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K를 생각한다 (임명묵, 사이드웨이, 2021.) 본문

잡冊나부랭이

K를 생각한다 (임명묵, 사이드웨이, 2021.)

Dog君 2021. 6. 15. 00:37

 

  독서가 직업의 일부가 된지 오래지만,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알아보는 감각은 여전히도 무디다. 특별히 책 읽는 속도가 빠르거나 이해력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범람하는 책의 홍수 속에서 좋은 책을 골라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할 때 사람들의 추천에 많이 의지한다. 꾸준히 듣는 책 관련 팟캐스트의 추천도서를 사기도 하고, SNS에서 존중할만한 분들이 추천하는 책도 눈여겨봐둔다. 그렇게 추천하는 책들만 따라 읽어도 독서리스트가 차고 넘친다.

 

  그런 경로를 통해 상찬을 받는 책이, 막상 읽어보니 도무지 흡족한 구석이라고는 없을 때 무척 당혹스럽다. 내가 평소에 존중했던 그 분들은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이 책을 칭찬하고 추천사를 쓰셨을까. 짜임새는 헐겁고, 논리는 널을 뛰며, 개념은 남발하는, 이런 책이 왜 이렇게나 주목을 받는지 도통 모르겠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고, 자기 서사 안에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뭐랄까, 그냥 키보드 누르는 순간순간에 머리에 떠오르는 문장을 그대로 쓴 느낌이랄까. 이렇게나 당혹스러운 독서경험도 참 오래간만이다. 이런 글에 대해서 굳이 길게 느낌을 남길 필요가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 치고는 굉장한) 혹평을 남겼으니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 정도는 써놓는 것이 평자로서의 예의인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본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90년대생을 중요한 소재로 삼는다. 따라서 이 책은 90년대생이란 과연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것으로 첫 번째 장을 시작한다.

 

  (...) 모호한 인상과 숱한 갑론을박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90년대생만의 특징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이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2010년대의 10년을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이 10년 동안 90년대생들이 차츰 20대가 되어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10년대의 20대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변화상은 90년대생들(당연히 그 인접 연령대도 포함)만의 특성을 보여주는 단서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양면적인 두 가지 현상이다. 첫번째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사회갈등이 격렬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끓는 솥과 같은 한국 사회에서 갈등이 격하지 않았던 때는 이전에도 없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는 갈등의 장이 주로 온라인으로 옮겨갔으며, 온라인에서 급변하는 여론이 실제 세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
  두 번째 양면적인 현상은 한국의 대중문화와 콘텐츠 산업이 급격한 발전을 거듭해 세계적 수준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
  (...) 물론 봉준호나 방시혁이 90년대생은 아니듯, 모든 콘텐츠 산업의 성장을 90년대생의 진입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돌에서부터 만화, 인터넷 방송에 이르기까지 90년대생들은 콘텐츠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연예 기획사, 방송국, 혹은 네이버와 같은 대형 플랫폼과 상호작용해 한국 콘텐츠의 트렌드를 형성하는 데 아주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2010년대 한국의 '콘텐츠 제국' 건설에 있어서 총사령부나 수뇌부를 맡지는 못했어도, 결정적 공헌을 세운 일선 정예부대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2010년대 전반에 걸쳐 발전한 한국의 대중문화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래서 '투쟁'일 것이다. 이 시기의 대중문화 콘텐츠에는 주제의식과 서사 구조부터 소비자들의 행태까지 일관된 투쟁 지향성이 관찰된다. 그리고 그 투쟁심이야말로 2010년대 한국 콘텐츠 산업 발전의 주된 연료였다. (32~34쪽.)

