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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재팬 (리오 T. S. 칭, 소명출판,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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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재팬 (리오 T. S. 칭, 소명출판, 2023.)

Dog君 2023. 8. 30. 09:49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동아시아에서 확인되는 반일(안티재팬) 정서를 들여다 볼 때는 불완전한 탈식민화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금의 반일정서는 식민지 체제의 유산이 완전히 와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 때문에 국가권력에 의해 조장되고 동원된 측면도 있다는 것이죠. 저자는 동아시아 각국의 문화콘텐츠를 통해 불완전하게 해체된 채로 미국에 의해 재편된 식민지 질서를 읽어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탈식민화'의 의미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은 탓에 책 전반적으로 이야기가 공허하거나 헛돈다는 느낌이 살짝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전에 『우리 안의 친일』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아직 식민지의 유산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저는 식민지의 유산에서 탈피한다는 것이, 그저 어디 바윗돌에 있는 친일파의 이름 몇 자를 파내거나 한국어에서 일본어 표현을 없애거나(왜 방송 자막에선 '야채'를 굳이 다 '채소'로 바꿔서 쓰는 걸까요)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각인해놓은 '생각의 방식'을 바꾸는 치유적therapeutic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제가 보기에도 리오 T. S. 칭의 접근은 어딘지 모르게 마뜩찮습니다. 일전에 '짱깨주의의 탄생' 독후감에도 적었던 것처럼, 저는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불호 감정이 의외로 꽤 두텁고 복잡한 층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일감정에는 '민족주의'나 '역사'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거죠.

 

  '위안부'를 예로 들어볼까요. 한국에서 '위안부' 이야기처럼 폭발력이 강하고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운 주제도 드물죠. 그 때문에 '위안부'는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이분법적 세계관에 갇혀 있노라고 지적하는 사례로도 흔히 인용됩니다. (『제국의 위안부』가 대표적이겠네요.)

 

  그러나 따져보면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위안부' 위에 복합적으로 교차된 민족과 젠더와 폭력의 사슬을 가장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위안부' 연구 스스로잖습니까.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그걸 가장 잘 한 것이 윤명숙의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입니다.) 전국에 세워진 '위안부' 소녀상도 그렇습니다. 혹자는 다소곳하게 앉은 소녀상이야말로 전형적인 젠더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지적할지 모르지만 전국에 세워진 소녀상이 각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위안부' 담론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방송에서, 반일정서를 논할 때 좀 더 섬세하면서도 다층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할 거라고 지적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잘 압니다. 언론에 나와 정말로 이분법적 반일정서에 기대서 조회수 쪽쪽 빠는 이들이 꽤 있다는 것 말이죠. 그런 이들이 있는한 이 책에서 느낀 아쉬움도 계속 될 거라는 것도요.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새삼 또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우리의 선택지가 '혐한일뽕'과 '반일'의 이지선다를 벗어나는 건 대체 언제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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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2017년 봄 듀크-쿤샨대학교Duke Kunshan University, 昆山杜克大学에서 한 학기 동안 동아시아 대중문화를 가르쳤을 때, 나는 일본 (그리고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중국 학생들의 친숙함과 유창함에 놀랐다. 그들은 중국의 방화벽을 뛰어넘는 방법을 찾아낼 뿐 아니라, 타이완과 홍콩을 통해 번역되고 매개된 많은 일본 대중문화를 찾아낸다. (...) 하지만 내가 이 학생들 일부에게 반일 시위가 또 있을 건인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았을 때, 많으느 학생이 주저 없이 거리에 나가 행진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학생들은 소비와 정체성을 명백히 구분한다. 일본 상품과 문화를 소비한다는 사실이 그들이 일본화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일본 군국주의 코스프레에 대한 반응과 학생들의 소비와 행동 사이의 곡예는 오늘날 민족주의의 한계와 타당성을 모두 가리킨다. 친일감정과 반일감정은 그 복잡성과 모순성과 구체적인 역사적 국면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제국 전환기의 뒤엉킴이다. (21쪽.)

 

  우선 우리는 적어도 동아시아 반일감정의 두 가지 형식, 곧 '항일resist Japan, 抗日'과 '반일anti-Japoan, 反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항일'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중국의 투쟁 노력과 그것의 성공, 특히 8년의 '항일전쟁War of Resistance, 中国抗日战争' 시기를 나타내기 위해 중국 본토와 중국어 사용권에서 광범하게 사용된다. '반일감정'은 전후 직후 시기에 등장한 명백한 전후 현상이다. 반일감정은 새롭게 '해방된' 과거 식민지들, 예컨대 한국과 타이완에서 '민족/네이션nation' 통합을 위한 정치권력의 구성을 위해 동원되었다. 한국전쟁의 종식과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질서 공고화에 따라 반일감정은 곧 이 두 국가에서 반공주의와 계엄령 선포로 대체되었다. (...) (31쪽.)

