머지 주민도 영남 일원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포로로 잡혔든 자의로 남았든, 진한인 중 일부는 두 군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훗날 진한 사람들이 낙랑인이라고 부른 부류가 이들인데, 이 낙랑인 역시 진한의 후예인 신라로 망명해 왔다. 이 최후의 이주는 고구려가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할 때 일어났다. 당시의 망명 상황은 "기림이사금基臨尼斯今 3년 봄 3월,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양 국[군]이 귀순해 왔다."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한의 잔존 세력인 낙랑인을 포함해 두 군의 구성원 상당수가 이때의 귀순 대열에 합류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도 낙랑군의 주민은 대거 한韓의 영역으로 이주했다. "환제·영제(147~189)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漢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이 한국韓國으로 흘러들어갔다(《삼국지》, 〈한전〉)."라는 기록이 이런 정황을 시사하고 있다. 문헌 자료에는 한 차례만 나오지만, 한漢 군현의 구성원은 자이든 타이든 간혹 한의 판도로 이주해 왔다고 보인다. 한 군현이 존속했을 때에도 한韓으로 이주한 수가 많았다고 하니,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점령당한 후 발생한 유민의 규모는 짐작할 만하다. 이로써 진국의 후예를 비롯한 낙랑군 주민의 이주 여정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고 판단된다. 물론 고구려 영토에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백제 쪽으로 이주한 부류도 당연히 있었다. (91~93쪽.)

 

  목곽 무덤이 영남 지역에 출현한 시기는, 앞서 살펴본 대로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점령한 뒤 위만조선 출신의 진나라 유민 상당수가 남하하기 시작한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한마디로, 진나라 유민이 영남 일대에 정착한 뒤 이곳에도 자신들의 고유한 무덤 양식인 목곽묘를 조성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중부 지역에서는 기껏해야 한 유적에서 목곽묘 몇 기가 발굴되고 있지만 영남 지역에서는 대체로 유적 단위로 목곽묘가 조성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목곽묘 주인공의 집단 이주를 상정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97쪽.)

 

  현재 학계는 대체로 영동 7현은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에 있었으며, 영서 5현은 평안남도와 황해도의 동부 산악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른바 영서든 영동이든 이들 지역의 주요 구성원은 예인, 즉 예맥족이었다. 당시 예맥족의 거주지가 영서 5현 및 영동 7현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단지 이들 지역만이 낙랑군의 관할이었다는 표현일 따름이다. 낙랑군 시절이나 그 이후에도 예맥족은 만주 지역은 물론, 낙랑군의 영역 밖인 한반도 북부와 중부에도 폭넓게 거주하고 있었다. 5세기 초의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나오는 '신래한예新來韓穢'라는 구절은 광개토왕이 396년의 백제 원정 뒤 포로로 잡아온 한강 이북 백제 지역민을 가리키는데, 한인韓人뿐 아니라 예인穢人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백제의 세력권인 한반도 중부에도 예인, 즉 예맥족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2~123쪽.)

 

  요컨대, 말갈족의 원래 영역은 신라의 북방, 즉 남쪽으로는 최소한 삼척-충주 일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말갈족(예맥족)은 백제의 북방은 물론이고 그 동방에도 위치했다는 판단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갈족(예맥족)은 중국의 동북 지방을 제외하고도 한반도 북부와 중부의 상당 지역을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이처럼 광범위한 예맥족의 생활 영역은 전성기 고구려의 영역과 거의 일치해, 고구려의 종족 기원이 예맥족이라는 역사학계의 상식과 부합한다. 예맥족의 한 분파인 고구려족이, 초기에는 예맥족의 영역 내에 자리한 소왕국에 불과했지만 대체로 광개토왕 시절에 예맥족 전체를 통합해 그 생활공간마저 모두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128쪽.)

 

  한반도의 예맥이 고구려의 세력권에 속했다고 해도,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고구려 국왕인 평성平成이 예와 짜고 한강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聖王 26년)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예맥은 고구려군의 예하가 아니라 독립 부대를 유지한 채 백제 공격에 참전했다. 이런 상태가 아니었다면, 《삼국사기》 편찬자는 '고구려군이 공격했다.'라는 식으로 기술했을 터이다. 예맥이 최소한 자치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이는 대목이다. 예맥은 자원 확보를 위해 독자적으로 백제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 (132쪽.)

 

  3세기의 한반도 정보가 담긴 《삼국지》 〈동이전〉의 〈한전〉도 《후한서》 〈한전〉과 거의 동일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이 《삼국지》 〈동이전〉을 토대로 기술되었다는 학계의 견해를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삼국지》 〈한전〉의 해당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한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000리쯤 된다. 한에는 세 족속이 있으니, 마한.진한.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 지금도 진한 사람의 머리는 편두褊頭이고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하기도 한다. ......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

  이 인용문도 《후한서》 〈한전〉과 마찬가지로 왜인 세력이 삼한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정황을 알려준다. 예컨대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라는 구절은 왜가 한반도 밖이 아니라 한반도 안쪽, 즉 한의 남방인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고 명시한다. 또한, "진한의 근처에 왜가 있다[近倭]."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라는 구절도 왜가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진한과 독로국 인근에도 있었다는 정황을 전해준다. 특히, 《삼국지》 〈한전〉은 변진, 즉 변한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을 언급하고 있는데, 소국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할 정도로 신빙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146~147쪽.)