 

  이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먼저 2010년대를 위와 같이 정의한다. 책의 거의 첫머리인 바로 이 지점부터 글이 이상하다. 저자는 2010년대에 일어난 위의 일들을 두고 아무런 논증도 없이 "20대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변화상"이라고 정의한다. 90년대생 외에 00년대생, 80년대생, 70년대생도 같은 시기를 살면서 같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냥 그렇게 정의한다. 그 변화가 90년대생들만이 주도했다는 그 어떤 근거도 내놓지 않고 그냥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에 기초해서 태연하게 다음 내용을 이어간다. 저자는 2010년대 한국사회에는 90년대생들만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90년대생들만 온라인에 접속하고 대중문화를 향유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다보니 위 인용의 첫 문단에 있는 것 같은 괴상한 문장이 나온다. "90년대생들(당연히 그 인접 연령대도 포함)만의 특성"이라는 표현이, 문법적으로 성립할 수는 있는 건가. 이건 대체 무슨 뜻인가. 90년대생들만의 특성이라는 건가, 90년대생의 인정연령대를 포함한 80~00년대생들의 특성이라는 건가. 이해를 돕기 위해 표현을 약간 바꿔보자. "한국인들(당연히 그 주변국도 포함)만의 특성", "사과(당연히 다른 과일도 포함)만의 특성", "지구(당연히 그 주변 행성도 포함)만의 특성", "삼성전자(당연히 다른 기업체들도 포함)만의 특성"...

 

  이상한 문장이라는 점에서는  그 뒤의 부분도 마찬가지다. 문장이 좀 기니까 다시 인용해보자.

 

  아이돌에서부터 만화, 인터넷 방송에 이르기까지 90년대생들은 콘텐츠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연예 기획사, 방송국, 혹은 네이버와 같은 대형 플랫폼과 상호작용해 한국 콘텐츠의 트렌드를 형성하는 데 아주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2010년대 한국의 '콘텐츠 제국' 건설에 있어서 총사령부나 수뇌부를 맡지는 못했어도, 결정적 공헌을 세운 일선 정예부대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돌에서부터 만화, 인터넷 방송에 이르기까지 90년대생들이 콘텐츠의 생산자라고? 90년대생들이 아이돌, 만화, 인터넷 방송의 생산자라고? 박진영이 90년대생이었나? 박찬욱이 90년대생이었나? 80년대생과 00년대생은 생산과 소비를 안 했나? 왜 90년대생의 생산과 소비만이 2010년대의 대중문화와 콘텐츠에 "아주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하는 걸까.

 

  짐작하다시피 여기에도 근거는 없다. 그냥 저자의 선언이 있을 뿐이다.

 

  그 다음도 이상하다. 90년대생이 총사령부나 수뇌부는 아니고 일선 정예부대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 총사령부나 수뇌부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일선 정예부대가 "막대하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총사령부와 수뇌부는 '훨씬 더 막대하고 훨씬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 아닌가.

 

  근거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건 그냥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하지만 이쯤 되면 누구나 눈치를 챌 수 있다. 이 책은 그런거 신경 안 쓰고 시치미 뚝 떼고 다음 문장을 이어가고, 이런 아스트랄함은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마치 (총사령부와 수뇌부가 아니라) 일선 정예부대가 지휘하는 전쟁처럼.

 

  사실 20대의 90년대생이 마주한 경제 여건은 고유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객관적 지표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관적인 심리라는 차원에서 90년대생의 여건이 더 큰 압박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했듯 2008년 금융위기와 중국의 부상으로 말미암은 환경의 악화가 있었다. 그들은 대외 영역에 들어가기는 더욱 힘들어졌고, 대내 영역에서는 더 격한 경쟁을 마주해야 했다. (41쪽.)

 

  따라서 종합하자면, 새로운 SNS 시대의 문법에 녹아든 20대 중에서 이런 특유의 심리적 압박에서 자유로운 이들은 거의 없어졌다. 계층화가 진행되고 미디어로 미적 기준이 올라가는 가운데, 안정적 경제 자본과 경쟁력 있는 매력 자본을 모두 갖춘 이들은 인구 집단에서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애당초 둘 중 하나만 갖추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설령 일정 기준 이상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의 인정 경쟁은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리그만 달라졌다 뿐이지 정도는 더욱 격해질 따름이었다. 사회적·경제적 여건의 악화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의 상호작용은 90년대생들이 서로가 서로를 옥죄도록 만들며 그들의 투쟁성을 극적으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56~57쪽.)

