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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동아시아,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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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동아시아, 2023.)

Dog君 2024. 1. 8. 21:58

 

  저는 역사학 연구자가 늘상 의식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의 본질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현재에 재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재현의 결과인 글이 세세만년 남는 것이라면, 연구자는 한순간도 윤리의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내 생각과 내 글이 누군가를 대상과 수단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 역시도 나와 똑같은 인격체이자 동료시민이라는 점을 망각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위험은 없는지, 늘 긴장해야 합니다.

 

  사회적 참사 생존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또 연대했던 보건학자 김승섭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에는 그러한 긴장이 가득합니다. 누구보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저자이지만 그 역시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종종 실수하고 실패했노라고 고백합니다. 예컨대 연구에 참여해준 분들께 보답으로 드린 기프티콘이 실은 그들의 상처를 더 깊게 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딱 그렇죠.

 

  사실은 애초에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법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그도 고백하는 것처럼 "논리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어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사후적으로 분석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조차도 온전히 해내는 게 쉽지 않"고 "당장 사회 변화를 만들어 내거나 속 시원한 말로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알아낸 학문적 사실이, 종종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기도 하지요. 책 말미에 나오는 헬렌 켈러 이야기처럼요. 하면 할수록 슬프고 답답하기만 한 것을, 저자는 왜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까요. 이와 비슷한 고민을 오래 전 어느 정치학자의 글에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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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겹겹이 떠오르는 장면들로 인해 쏟아지는 눈물을 참고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정신을 추스르고 차분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하는 연구자의 위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 비극의 현장으로부터 차라리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 슬픔은 자주 이성의, 그리고 지혜의 단초가 된다. 《성서 시편》의 구절처럼 전쟁과 전쟁 연구의 양자 모두에 있어, 긴 역사발전의 지평에서 우리는 미래를 위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시편 126:5~126:6) 심정으로 광풍의 시대의 아픔과 죄악을 들추어내고, 비판하고, 규명해야 한다.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 2002, 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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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유혹에 빠집니다. 명확한 적을 하나 설정하거나 너와 나를 갈라서 상대방을 악마화한 다음 이들을 비방하고 이들에게 죄를 묻는 것으로 마음 속의 정의감을 충족시키려 하죠. 가장 손쉽고 간명한 해법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그만큼 일회적이고 단순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몇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같은 문제의 재발을 막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할 생각입니다. 명쾌하게 길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답답한 방식이지만 그래도 저는 계속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직도 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느릿느릿한 과정의 끝에 반드시 무언가 더 나은 답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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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게 공부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언어였습니다.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것입니다. 우리는 손톱 밑에 찔린 가시로 아파하는 옆 사람의 고통을 알지 못하지요. 특히 부조리한 사회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은 종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죽이며 아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당사자의 몸에 갇히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고통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 공부는 책상 앞에서만 할 수 없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친구를 잃은 생존 학생과 동료를 잃은 생존 장병의 이야기를 듣고, 화재 진압 과정에서 동료를 잃고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로 인해 고통받는 소방공무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정리해고 이후 자살로 세상을 떠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장례식을 찾아다니고, 비과학적 낙인으로 삶을 부정당하는 성소수자들의 집회에 함께하는 일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인 이상 그 모든 시간은 책상 앞에서 글로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고통과 분노의 에너지로 존재하는 경험들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분석해 논문과 책의 형태로 정리하는 일은 연구자의 몫이었습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는 사건의 뜨거움이 제 몸을 통과하게 해야 했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거리를 두고 냉정함을 유지한 채 학술적 언어로 정리해야 했습니다.
  공부를 할수록 세상은 복잡하고 변화는 쉽지 않다는 점을 알아갑니다. 하지만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질문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니까요. 합리성은 종종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얼마만큼 있는가로 결정되기에, 기득권은 사회의 모든 갈등에서 더 '합리적인' 주장을 하기 쉽습니다. 근거는 지식의 형태로 존재하고,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원과 시간이 투여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이미 생산되어 있는 지식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는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5~7쪽.)

 

  사회운동 단체의 일을 열심히 돕던 한 학부생이 내 연구실에서 석사과정 공부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적이 있다. 왜 공부를 하려 하는지 물었다. "세상을 더 평등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요."
  그런 목적이라면 대학원 공부를 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부는 공부인 것이라고. 논문을 쓰다 보면,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상식에 가까운 결론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문헌을 읽고 정리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도 우리가 가닿는 자리에는 종종 불확실성이 섞여 있다고. 그리고 논리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어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사후적으로 분석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조차도 온전히 해내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학생이 내게 물었다. "그럼 교수님은 왜 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나는 할 줄 아는 게 이거 하나였다고, 그리고 공부가 가진 힘을 믿는다고 답했다. 공부가 당장 사회 변화를 만들어 내거나 속 시원한 말로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하지만, 인류가 유사한 문제를 두고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오랫동안 쌓아온 지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얻게 되는 통찰이 있다고. 그 통찰의 힘이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고.
  모든 논문의 맨 마지막에는 연구 결과의 한계를 서술하는데, 그 부분에서 연구자는 항상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한계에 대한 서술이 개별 논문에는 약점일지도 모르지만, 학술 언어가 지닌 가장 큰 힘이라고. 내 연구는 이러한 가정 위에서 진행되었고, 그 가정이 무너질 경우에는 결과도 힘을 가질 수 없다고 밝히는 화법이 답답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만큼 정직하고 단단한 언어라고. (17~18쪽.)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이후 30번째 사망자가 발생하자 노동조합은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렸다. 며칠 뒤 태극기 부대에서 그 옆에 '천안함 46용사 순국열사 분향소'를 만들었고, 경찰은 두 분향소 간 충돌을 막기 위해 그 사이에 폴리스라인을 세웠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천안함 생존 장병을 모두 만나고 연구했던 내게도 그 노란 장벽은 넘기 힘든 벽이었다. 왜 우리는 둘 모두를 추모할 수 없는가. (296쪽.)

 

유희경 이 책(『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옮겨적은이)이 전투용이라고 하셨는데 무엇과의 싸움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김승섭 타인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과의 싸움.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는 이들과의 싸움. 우리가 당연히 세월호도, 천안함도, 변희수 하사 사건도 깊게 모를 수 있어요. 타인의 고통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러면 조금 침묵하고 기다릴 수 있잖아요. 판단을 유보하고 배워가야지요. 우리가 그만큼 알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함부로 말하면서 상대방을 모욕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몇몇 정치인은 그 저열함에 기대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 특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요. 하지만 나에게 편견과 고집이 있다고 해서 공공장소에서, 사람들 앞에서 마구마구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타인의 삶에 대해 판단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조심스러움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한국 사회에서 그 조심스러움이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던 것 같고요.
  어쩌다 보니 제가 천안함과 세월호 연구를 모두 했던 유일한 사람이에요. 제가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세월호 참사 생존자 곁에 있었던 사람 명이긴 하니까, '천안함에 대해 이야기할 세월호 참사를 모욕하지 않으면서, 사건을 함께 이야기할 있지 않을까', ' 상처를 비교해서 어느 한쪽을 덧나게 하지 않고도 말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29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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