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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장지연, 푸른역사,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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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장지연, 푸른역사, 2023.)

Dog君 2024. 1. 8. 21:55

 

  한 200년 쯤 뒤에 어떤 역사학자가 90년대 말 이후의 한국 사회를 연구하면서 "많은 대학생들이 노량진으로 갔다"라는 문장을 만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지금의 우리는 저 문장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IMF 이후 직업의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는 뜻이죠. 하지만 90년대 말 이후의 한국 사회를 모르는 사람이 저 문장을 읽으면 그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상상도 못한 아주 엉뚱한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ㅎㅎㅎ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단순히 사료史料를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때가 많죠. 사료의 겉면만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나 전제들을 알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는, 그냥 읽어서는 비한문(非-漢文) 사료에 대한 소개글처럼 읽힙니다. 한문이라는 것은 애초에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표현법인데다가, 한국어와 완전히 일치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압도다수의 사회 구성원은 한문으로 자신의 이야기와 흔적을 남길 수 없었고, 한문 사료가 보여주는 당대의 모습이라는 것도 극히 일부 구성원의 그것으로만 한정될 수밖에 없죠. 그러니 비한문 사료는 그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회의 어떤 다른 부분을 드러내는 훌륭한 탐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비한문 사료는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이해를 더 깊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에 사용된 차자借字 체계를 예로 들어볼까요. 고려시대에는 이두 같은 차자 체계의 위상이 중국식 한문 체계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말인즉슨 중국의 풍속이나 유교가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한문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비슷한 선상에 놓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고려시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깊고 다양한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저는 이 책의 진짜 미덕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비한문 사료의 존재와 가치를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한문 사료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본 역사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지요. 어떤 이는 시대의 질서에 정면으로 맞섰고, 또 어떤 이는 시대의 질서를 '지키면서 거스르기'도 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자기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존엄을 지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역사 속의 그 누구도 주어진 질서에 일방적으로 순응하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우리 각자가 나름의 욕망과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듯, 역사 속의 사람들도 꼭 그렇게 욕망을 발휘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판형도 작고 그다지 두껍지도 않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펼쳐보이는 역사란 이토록 활기가 넘칩니다. 시간과 공을 들여 잘 차린 코스요리라기보다는 갓잡은 생선을 선상에서 곧장 썰어먹는 회 같다고나 할까요.

 

  차자 시스템이 한문 교양과 병렬적인 위상을 가졌다는 점은 현종 대 문묘에 최치원과 설총을 나란히 모셨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신라 하대를 살아간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돌아와, 여러 저술을 통해 고려 초까지 많은 영향을준 인물이다. 한문의 본고장 당에서 문장으로 유명했다는 점에서 최치원이 한문 교양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면, 설총은 이두를 창안한 사람으로서 차자 시스템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설총은 유가 경전을 방언으로 읽었다고 전하는데, 학자들은 이를 그가 경전 구절에 구결을 붙여 읽은 것으로 해석한다. 한문 교양의 상징적 인물 최치원과 그것의 우리말 해석의 상징적 인물이 유가의 학문을 익히는 문묘에 모셔진 것은 당연하다. 이 둘이 병치되는 것에서 이 시대에 차자 시스템이 갖는 위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시대는 문자가 기능하는 환경 자체가 달랐다. 단지 훈민정음의 존재 여부만이 아니다. 내면의 수양은 불교로, 외면의 다스림은 유교로 한다며 양자의 영역을 나누어서 유교가 그렇게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하지도 않았으므로, 전체적인 문자생활에서 한문의 위상이 조선 시대만큼 클 수 없었다. 불교 의례에서는 저멀리 서역 천축국의 언어인 범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향가와 같은 우리말 노래도 나름의 영험함을 인정받으면서 역시 중시되었다. 고려 태조가 중국의 풍속을 '당풍唐風'이라 상대화하면서, 굳이 그쪽의 모든 풍속을 따라 할 필요가 없다는 유언을 남긴 것은 이러한 사회조건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
  이런 점을 상상하면 이 시대 한자의 개념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도 의문이다. 예를 들어 황皇, 제帝 등의 차등적 질서를 담은 한자의 개념이 삼국 시대나 고려에서 어떻게 읽혔을지,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감수성을 가지고 이를 익혔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에 대한 한문 기록에서 어떤 한자를 선택했는지를 가지고 고려인의 천하관을 논하는 것은 모래 위에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다.
  고려 시대의 한문 사용 환경은 조선의 환경과는 많이 달랐다. 한문이 사회와 밀착된 정도, 그 위상도 달랐고 지금은 거의 잊힌 차자 시스템이 차지하는 비중도 조선 시대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시대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고려 시대를 상상하기 쉽다. 고려 시대의 문자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63~65쪽.)

 

  조선 후기의 여성 문화에는 굉장히 상반된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 어떤 여성들은 집안 재산을 탕진하며 소설을 보느라 정신이 없고, 어떤 여성들은 그런 여성들을 못마땅해하며 여성 규훈서를 지었다. 임윤지당처럼 여자도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며 유성 규훈서를 지었다. 임윤지당처럼 여자도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며 성리의 철학을 파고드는 여성들이 있었는가 하면 중인 집단의 함양 박씨 같이 죽을 필요가 없는데 굳이 죽을 자리를 찾아가 열녀가 되겠다며 자살을 서슴지 않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런 반면에 이순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천주쟁이' 여성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면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모든 흐름은 제각기 격렬하여 이 시대 여성들의 모습이 가닥 없이 혼란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한 발 뒤로 물러나 큰 틀에서 보면 이 시기 여성들에게 위대한 어떤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 욕망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보인다. 소설을 읽으며 가상의 세계에 푹 빠지거나, 사회의 지배이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그 이념에서 말하는 가장 훌륭한 인간형이 되고 싶어 하는 것, 새로운 이념에서 자신이 설 곳을 새롭게 찾아가려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이 시대 여성들이 자기 주체를 형성하고 위대해지려고 한 욕망을 보여 준다. 이런 시기 억압의 구조만을 강조하는 것은 여성들의 주체성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그만큼 성장했고 목소리를 냈으며 더 큰 꿈을 꾸엇고, 적절한 때가 왔을 때 폭발할 것이었다. (147~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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