 

  '90년대생이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이 책이 가장 먼저 풀어야 하는 질문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90년대생'은 이 책의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90년대생의 정체와 특성 대신 2010년대의 시대적 상황만 계속 늘어놓는다. 백번, 아니 천만번 정도 양보해서 그걸 90년대생의 특성이라고 정의해보자.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변화라는 것도 대체로 전 세대와 전 계층이 공통으로 향유하는 것이라서 사회 내의 특정한 집단을 규정하는 근거로 삼기엔 부적당하다. 무언가를 설명하기엔 너무 광범위한 근거라는 거다. 그러다보니 결국에는 사실상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그 어떤 특성도 도출해내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논지가 전개될리가 없고, 급기야 일관된 설명을 포기하고 손에 집히는대로 막 집어던지기 시작한다.

 

  (...) 90년대생이 굉장히 '개인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모습도 그래서 많이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90년대생들이 개인주의라는 어떤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을까?
  먼저 개인주의가 무엇인지 잠깐 살펴보자. 개인주의는 곧 모든 가치의 기준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 개인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상호 배려하고 규율하는 상태를 조성해야 한다. (...) 적어도 온라인 세계에서 많은 90년대생의 행태는 개인주의와 반대된다. (...) 타인과 과하게 연결된 상태에서 타인들을 위해, 타인들에 의해 모든 행동과 소비의 기준이 기준이 맞춰지는 것을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나는 회의적이다.
  또한 90년대생들은 SNS나 유튜브 등지에서 매우 간섭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예컨대 유명인들이 저지른 일탈이나 도의적 잘못이 발견되는 경우 그들은 익명성에 기댄 집단행동을 통해 그들에게서 사과를 받아내고 심한 경우 그들의 활동 자체를 정지시키려한다. (...)
  (...) 나는 90년대생이 집단주의 문화에 거부감을 표출하기 시작한 최근의 현상을, 개인주의 가치의 추구보다는 모든 종류의 책임과 간섭을 거부하고자 하는 감정적 동기가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가치를 추구하기에는 격화된 지위 경쟁과 감각의 홍수로 인해 심리적으로 피로해진 이들이, 자신에게 심리적 피로만 더할 것 같은 간섭과 책임에 적극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
  이것 역시 개인주의적 태도가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90년대생들 또한 자신이 타인에게 지위나 권력, 상황적인 위계를 통해 간섭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감정적 동기를 보편적인 개인주의적 가치와 연결시키는 건 어려운 듯하다. 비단 온라인 공간에서 보이는 간섭뿐 아니라, 예컨대 90년대생이 연애 관계에서 보이는 수많은 간섭적 태도나 소위 '젊은 꼰대'라는 호칭의 등장은 이에 대한 또 다른 예시가 된다. (73~75쪽.)

 

  예컨대 이런 부분이다. 그래서 90년대생이 간섭을 한다는 건가, 안 한다는 건가. 90년대생이 "SNS나 유튜브 등지에서 매우 간섭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하고 바로 그 한가운데에 "모든 종류의 책임과 간섭을 거부"하고 "간섭과 책임에 적극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간섭'이라는 것은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하기에는 사실 그 범위가 너무 넓고 모호하다. 따라서 같은 사람/집단이라도 어떤 순간에는 간섭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멀쩡한 글이었다면 대체 무엇이 그러한 모순적 태도를 만들어내는지를 찾아내고 그로부터 통찰을 끌어내겠지만, 짐작하시다시피, 이 책은 그런 거 안 한다. 그저 이렇게 보일 때는 이렇게 말하다가 저렇게 보일 때는 저렇게 말하다가, 결국에는 이도 저도 아닌 비문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것이 90년대생만의 특성이라는 논거 역시... 당연히 제시하지 않는다.)

 

  아래의 두 인용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90년대생은 과연 시스템의 신뢰성을 신뢰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그나저나 저 '한탕주의', YS 때부터 한국사회의 병폐로 말하던 거 아닌가?)

