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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 (김태호 엮음, 역사비평사,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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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 (김태호 엮음, 역사비평사, 2018.)

Dog君 2021. 5. 21. 01:15

 

  나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는 와중에, 무척 훌륭한 선행연구 모음집을 발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 국민의 과학화운동'을 공식 제창한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소상히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그와 관련된 사업이 과학기술처 주도로 추진되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전 국민의 과학화운동'이 제시되었다 해도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과학기술처가 추진하던 예전의 사업이 '전 국민의 과학화운동'으로 불리며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과학기술 풍토 조성사업의 규모가 이전보다 커지고 국가 차원의 주목을 좀 더 끌었을 뿐이다. 이처럼 '전 국민의 과학화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주창으로 그 이름이 공식화되긴 했으나 그 주요 사업은 과학기술계에서 이미 벌이고 있던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이 시기 과학기술 발전과 관련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항상 주도적 인물로 거론되곤 한다. (...) 그런데 이들 사업 추진에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행위자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최고 통치자가 중요하게 관여되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 당시의 과학기술 활동을 충실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크다.
  그러므로 1960~70년대 과학기술 추진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로 내세우는 '과학대통령' 담론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 최고 통치자의 지나친 강조와 그의 역할에 대한 찬사는 이 시기 과학기술의 또 다른 행위자들인 과학기술처, 과학단체, 과학기술자들의 활동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문제를 지닌다. (...) (김근배, 「박정희 정부 시기 과학기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30~31쪽.)

 

  (...) 사실 한국 과학기술의 성장은 잘 조직된 하향식 정책 수립 및 집행의 산물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자와 정부의 상호작용,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있던 국제 환경이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정부가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을 쏟기 이전부터 과학기술 진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불러일으킨 과학기술자들의 '탈식민주의 갈망'이 존재했으며, 그 열망이 정부 정책망에 포섭되어 구체화되면서는 국제적 협력이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자들의 구상은 정부의 의도에 맞추어 변용 및 적응을 거쳐야 했다.
  흔히 한국 정부가 과학기술자들을 동원했다고 설명되지만, 그 이면에는 과학기술자들이 정부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분야나 기관의 위상을 강화시키려 했던 전략 역시 존재했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의 과학기술 발전을 다룬 여러 연구들은 과학기술자들이 과학의 중립성이나 순수성을 내세워 체제의 요구에 저항하기보다, 과학 활동을 하기 위해 정권이 요구하는 바를 수행하거나 더 나아가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권을 적극 활용하여 해당 분야, 연구소, 새로운 사업의 성장을 이끌어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한국 과학기술자들이 정부와 대등한 관계에서 자신들의 기획을 실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과학기술자들이 정부의 정책이나 지도에 수동적으로 따라간 것만도 아니었다. (...) (문만용, 「'전 국민의 과학화운동' - 과학기술자를 위한 과학기술자의 과학운동」, 163~164쪽.)

 

  (...) 『사상계』의 경제 발전 논의를 이끌었던 인사들 중에는 박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안 과정에 참여하거나 직접 고위 경제관료로 진출한 이들도 있었다. 『사상계』의 유일한 과학기술계 편집위원(1958~1961)이었던 이종진(李鍾珍)도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회의 과학기술 정책 입안 과정에 관여한 데 이어, 1964년에는 경제·과학심의회의의 비상임위원으로 위촉된다. 1965년 기업체 대표가 되어 사임할 때까지 서울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이종진은 4·19혁명 직후 산업기술자들이 결성한 연구모임 '한국산업기술인구락부'의 대표간부를 맡은 바 있다. 이 모임은 민주당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영향을 미칠 것을 염두에 두고 산업 부흥 노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주도하여 과학기술 연구개발과 인력 양성을 조직하고 과학기술과 산업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졌다. 그런데 이러한 구상은 박정희 정권의 발전민족주의 산업화 전략에도 잘 부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산업기술인구락부의 핵심 멤버였던 오원철(吳源哲)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를 거쳐 상공부 과장으로 등용되었고, 1970년대에는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서 박 정권의 중화학공업 정책 수립과 추진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김상현, 「박정희 정권 시기 저항 세력의 사회기술적 상상」, 359~360쪽.)

 

  박정희를 영웅화하고 개발독재 체제를 미화하는 '과학대통령' 신화는 분명 해체되어야 한다. 박정희를 악마화하지 않고 그의 생애와 그가 집권했던 시대의 현대사적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 개인의 기여나 집권 시기 과학기술 정책의 효과가 지나치게 과장된 경우, 혹은 박정권의 과학기술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부작용들을 드러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그와 동시에 '과학대통령' 담론의 형성과 확산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특히 과학기술의 의미, 역할과 목표에 관한 어떠한 인식이 이를 뒷받침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현재 우리 사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 박정희 개발독재 체제에 저항했던 세력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 정치적 행위자들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검토 작업은 당시 저항 세력이 지배적 사회기술적 상상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필자의 잠정적 결론은 다수의 저항 세력 역시 박정희 정권 시기 남한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발전민족주의의 사회기술적 상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김상현, 「박정희 정권 시기 저항 세력의 사회기술적 상상」, 376~377쪽.)

 

교정. 초판 1쇄

30쪽 18줄 : 새로운  것은 (띄어쓰기 두 칸)

193쪽 8줄 : 1973년 떠들썩하게 시작한 -> 1973년에 떠들썩하게 시작한

376쪽 12줄 : 박정희 개인의 기여나 집권 시기 과학기술 정책의 효과가 지나치게 과장된 경우, 혹은 박정권의 과학기술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부작용들을 드러내는 작업은 -> 박정희 개인의 기여나 집권 시기 과학기술 정책의 효과가 지나치게 과장된 경우 혹은 박정권의 과학기술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부작용을 드러내는 작업은

377쪽 6줄 : 발전민족주의 사회기술적 상상으로부터 -> 발전민족주의의 사회기술적 상상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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