 

  (...) 내가 앞으로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처럼, 이 문제가 일본의 전쟁 책임에만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일본의 모순적인 식민성/근대를 은폐하고 억압해온 것이 바로 일본과 과거 식민지 모두에서의 '탈식민화'의 결핍 때문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타의 몇몇 식민 권력들과 달리 일본의 경우 패전이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뒤따른 냉전과 일본의 급속한 경제 부흥을 지원한 미국의 패권은 똑같이 식민의 상처들을 '망각'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으로 타이완과 한국의 (분단된) 탈식민 국민국가가 일본과의 정상화 조약에 서명했고, 이에 따라 일본의 군사 공격에 대한 모든 보상과 배상은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진정하고 심심한 반성에 기초한 정치적 화해의 욕망보다는 경제적 요구에 이끌려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불완전하고 유보된 탈식민화와 탈제국화의 결과, 비록 나라마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일감정이 이 지역의 강력한 정서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들 국가의 국가장치는 국내 문제와 사회 모순을 은폐하거나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반일 정서를 자주 활용한다. (60쪽.)

 

  미국와 일본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는 두 영화 버전의 언캐니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젠더화된 재현에 의해 예증될 수 있다. (...) 두 영화의 평행 장면 하나에서 우리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뚜렷한 미국과 일본의 재현을 보게 된다. 원작 〈고지라〉에서는 (...) 그들이 살려고 도망칠 때, 야마네 박사의 딸 에미코Emiko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바로 그때, '숙녀를 구출하는 영웅Hero-Saves-Dame'이라는 고전적 이미지로 에미코의 연인 오가타Ogata가 나타나 그녀를 구하고, 사랑스런 포옹으로 그녀를 껴안는다. (...)
  〈고질라〉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지만, 하나의 변주가 가미된다. 에미코가 넘어지기 전에 우리는 레이먼드의 아시아계 남성 짝패인 이와나가도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오가타가 에미코를 구하러 오는 바로 그 순간, 레이먼드의 건장한 캐릭터가 나약하고 운이 나쁜 이와나가를 땅바닥에서 들어 올린다. (...) 이 흑백 영화 속에서 왜소하고 패기 없는 아시아 남성 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건장한 레이먼드의 배역은 일본의 항복 직후에 키가 작고 굳어있는 히로히토 천황 옆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맥아더 장군의 아이콘과도 같은 사진과 유사하다. (68~70쪽.)

 

  문화적 재현으로서 고지라와 부르스 리는 동아시아 전후 체제의 정치적인 불가능성 속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실질적 대항이 가능하지 않거나 허용되지 않는 문맥 속에서 상징적 반미감정과 반일감정은 각각 욕망과 판타지의 공간을 재현해주며, 역사적 현실 속에서는 '교정'될 수 없는 사회적 불안의 투사이기도 하다. 해결되지 못한 탈식민화 문제(일본 전몰자로서의 고지라와 중국 문화민족주의로서의 브루스 리)가 오늘날까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화해나 통합의 과정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정치적 수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해 줄 뿐이다. 식민과 탈식민 문제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리프 딜릭Arif Dirlik이 경고했듯이, "식민주의와 그 유산에 대한 집착은 당대 현실에 미치는 과거의 영향력에 대해 과정된 관점을 갖게 하고, 당대의 권력 재구조화, 그중에서도 특히 이미 식민지 과거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는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역할 변화에 따른 과거 유산의 재인식 필요성을 간과하게 할 여지가 있다." 동아시아 문맥에서 반일감정의 형식을 띠게 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문제는 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사회주의-이후 중국의 강화된 인식, 가부장적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의 공정성 요구, 계엄령 이후 타이완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재강조 등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앞으로 이 책의 남은 장들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이다. (...)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일본'에 대한 이런 모순적 느낌들이 실제 일본이나 일본 제국과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지역적 위기와 불안을 둘러싼 투사나 동원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반일감정(또는 타이완의 경우 친일감정)이 동아시아의 집단적 영혼 속에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것이 일본 제국의 실패한 탈식민화를 반향하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오늘의 지구 자본주의하에서 증가하는 위기들에 대응하기 위한 민족주의 정서에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75~76쪽.)

