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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 (조지 이거스, 푸른역사, 1999.) 한번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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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 (조지 이거스, 푸른역사, 1999.) 한번더

Dog君 2021. 7. 4. 23:04

  '포스트post'니 '탈脫'이니 '후기後期'니 하는 접두어가 엄청 유행했던 적이 있다. 문사철 공히 이 말들이 히트를 쳤는데, 모두들 '포스트'를 입에 올리며 호랑이 기운을 얻으려 했고, 인문대 강의실에는 지마켓보다 더 많은 '후기'들이 넘쳐났고, 하도 '탈'이 많이 나와서 인문대 앞마당에 윤문식 김성녀가 매일 같이 마당극 순회공연을 하나 싶고 막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고 의미 없다 뭐 요런 느낌이지만, 그때는 거대담론을 해체한다는둥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문다는둥 해서 와 XX 이거 뭔가 새세상이 오는 건가, 역사학의 근간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는 건가, 그러면 우리 과도 없어지는 거 아닌가 뭐 그런 얘기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워섬기며 놀던/마시고 그랬다. 그 와중에 뭐 식민지근대성론이나 서벌턴연구 같은 것들에도 눈길을 보내고 그랬고. (그래 그런 날들이 있었어... 하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체의 죽음이 어쩌고 거대서사의 해체가 저쩌고 하기에 한국은 너무 후진 동네였다. 이 후진 동네에서 주체를 죽이고 거대서사를 해체하자는 소리는, 한 3번 정도만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바람과자 먹고 구름똥 싸는 신선 말씀이 되기 십상이었고, 결국 어떤 이들은 권력을 해체하려다가 현실권력을 더 강화하는 이야기로 흘러가는 주화입마에 빠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이 완전히 무의미했다고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당연한 전제/편견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역사학의 역할 중 하나라고 한다면, 그런 면에서만큼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기여가 확실했으니까. '계급'이니 '국가'니 '장기지속'이니 하는 거대한 구조에 파묻혀서 드러나지 못했던 무지무지 다양한 결들을 섬세하게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까.

 

  서양사학사 혹은 역사철학 공부를 할 때 꼭 읽어야 할 필수코스 같은 책들이 몇 권 있는데 조지 이거스가 쓴 '20세기 사학사'를 거기서 빼먹으면 좀 섭섭하다. 대략 랑케로부터 시작하는 근대 (서양)역사학의 시작부터, 아날학파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으로 대표되는 사회사의 등장과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도전까지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어지간한 맥락은 다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군더더기를 최소화해서 분량도 길지 않으면서 내용도 단단하다. 한 번만 읽고 말기에는 좀 아깝고 시간 간격을 두고 두세번 정도 읽으면,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내용들이 사골국물처럼 우러나와서 읽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물론 그만큼 내용이 어렵고, 그래서 잘 안 읽힌다는 단점도 있다.)

 

  전체 3부 중에서 근대 역사학의 확립을 다룬 1부와 사회사의 등장을 다룬 2부가 밑줄 긋고 내용 정리해가면서 읽어야 할 부분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도전에 대한 3부는 새로운 학문 조류에 대한 노老 역사학자의 고민을 엿본다는 느낌으로 읽힌다. 자칫하면 학문의 존재 이유까지 부정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한 도전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이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는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학문임을 증명하기 위한 분투의 흔적이라고나 할까.(몇 자 쓰고보니 어마무시하게 추상적으로 글을 써놨는데, 글이 추상적이라는 것은 내가 여전히 책의 내용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따위 수준으로만 겨우 이해하고 있는 걸 보니 나도 아직 멀었다 싶다. 아이고, 부끄럽다. 한참 더 공부하고 나면 그 때는 "이야기체 서술의 부활" 같은 내용도 내 나름대로 씹어 소화할 수 있게 될랑가.)

 

  "계몽주의에서 아우슈비츠에 이르는 길은, 아도르노나 푸코가 그려냈던 것보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복합적이며, 근대주의의 적대자들이 지녔던 반근대주의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잇었다. 20세기 역사는 우리에게 인권과 합리성에 대한 계몽주의 개념들이 지닌 애매성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고는 유토피아주의와 진보의 개념들에 경고를 보냄으로써 현대의 역사적 논의에 본질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계몽주의적 유산을 거부하고 폐기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그 대신 그 유산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이것 역시 이 책에서 검토했던 수많은 새로운 사회사와 문화사의 의도이기도 하였다. 비록 계몽주의는 단죄되었을지언정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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