 

  이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왜 계통 고분'이 한반도 남부 일대에도 산재해 있다. 지금까지 왜 계통 고분은 경남 거제도에서 전북 고창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40여 개가 조사·보고되었다. 특히 영산강 유역과 해남 반도, 그리고 경남 해안 지역과 남강 유역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이곳의 왜 계통 고분은 동그란 형태, 즉 원형 무덤인 원분圓墳과 전방후원분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전방후원분은 영산강 유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며 원분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산재해 있다. (153쪽.)

 

  (...) 앞서 언급한 대로,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왜 계통 고분 다수는 재지 수장층의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단독으로 조영되어 있다.
  이렇듯이, 단독 고분이든 고분군이든, 그 무덤 양식이 전방후원분이든 원형 고분이든, 왜 계통 고분의 주인공은 왜인이라고 판단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 일대에 산재한 이들 왜 계통 고분의 대부분이 단독 조성으로 끝난 이유는 무엇일까? 또, 일부는 연속 조성되어 고분군을 형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독 고분을 조성한 주인공은 주변의 이른바 재지 세력에게 흡수된 왜인 집단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고유한 묘제를 버리고 새로운 양식을 채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변의 재지 세력을 압도했거나 조상의 묘역을 유지할 때까지 최소한 기존 세력을 그대로 유지한 왜인 집단은 고분군을 형성했다고 본다. (158~159쪽.)

 

  이처럼, 당시 한반도 남부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운 강력한 정치체였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에 관한 기사는 이런 추세를 시사해준다. 왜 관련 정보는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혁거세 8년(기원전 50)부터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450여 년 동안 49회에 걸쳐 왜 관련 기사를 전하고 있다. 그중 33회가 왜의 신라 침략 기사다. 왜가 백제 및 신라와의 역학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정보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고 있으므로,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165쪽.)

 

  현재 가야 영역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애초에는 왜와 가야가 공존하다가 왜가 먼저 패권을 장악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오히려 가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비록 가야의 통제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반도 남부에 존속해온 왜라는 정치체는 어느 정도 독자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은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과 이어져 있고[北連靺鞨], 남으로는 왜인과 접해 있습니다[南接倭人]."(《삼국유사》, 황룡사9층탑)라는 자장의 언급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내용은 636년에 자장이 신인과 대화하던 중 나오는 말이니, 이때까지도 왜는 한반도 남부에 잔존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68~169쪽.)

 

  5세기 전후 고구려, 백제, 왜 등은 중원 왕조에 조공하면서 경쟁적으로 작호의 제수를 요청했다. 이 중 중심 작위가 바로 장군호將軍號다. 본래 장군호는 중원 본토에 한해 임시로 병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수여하고는 했는데, 전한 때부터 상설직이 되었다. 이후 많은 종류의 장군호가 수여되었으며, 특히 남북조 시대에는 수십 종의 새로운 장군호가 등장했다. 게다가 도독이 치소治所가 있는 중심 주州의 칙사勅使를 겸하게 되면서, 도독은 군사권과 함께 행정권마저 장악했다. 이런 겸직과 남설濫設은 중앙의 통제가 취약해진 남북조라는 대분열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왜 왕 진이 중국 남송에 조공하면서 작호를 요청한 이후 일본 열도의 왜 왕들은 주기적으로 중국 남조 왕조들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요청했다. 가령 왜 왕 진과 제濟는 각각 438년과 451년에 남송에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장군安東將軍 왜국 왕'이라고 자칭하면서 같은 작호의 사용을 요청했다. 당시 남송은 백제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빼는 대신 가라를 추가해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장군 왜국 왕'이라는 작호를 왜 왕 제에게 수여해 한반도 남부의 연고권을 인정해주었다. 왜 왕 무武도 478년에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7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 왕'을 자칭하면서 같은 작호의 승인을 요청했다. 남송은 이번에도 백제를 제외한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 왕'이라는 작호를 제수했다. (169~170쪽.)

 

  5세기 들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다시피 한 고구려의 독주를 방치할 수만은 없었던 왜 왕들은 과거 한반도 남부에서 누렸던 기득권을 내세워 이들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중국 왕조에 줄기차게 요구한 것이다. 구체적인 성과가 바로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라는 장군호다. (176쪽.)