 

  '일본귀신들'의 풍자적 묘사를 통해 구성되는 것은 항일전쟁의 영웅적이고 긍정적인 기억이다. (...) 중국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는 항일전쟁의 역사 그 자체이며, 이것은 수십 년의 '민족적 수모' 이후 중국의 자기 이미지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들에게 항일전쟁은 낡은 중국에서 새로운 중국으로의 전환을 나타내며, 사회주의의 승리를 예고한다. 그것은 중국 전체 인민의 애국 투쟁이었으며, 모든 중국인의 통일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이와 같은 항일전쟁의 긍정적 역사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서는 중국의 희생이라는 부정적 역사에 점차 자리를 내주었다. (...) 1970년대 이후 사회주의 경제의 급격한 와해는 사회주의 이후 지구화 시대에 중국의 시장경제 수용이 초래한 불평등과 불만에 대처하기 위해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마오쩌둥 이후의 개혁이 문제에 봉착했다는 신호들이 1980년대 중반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족주의 정서는 발전을 위한 노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수단을 제공했다. 일본 스스로가 느끼게 된 경제력과 정치력 사이의 불균형(교과서와 야스쿠니 논쟁에서 증명되었다)과 더불어 중국의 고통 효과를 더 크게 감지하는 대중 민족주의가 중국에서 등장했으며, 그것은 '난징 대학살'을 통해 정점에 달했다. 사회주의에서 민족주의로의 전환은 다양한 반일 시위에 대한 국가의 암묵적 승인과 중국 국민의 타오르는 감정 사이에서 작동하는 미묘한 균형 장치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반일감정은 떠오르는 일본의 민족주의를 봉쇄하면서, 대대적인 경제 개혁에 따른 대중적 불만 속에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
  중국에서 온라인 시위는 1996년에 처음 발생했다. (...) 키우에 따르면, "민족주의 담론은 중국의 인터넷 정치 영역에 침투해서 개인적 차원의 문화 정체성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좌우의 근대화 이데올로기와 달리 유일하게 국가가 조장하고 네티즌 대다수에게 호소력을 갖는 서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2005년 반일 시위 기간과 그 후에 탄생한 현상은 인터넷상의 플래시 기반 쇼츠 클립들이 넘쳐났다는 점인데, 이것들으느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인들에게 모욕을 주고 민족주의 정서를 조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짧은 영상들에서 '리벤 귀지'나 '귀지'는 이전의 양상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일본인을 짗이하는 공통의 명칭이 되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 근대사 대부분을 통틀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일본인들로부터 구별하려는 의도적인 시도가 있었다. 사회주의 이후 대중 민족주의는 지금까지는 뚜렷이 구별되던 일본과 일본인이라는 범주들을 조장하고, 자극하고, 나아가 합성해낸다. 이제 민족의 적들은 더 이상 제국주의자들 그 자체가 아니라, 일본인들이다. 이전 시기에는 '귀지'가 항일전쟁과 사회주의 혁명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면, 이제 '귀지'는 명백한 적, 곧 일본과 일본인들을 향한 것이 되었다. (90~94쪽.)

 

  반일 정서와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한국 민족주의를 떠받치는 추동력이었다. 소위 탈식민, 탈냉전 시기에도 이와 같은 적대감은, 냉전 시기에는 권위주의적 개발중심주의 국가, 그리고 좀 더 최근에는 지구화 체제하의 신자유주의적 개발중심주의 국가의 요구와 욕구에 따라 민족주의적 동원을 위한 강력한 원천으로 살아남는다. 역사적인 식민주의의 폭력과 현대의 경제적 혹독함이 한국의 남성성과 가부장제로부터 권력과 권위와 정당성의 의미를 박탈해 버렸다. 식민지 시대에는 아버지가 가정과 국가에 대한 유교적 영향력을 박탈당해서 식민주의적 근대화나 과학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통적이라거나 맞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압축 근대 시기에 아버지는 생계 제공자로 격하되었지만, 동시에 가족 중에서 가장 도구화되고 고립된 구성원이 되었다. 많은 학자가 주장했듯이, 남성성의 위기는 모욕과 거세의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문화 영역에서 김경현Kyung Hyun Kim이 '재남성화remasculinization'라고 부르는 현상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 최정무가 주장하는 더 중요한 사실은 식민 치하 한국 남성들이 민족 정체성과 남성성 박탈에 대응하기 위해 식민 치하의 동족 여성이나 거세된 자아에 대해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 (117~118쪽.)