 

  한편 (...) 90년대생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강력한 문화 코드가 있었으니, 그것은 한탕주의였다. 특정한 일회적 행동으로 모든 사회경제적 지위를 뒤집는 것을 갈망하는 심리인 한탕주의는 어쩌면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은 근대 한국인에게서 유구하게 발견되는 것일 수 있겠으나, 2010년대의 90년대생 사이에서는 더욱 큰 반향을 얻었다. (76쪽.)

 

  (...)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압박을 해소할 여타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스템의 신뢰성에 강하게 매달리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의 심리적 안정의 기반 중 하나인 능력주의에 대한 견고한 신뢰는, 시스템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드러난다. (...)
  따라서 90년대생 사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여 규칙이 해킹당하는 상황을 최대한 방지하고, 외부의 개입으로 이 예측 가능한 시스템이 불확실해지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 개입과 교란으로 시스템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시험으로 평가되는 능력주의가 보장하는 예측 가능성을 추구하며 그 결과에 따른 차등과 불평등을 감수하는 것을 차라리 더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90년대생이 원하는 것은 '공정'보다는 다만 불안을 더 키우지 않는 것과, 신뢰의 기반이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신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인 것이다. (87쪽.)

 

  이렇게 보일 때는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보일 때는 저렇게 말하는 것이 대체로 이 책의 주된 논지전개방식인데, 약간 뒤로 가면 결국 이런 괴랄한 문장까지 등장한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특히 청년층에서는 민족주의가 퇴조했으면서도 퇴조하지 않은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 (177쪽.)

 

  음...

 

  음...

 

  "퇴조했으면서도 퇴조하지 않은 기이한 현상"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이게 바로 그,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이란 것인가. (과학자분들께 죄송.)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왼쪽이면서도 오른쪽? 하얀 색이면서도 검은 색? 밝으면서도 어두운? 손에 집히는대로 막 집어던지다가 수습이 안 되니까 결국 이런 괴랄한 문장까지 나온다.

 

  물론 저 문장이 수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나는 오늘 밥을 먹었지만, 밥을 먹은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처럼 말이다. 앞의 "밥"을 '끼니'로, 뒤의 "밥"을 '도정한 쌀을 끓여서 익힌 음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이 수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밥"이라는 단어를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고 하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합의는커녕 그런 시도조차 안 한다. 그냥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을 그때그때 떠오르는 단어로 설명하다보니까 결국에는 아무런 일관성도 없는 인상비평의 자잘한 조각들만 남는 것이다.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았을 때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것은 당연하고.

 

  막 던지기로는 개념 사용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방역을 다룬 2장은, 개인적으로는 그 문제의식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한국의 방역이 결과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포기한 것들, 예컨대 사생활이나 개인의 선택권이 일부 제약당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사이버불링이 있었다는 것 등은 나중에 언젠가 찬찬히 되씹어볼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란 거다. 이 책의 2장 역시 그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했기에 그나마 공감하면서 읽다가... 또 얼마 못 가서 턱, 막힌다.

 

 

  (...) 대구의 위기를 넘기고 그 이후 이태원, 교회발 집단감염이 감염 폭발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결국 정보 수집과 자원 동원에서 대체 불가능한 시스템을 건설해 놓은, 총력전 동원 체제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북한과의 총력전을 대비하며 사회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간 한국이라는 촘촘한 시스템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를 상대로 총력전을 벌인 셈이다. (109쪽.)

 

  갑자기 여기서 "총력전 동원 체제"가 튀어나온다. 근거는 이번에도 없다. '총력전 동원 체제'가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흔히 '총력전 체제'라고 부르는 전쟁기 유럽이나 일본의 그것과 지금의 한국이 어떤 점에서 유사한지, 과연 사회 전체가 총력전을 위해 동원된 것이 맞는지, 그런 논증은 없다. 굳이 찾자면 정부/국가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고 개인의 동선을 확인하여 공개하는 시스템을 갖추었으며 그것이 과거 독재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부다. 그게 왜 '총력전 동원 체제'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총력전 동원 체제"라고, 볼드까지 해가면서 그냥 던질 뿐이다.