 

  실제로 《일본서기》 흠명기의 일본부 관련 기사에서는 왜가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치적으로 다스렸다는 정보, 즉 세금 징수, 노동력 징발 등이 행해졌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관청이나 기관으로서 부의 실체를 나타내는 정치·행정적 지배와 관련 있는 내용이 없다. 다만, 흠명기에 나오는 정보는 모두 532년 신라에 멸망당한 남가라, 즉 금관국 등 남부 가야 제국의 부흥 문제 등을 둘러싸고 나머지 가야 제국의 왕들과 보조를 맞춘 외교 활동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일본부가 가야 제국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통제를 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고, 일관되게 가야 제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보이는 일본부 관련 인사들 역시 야마토 조정의 명령이 아니라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활동했다. (181~182쪽.)

 

  (...) 여기서는 신라에 온 원군을 왜병이 아닌 가야병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측에서는 왜를 가야의 예속 정치체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서기》의 일본부 소속 구원병을 가야병으로 기록했으며, 그 기록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등재되었다고 판단된다.
  한때 한반도 남부의 왜인 세력은 가야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라를 압도할 정도로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이런 왜도 고구려와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해 큰 타격을 받아 크게 약화되었다. 마침내 452년 무렵, 한반도의 왜 세력은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금관가야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 이후 금관국은 이들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다. 가야가 이들 왜인을 직접 통치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면, 간접적으로 통제할 기구라도 필요했다고 판단된다. 가야의 왜 통제기구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가 아니었을까. (188쪽.)

 

  그럼 왜 '기자산동설'이 아니고 '기자조선설', 즉 기자동래설이 퍼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자가 잠시 중국의 동북 지방, 즉 랴오닝성에 망명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기자와 그 일족이 대릉하 연안 지역에 잠시 동안 거주한 뒤 동북 지방에는 기자가 망명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기자 일족의 주력은 산동 지방으로 이주했을지라도 그 일부는 고조선 지역으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고조선 주민 가운데 기자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 (202쪽.)

 

  이렇게,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전설, 이른바 '기자동래설'을 토대로 작성된 한대 이후의 각종 문헌은, 기자를 조선과 관련해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시기인 기원전 11세기에는 조선에 관한 정보가 중원에 전혀 없었다. 중국 문헌 자료 가운데 조선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최초의 문헌은 《관자管子》와 《산해경》이다. 이들 문헌이 전국 시대(기원전 403~221)의 저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한대(기원전 206~서기 220)에 편집된 책이다. 다시 말해, 이들 문헌에 담긴 고조선에 관한 정보는 한대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대의 문헌 자료에서 비로소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언급이 등장하는 것은 한대 지식인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나라 지식인들이 기자동래설을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라 무제는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하지만 토착 세력의 저항으로 진번, 임둔 두 군은 설치 20년 만에 폐지되었고, 그 일부 지역은 기원전 82년에 낙랑군과 현도군에 통합되었다. 현도군 또한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75년부터 유명무실해져 결국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중원 왕조는 옛 조선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면 무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대 명분론에 입각한 이념적 통치 방식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상나라 멸망 후 기자의 막연한 행적에 착안해 조작해낸 논리가 바로 기자동래설이었다. 다시 말해, 기자가 동으로 와서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 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중원 왕조에 사대의 예를 수행해야 한다는 얘기다. 당시 동방의 유력 세력으로 등장한 조선을 항구적으로 통제할 목적으로 중원 출신인 기자와 그 후손을 조선의 통치자로 둔갑시킨 기자동래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조작의 기저에는 중국이 곧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205~206쪽.)

 

  이제,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일연과 이승휴는 왜 자기들 역사의 출발이 고조선이며 그 시조는 단군이었다는 단군상을 창출했을까? 바로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시절을 원나라의 후원으로 무신 정권을 마감하고 왕정 회복을 이룬 고려 왕조가 계속 번영할 절호의 기회로 파악했다.
(...) 사실상 고려는 원나라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 따라서 이승휴 등 당시 지식인은 이런 식민 통치와 다름없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시정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 그 결과, 일연과 이승휴는 새로운 단군상을 창조했다. 아울러 고려가 기자의 교화로 중국에 뒤지지 않는 문화 수준을 가진 소중화라는 역사상도 창안했다. (...) (213~214쪽.)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식이 출현한 대한제국 시기에 한반도는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 일제의 국권 침탈은 타자와 구별되는 자아에 대한 의식을 뚜렷하게 했다. 한편,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되어 구성원 간의 차이는 점차 희미해졌다. 이런 와중에 민족의 존재가 발명되고, 그 결과 '군주' 대신 '민족'이 국가의 중심 개념으로 부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 구성원을 결속시키는 상징이 필요했는데,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공유된 존재가 바로 기자와 단군이었다. 이 중 기자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 이 무렵부터 기자는 아예 격하·배제되고 단군의 위상은 그만큼 확고해졌다. 이제 단군은 민족의 시조는 물론이고 민족의 상징이자, 현실에서는 독립 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29~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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