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 (서울리뷰, 2021.) 본문

잡冊나부랭이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 (서울리뷰, 2021.)

Dog君 2021. 5. 21. 01:19

 

  아무리 세계가 비틀거려도, 주인공들이, 내 곁의 친밀성이 이렇듯 단단한 한 안전하지 못할 리 없다. 신뢰할 수 있는 손과 손이 연결돼 있는 한,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하지 못할 리 없다. 마지막까지 손잡고 있는 한, 누군가 다치더라도, 마음까지 다 붕괴할 리 없다. 정세랑의 주인공들은 안전핀처럼 안전하다. 성실하고 관대하고 유머러스하다. 끝끝내 제정신으로 공정하고 친절하다. 가장 낙관적인 주인공인 ‘보건교사 안은영’의 말마따나 그들은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다고 생각한다(『보건교사 안은영』). (...) 그들은 일종의 종결자들이다. 악의를 퍼뜨리기보다 악의를 온몸으로 받아내기를 택하는 사람들이다. 남편이 화물 트럭에 치여 의식불명 상태인데도 화물 노조 파업 현장에 도시락을 사 건네고, 언니가 심야 근무 중 돌연사했는데도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돌연사.net’을 만들어 애도의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그런 존재다.
  (...)
  정세랑은 기술과 구조의 개선을 제안하는 대신 근본적인 반성장degrowth의 각오를 건의한다. 자발적 출산 포기와 육식의 절제, 탄소 배출 절감과 소비의 축소가 가능할지를 묻는다. (...) 물론 정세랑도 잘 안다. 파국 이후 재생된 "트라우마 없는 시민들"은 "선량하기보다는 지루한 생명체"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것을(『지구에서 한아뿐』). 일체의 결함과 악행을 피하고 무결의 안전과 도덕성을 열망하다가는 인간 자체를 부정하게 되기 쉽다는 것을. 그렇잖아도 가까운 타인을 혐오하는 대신 비인간을 사랑하고 지구를 염려하는 관계의 기묘한 원근법은 빠르게 확산 중이다. 페미니즘과 동물권과 기후위기에 대한 서적이 나란히 꽂혀 있는 서가는 이제 낯설지 않다. (권보드래, 「밤길을 걷는 법 - 강화길과 정세랑을 따라 길을 잃다」, 42~45쪽.)

 

  0호(창간준비호)보다 살짝 더 두툼해졌다. 글 하나하나가 단단한 것은 여전하다. 그러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자기 독서근육이 어느 쪽으로 발달되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험지 역할로도 쓸 수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아무래도 언어학이나 철학 쪽 글에는 도통 눈길도 안 가고 읽는다 해도 좀체 이해도 잘 안 되는 반면에, 역사 쪽 글은 읽다 보면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더 길게 써도 좋았겠다, 싶은 마음이 자꾸 든다는 것. (한참 재미있게 읽다가, 어? 왜 벌써 끝나? 했다.)

  책을 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내 이야기가 그다지 반갑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쓰는게 살짝 미안하기도 하고 ㅠㅠ) 아마도 이 책은 이른바 ‘고급 독자’를 타겟으로 했을텐데, 각 독자에게는 책에 실린 많은 글 중에서 단 몇 개만이 어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서 시장에 나온 역사책에 대한 진지한 서평을 갈구하는 나 같은 사람은 단 한두 편의 좋은 글만으로도 이 잡지에게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고 또 그런 사람이 충분히 많을 거라고도 생각하지만, 수익구조를 고민해야 하는 편집진으로서는 대중성과 전문성의 절충점을 잡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관점에서 ‘내일을 여는 역사’에 대해서도 기대가 큰데, 이야기 들어보니 그것도 상황이 좀 애매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최근에 개인적으로 몇 가지를 고민하던 와중에, 아래 부분이 범상치 않은 의미로 다가왔더라는, 머 그렇고 그런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

 

  송호근이 방대한 독서를 통해 빨아들인 자양분으로 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 (...) 단 3부작만을 놓고 보면, 이 책은 서재에 앉아 혼자 읽고 생각하여 깨우친 바를 써 내려간 책 같다는 느낌이 들고,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 아닐까 짐작한다. 3부작의 서문에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을 논문으로 게재했다는 언급이나, 초고를 함께 토론한 동료 학자들에 대한 감사 인사가 없다. 물론 집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3부작의 주요 내용을 토론하고도 감사의 글에 적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저자가 그 정도로 진지한 토론을 한 동료 학자들에 대한 감사를 적지 않을 정도로 인사에 인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만일 그가 이 책을 "동굴" 속에서 쓰는 대신 "공론장"에서 토론하며 발전시켰다면 내용이 훨씬 탄탄하고 파급력이 크지 않았을까. (김두얼, 「매끈한 서술과 설익은 통찰 - 송호근 저, 『인민의 탄생』·『시민의 탄생』·『국민의 탄생』」,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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