 

  내가 알기로는, 각각의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서 사회 전체의 자원을 인위적으로 재배치하고 불가피한 경우 일정 정도 (물론 그것도 법과 규정의 테두리 내에서)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기도 하는 것이 근대적인 국민국가체제 일반의 특성이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총력전 동원 체제'라고 규정하려면, 많은 논증이 필요하다.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역사적 논증이 어렵다면, 최소한 한국 정부의 방역정책이 다른 국가들, 예컨대 영국이나 미국 정부의 정책에 비해 어떤 점에서 더 '총력전 동원 체제'에 가까운지를 말했어야 한다. 공공기관과 가게 문을 싹 닫아서 일상생활 일부를 일시적으로 정지시켰던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한국이 어떤 점에서 더 특별히 '총력전 동원 체제'에 가깝다는 건가. (이 책은 대신 중국의 사례만을 가져온다. 이 선택적인 사례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념을 막 던지다 못해, 4장에 이르면 자기 스스로 내린 개념도 수습을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른바 '86세대'의 역사를 다루는 4장은 초두에서 86세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먼저, 586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하도록 하자. (...) 60년대생 중에서도 대학에 진학한 30%에서 35%가량의 집단이 다른 세대, 혹은 동 세대의 대학 미진학자와 구별되는 집단으로 많은 것을 공유한다면, 586이라는 용어는 그 집단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절한 단어가 된다.
  그러나 586을 60년대생의 80년대 학번이라고 정의한다면 또다시 문제가 생긴다. 586이라는 용어에는 강한 정파성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점을 고려하여 나는 586을, "60년대생으로 80년대에 대학에 진학하여 학생운동에 참여하였거나, 그와 관련된 정서에 강하게 동조하는 이들"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 (229~230쪽.)

 

  요약하자면, '86세대'란 "60년대생으로 대학에 진학한 35% 중에서도 학생운동에 참여했거나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다. 즉, 대학에 진학한 동세대의 35% 중에서도 일부라는 거다. 그런데 이 정의가 결론에 가면 바뀐다.

 

  (...) 386 본인들부터가 대학 문을 나오자마자 국민 대다수에게 풍요를 보장해주는, 충분히 성숙하고 번영하는 한국 경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 대학 교육을 받은 35%가량의 60년대생 엘리트 그룹은, 혁명을 꿈꾸던 과거를 뒤로하고 이후 한국 사회의 각종 영역의 핵심 중추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들이 80년대 정권에 반대하는 막강한 힘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고등교육의 수혜를 입은 한국 사회 최초의 대규모 인구 집단이었다는 데 있었다. 혁명론을 버리고 고도성장의 절정에 있던 한국 사회 각지에 참여한 순간부터, 그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될 것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 (258~259쪽.)

 

  여기서 갑자기, 대학에 진학한 35%의 엘리트그룹 전체를 혁명을 꿈꾸었던 86세대로 지칭한다. 분명히 앞에서는 대학에 간 35% 중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대학에 간 35% 전체가 혁명을 꿈꾼 엘리트그룹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 이 주장이 옳다 그르다를 말하는게 아니다. 아니, 이건 근거가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자기가 내린 정의에만 충실하면 되는데, 그것조차도 안 지킨다는 거다.

 

  무슨 글이건 간에 최소한의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어떨 때는 86세대를 누구의 지지도 얻지 못한 소수의 시대착오적 극렬분자로 묘사하다가, 또 어떤 때는 한 시대의 기득권을 독점한 욕심꾸러기로 묘사한다. 다시 말해, 86세대를 비판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손에 집히는대로 다 집어던지는 거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기가 막 집어던진 것들을 제대로 수습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거다. 이 책이 말하고 싶은 86세대란 대체 어떤 집단인가. '소수-극렬분자'인가, '다수-기득권'인가.