 

  (...) 스틸 사진과 움직이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으면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지배 언어 속에서 재현이 불가능했을, 고통을 당하고 수치스러운 육체를 재현해내는 강력한 시각 언어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성노예제의 폭력이 이 여성들에게 가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감내한 신체적, 심리적 손상만이 아니다. 젊음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그들로부터 앗아간 그들의 삶, 말하자면 폭력적으로 저지된 그들의 삶, 이루지 못한 그들의 꿈, 또는 어떤 위안부의 표현처럼 '빼앗긴 순정stolen innocence'과 같은 것들이다. 늙은 육체가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손상이 심해서 대부분의 이 엿어들이 아기를 갖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린 그런 성폭력과 '해방 후'의 가부장적 폭력의 흔적들이다. 많은 여성이 아기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쫓겨나거나 이혼당했다. 영화 속의 육체가 보여주는 복부의 자국 매듭들은 이 여성이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아기를 낳는 것은 가부장적 민족주의 사회인 탈식민 한국에서 여성들의 본질적인 역할이다. (127~128쪽.)

 

  객관적인 의도를 천명하는 다른 다큐멘터리들과 달리, 〈낮은 목소리 2〉는 위안부 여성들과 감독/카메라맨 사이의 상호작용들로 충만해 있다. 위안부 여성들은 자신들이 대상화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감독에게 자기들을 사전에 계획되고 의도된 방식으로 찍어달라고 의식적으로 요구한다. 예컨대 김 할머니와 박 할머니가 호박을 들고 가다가 떨어뜨리는 쾌활한 장면에서 감독이 이렇게 묻는다. "할머니, 그런데 이 호박 가지고 가시는 거 왜 우리보고 찍으라 그러신 거예요?" 여성들은 자기들이 이 호박들을 키웠으며, 촬영 팀이 수확 장면을 찍어주길 원했다고 대답한다. 감독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보이길 원하시냐고 이 여성들에게 간곡히 물으면, 이 여성들은 이렇게 익살스럽게 대답한다. "딱 보면? 소모냥 일만 하는 사람으로 찍어 줘!" 비록 농담으로 전해지기는 하지만, 여기서 노동하는 육체에 대한 강조는 중요하다. 평생 열심히 일한 여성들로서, 그들은 노동하는 육체로 보이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일부 과거 위안부 동료 여성들이 무기력해지고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이 여성들은 보상과 배상을 요구하는 자신들의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이 열심히 일했다는 걸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녀들은 그저 일본과 한국 정부가 주는 안내문이나 기다리는 늙은 여성들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에 찍히기를 요구함으로써, 이 여성들은 영화를 자신들의 주체성 주장을 위한 매체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목숨이 다해가는 강덕경도 이 영화를 보상과 배상이라는 자신들의 목표 성취를 위한 매체로 간주한다. 임종 순간에 눈에 띄게 쇠잔한 강덕경은 감독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깊이 생각할수록 이 영화, 나중에 볼, 볼, 다 볼 수 있도록, 내가 저 세상에 가서라도 내가 기도할 거고, 그래 가지고 좀 많이 시청자들이 생기 갖고, 좀 우리 도와주기를 제일로 간절히 바라요, 내가."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덕경은 의지에 차 있고 당당하다. "우리 할머니들이 비록 나이가 많아도 따뜻하게 우리가 같이 모여서 이리 사는데, 일본 정신 똑똑히 채리고, 할머니들 돈 한 푼이면 될 줄, 얼마 던져 주면 될 줄 알아도, 천만에. 이리 아파도 다 살아날, 날 수 있고...... 우리 할머니들 소원은 그래도 꾸준히 200차가 넘도록 이렇게 수요시위를 하고, 이런, 우리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라도, 너그하고 싸울 테니까, 일본 사람들하고 싸울 테니까. 그걸 온 전 세계 국민들에게 좀 알아줬으면 좋겠고. 우리 할머니들 그리 쉽게 안 죽고, 안 죽고 싶어요. 오래 좀 살 거예요. 독해졌어요. 일본이 그렇게 만들었어. 더구나, 갈수록 더할 거예요. 더 오래 살 거예요." 1997년 2월 2일에 강덕경은 소망이 이뤄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130~131쪽.)