 

  그리고 86세대는 혁명론을 버렸다는 건가, 안 버렸다는 건가. 위의 인용문 마지막 문장에서는 "혁명론을 버"렸다고 했는데, 바로 그 앞에는 아니라고 했거든.

 

  (...) 운동권이 통일을 열망했던 것은 단순히 민족자주라는 추상적 구호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통일은 구체적인 사회혁명에 필수적인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 민주화는 그저 징검다리였을 뿐, 그들의 진짜 목표는 계속해서 혁명이었던 것이다. (255쪽.)

 

  이런 부분도 그렇다. 대체 한국의 성장은 어땠다는 건가. 불균등성장과 빈부격차, 노동격차를 보며 86세대가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었다고 했는데, 얼마 안 가서 한국의 발전은 포용적이었으며 농민들의 중산층화도 무난하게 이뤄졌다고 한다.

 

  이 집단이 1980년대에 근대화에 대한 안티테제들을 종합한 급진적 혁명론을 발전시키고, 민족주의나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갈라진 것 또한 경향으로 갈라진 것 또한 마찬가지로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다. 50년대생들과 60년대생들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대화의 여러 수혜를 입을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뿌리는 여전히 대부분 농촌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농촌적 생활양식을 받아들인 세대임과 동시에, 정부가 근대화 사업을 통해 농촌에 침투하고,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바라본 세대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대학에 가서 도시 생활을 접하고, 한국의 고도성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출현한 불균등성장을 마주했을 때 빈부격차, 노동격차 등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52쪽.)

 

  한국은 (...) 독특하면서도 포용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농촌 또한 근대화의 많은 수혜를 입었고,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어 가족을 부양하면서 중산층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전국적 상향이동이 활발했으니 자연스레 엘리트와 대중 간의 문화적 분리가 일어날 틈도 없었다. 오히려 한국의 엘리트들은 다른 비서구 국가의 엘리트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공동체적'이며 '전통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 (256~257쪽.)

 

  더 쓰다보니 나 스스로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고, 갑자기 현타도 오고 (내가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왜 이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지...) 해서 그냥 이만큼만 써야겠다.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그냥 논리적으로 문제가 안 되는 부분을 대충만 건져냈는데도 이 정도다. 사실관계가 어긋나는 부분을 빼도 이렇다.

 

  그런데 이런 책에 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상찬을 얹으셨을까. 내 독해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이 책의 진가를 내가 못 읽어낸걸까.

 

ps. 딱 하나만 더 하자. 이런 이야기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쓰신 건지 궁금하다.

 

  (...) 군부가 자국민에게 저지른 학살은 이를 접한 모든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온건한 비판 세력이 될 수도 있던 이들을 강경한 반대 세력으로 전환시켰다. 한편으로, 광주 학살은 신군부 세력으로서는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원죄가 되어 그들의 행동 범위를 제약했고, 광주를 제쳐두고서라도 그들의 사회 장악력과 통치 정당성은 박정희에 비해 미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해주었다. 그 자율성을 보장받은 공간 속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매년 운동권에 유입되어 사상적으로 감화되고 정부에 대한 저항 의식을 불태웠다. 즉, 광주는 반대파를 급진화시키고 신군부 정권의 항구적 족쇄로 남게 되어 1980년대를 학생운동의 전성기로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234쪽.)

 

교정. 초판 3쇄

33쪽 밑에서 5줄 : 성장할 수 있는 -> 설명할 수 있는

38쪽 13줄 : 그런 점에서 1992년의 한중 수교는 1992년에 일어난 또 다른 중요한 변화에 속한다. (1992년에 대한 기술은 여기서 처음 등장하므로 "또 다른"이 포함된 이 문장은 어색하다.)

56쪽 밑에서 2줄 : 안정적 경제적 자본과 -> 안정적인 경제 자본과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어지는 부분과의 대구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 수정하는 것이 좋겠다.)

255쪽 12줄 :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거를 표현하는 '-었'이 두 번 연달아 사용되는 것은 아무래도 좀 어색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