 

  (...) 일본 식민시대가 공정하고, 정의롭고, 질서있게 보이는 것은 단지 또 하나의 (탈)식민적 식민통치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통해서일 뿐이다. 따라서 실제의 차별과 부정의에도 불구하고 식민시대에 대한 향수는 과거 식민지 신민들을 읫미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국민당에 의한 '해방'과 권위주의 정권의 만연한 부정부패를 강조하기 위해 투사되는 것이다. 리분징신을 '더 높은 선greater good'을 위한 도덕적 윤리적 행위의 형식, 사실상의 공중도덕과 연결시킴으로써, 이 과거의 피식민자들은 나아가 현대 일본에서도 그것이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그들은 만연한 사회적 빌졍을 발견하며, 그 원인을 공동선의 개념을 버리고 점차 자기중심화되어가는 대중 탓으로 돌린다. 오늘날의 타락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에 있어서 도산 세대는 일본의 신보수주의자들과 유사한 보수주의를 공유하며, 일본 민족의 재생을 자기들의 가장 화급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160쪽.)

 

  중국의 위협이 과소평가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청년들의 정치적 각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미래 삶에 대한 더 깊은 불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
  이들 학생 운동은 기존 체제의 제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개혁에 관한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 행동을 하고 싶은 욕망 중의 일부는 젊은이들 사이의 국지성/민족주의에 대한 믿음이다. (...)
  일본과 여타 아시아 공간의 불평등한 관계, 일본의 제국주의적 과거('위안부' 문제나 영토 분쟁과 같이 해결되지 못한 문제 등), 그리고 미국에 대한 의존국client state 지위 등의 문제는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형성과 식민주의 문제 회피와 관련해서 심각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 학생긴급행동의 한계는 패전, 무장 해제, 민주주의가 탈식민화 과정을 대체해버린 전후 일본 제국의 재구조화에 대한 일본 청년들의 무관심에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학생긴급행동은 대대적인 매스컴 보도와 폭넓은 지지로 인해 좀 더 급진적인 요구는 주변화시키는 자유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운동이다. (...) (228~229쪽.)

 

교정. 초판

7쪽 밑에서 2줄 : 동성애사회성homo-sociality -> 사회적 동질성homo-sociality (접두어 'homo-'를 일률적으로 '동성애'로 번역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맥락상 여기서 'homo-'는 사회적인 균질성 혹은 획일성의 의미에 가깝다)

11쪽 밑에서 2줄 : 에릭 홉스봄Eric Hobsbaum ->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21쪽 6줄 : 듀크-쿤샨대학교Duke Kunshan Universiry -> 듀크-쿤샨대학교Duke Kunshan University

42쪽 밑에서 7줄 : 교차비교inter-referecing -> 교차비교inter-referencing

76쪽 5줄 : 반일감정( 또는 타이완의 -> 반일감정(또는 타이완의

80쪽 4줄 : 리벤귀지iriben guizi -> 리벤귀지riben guizi

104쪽 5줄 : 푸슌 재판을 -> 푸순 재판을

118쪽 1줄 : 재남성화rmasculinization -> 재남성화remasculinization

137쪽 3줄 : 요시히코 노다Yoshihiko Noda -> 노다 요시히코Noda Yoshihiko (다른 곳에서는 모두 일본이름을 '성-명' 순으로 표기했다)

139쪽 8줄 : 화해rapproachement -> 화해rapproachment

148쪽 밑에서 6줄 : 정치적 정확성political correctness ->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149쪽 10줄 : 와이셴그렌waishengren, 外省人 (이후에도 계속 나온다)

149쪽 11줄 : 벤셴그렌benshengren, 本省人 (이후에도 계속 나온다)

163쪽 2줄 : 〈베이킹 쳉시Beiqing Chenshi, 悲情城市, A City of Sadness, 비정성시〉 -> 〈비정성시Beiqing Chenshi, 悲情城市, A City of Sadness〉 (한국에서 '비정성시'라는 제목으로 개봉했고, 이 이름으로 훨씬 유명하니 그냥 한국어 개봉 제목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175쪽 8줄 : 미국판 개봉에서는 -> 미국판에서는

182쪽 1줄 : 사케미 켄이치 -> 사케미 켄이치

225쪽 10줄 : 〈디지몬Digimon, ガンダム〉 -> 〈디지몬Digimon, デジモン〉

225쪽 14줄 : 〈건담Gundam, デジモン〉 -> 〈건담Gundam, ガンダム〉

234쪽 9줄 : 텐노

]234쪽 13줄 : 텐노 (글꼴 이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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