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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산업의 사양화와 일본 사회의 대응 (정진성, 해남, 20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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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산업의 사양화와 일본 사회의 대응 (정진성, 해남, 2024.)

Dog君 2024. 11. 4. 04:25

 

  빅터 샤우의 『탄소 기술관료주의』와 티머시 미첼의 『탄소 민주주의』를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탄소에너지 이후를 상상하게 됐고, 그렇게 해서 또 자연스럽게 석탄산업은 어떤 식으로 퇴조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 책을 골라들었습니다.

 

  1960년대 일본의 석탄산업은 유례없는 사양의 길을 걸었습니다. 1960년도에 682개였던 탄광 수는 1973년도에는 57개, 같은 기간 탄광 기업은 205개에서 23개로, 석탄 생산량은 1961년 5,541만 톤에서 1973년도에는 2,093만 톤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석탄산업에 관련된 거의 모든 수치들이 극적으로 감소했습니다. 탄광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경제도 크게 위축돼서 이이즈카시(飯塚市)나 유바리시(夕張市)는 비슷한 기간동안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하지요.

 

  상황이 이러하니 정부와 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이에 대한 대응방안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정부는 고용 대책을 비롯해 산업 구조조정과 탄광 지역 개발을 정책적으로 추진했고, 기업과 노동조합도 저 나름의 대책(과 투쟁)을 강구했습니다. 이 책은 장별로 이러한 대책들을 일별하여 설명합니다.

 

  이 책은 석탄산업을 다루고는 있지만 탄소 기반 사회라든지 탈탄소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면에 부각시키지는 않습니다. 구성 또한 개별적으로 발표된 논문을 묶은 것이라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메시지를 도출하자면, 석탄산업의 사양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정부라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석탄산업의 자연스러운 연착륙에는 시장원리보다는 정부의 정책을 통한 적극적 개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 더해 각 지역의 자치 능력도 정책의 성패에 또한 영향을 미치는 유력한 변수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석탄자본의 성격도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의 경우에는 (물론 저자는 한국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토를 유지합니다만) 석탄자본이 지역경제에 대해 별달리 책임감이 있지도 지역에 밀착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유의미한 변수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저자가 분석한 한미일의 경우 모두에서 노동조합은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저 나름대로 책을 정리하긴 했습니다만 사실 이 책은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도출하고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에 대한 일본의 사례를 차분히 정리하는데 더 크게 주안점을 둡니다. 그러니 독자 역시도 석탄산업의 사양화에 있어서 유의미한 참고사례를 꼼꼼하게 검토한다는 것에 독서의 목표를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양길에 접어든 석탄산업을 어떻게 구조조정할 것인지는 2024년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숙제입니다. 당장 2036년까지 전국적으로 28기의 석탄화력발전소가 폐기될 예정이라고 하지요. 이에 대한 대책이 당장 시급한 과제이지만, 관련 법안은 아직도 통과되지 못하고 아직도 논의 중입니다. 발전소가 사라진 후 해당 지역의 경제는 어떻게 할 건인지, 노동자의 고용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하나 같이 너무 큰 숙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숙제를 해결해야 하는 지역사회와 정치권을 비롯한 정책결정권자 모두에게, 이 책은 참고할 가치가 충분한 보고서라 하겠습니다.

 

  석탄산업의 사양화는 일본이 1970년대의 석유위기가 초래한 '중후장대형'(重厚長大型) 산업의 사양화 이전에 경험한 본격적인 산업 사양화였다. 1960년도에 682개였던 탄광 수는 1973년도에는 57개로 감소했으며, 탄광 기업은 같은 기간 205개에서 23개로 감소했다. 석탄 생산량은 1961년도에 전후 최고치인 연 5,541만 톤을 기록한 후 감소하기 시작하여 1973년도에는 2,093만 톤으로 축소되었으며, 1950년대 전반에 30만 명을 넘었던 탄광부 수는 1961년도에 20만 명 이하로 감소했고 1973년도에는 불과 2만 3,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탄광의 폐광과 실업자의 증가는 탄광이 입지하고 있던 지역의 인구 감소와 경제적 쇠퇴를 가져옴으로써 산탄(産炭) 지역의 경제 재건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규슈(九州) 북동부의 석탄 산지였던 지쿠호(筑豊) 지역에 소재하는 이이즈카시(飯塚市) 인구는 1960년에서 1975년 사이에 10만 4,000여 명에서 7만 5,000여 명으로 감소했고, 역시 석탄의 주요 생산지였던 홋카이도(北海道)의 유바리시(夕張市) 인구는 1965년에서 1975년 사이에 8만 5,000여 명에서 약 5만 명으로 줄었다. (5~6쪽.)

 

  탄로는 '직장 투쟁을 기축으로 한 정책 투쟁' 노선을 계속 투쟁방침으로 내걸었지만, 직장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산하 기업련의 투쟁은 활발하지 못했다. 이미 1962년 4·6 각의 결정 후의 노사관계 휴전 시기에도 일부 노조는 탄로를 제치고 직접 기업과 타협하여 합리화를 용인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책전환 투쟁이 일단락된 후에도 기업 내 협조를 최우선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기업 간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탄로의 지도는 기업 의식을 뚜렷이 해 가는 산하 노조와 유리되기가 십상이었다. 정책 전환 투쟁은 직장 투쟁의 에너지를 끌어올리지 못했으며, 또한 기업련에 대한 탄로의 장악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 정책 전환 투쟁은 석탄산업의 사양화와 '스크랩 앤드 빌드'를 기조로 하는 합리화 정책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대량의 탄광 이직자 배출이 불가피해졌다. 정책전환 투쟁의 큰 성과인 이직자 대책 및 산탄 지역 진흥 대책의 확충은 이러한 대량 배출된 이직자의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이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자발적 퇴직자(자기 사정에 의한 퇴직자)가 크게 증가했다(제2장 참조). 정책전환 투쟁의 결과 얻어 낸 석탄 대책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석탄의 '사양 무드'를 더욱 촉진하고 '퇴직 무드'를 조장하여 자발적 퇴직자의 증가"라고 하는 예상하지 못한 사태를 초래했다.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석탄산업 외부에서 장년의 육체노동자에 대한 대량의 수요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청장년층의 자발적 퇴직자가 많이 발생했다.
  (...)
  이상에서 정책전환 투쟁은 탄로의 노동운동이란 면에서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정책전환 투쟁은 직장에서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데도 실패했으며, 통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을 정도의 산하 노조에 대한 통제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또한 정책전환 투쟁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이직자 대책과 산탄 지역 대책은 탄광부의 이직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탄로 기반의 약화를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탄로의 교섭력은 강화되었다. (...)
  정책전환 투쟁의 이러한 결과를 타개할 새로운 활로를 탄로는 찾지 못했다. 정책전환 투쟁은 사회당의 일부에서 제기한 구조개혁론에 통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구조개혁론이 총평과 사회당에서 부정됨으로써 탄로도 구조개혁론 방향에서의 투쟁지침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노사관계를 대립적, 투쟁적으로 보는 기본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탄로는 정책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석탄 국유화 투쟁을 개시했지만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사양산업이라는 산업적 조건 속에서 탄로의 활동은 고령자 대책이나 일부의 조건 투쟁 지원으로 위축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사양산업에서의 전투적 노조 활동은 불가능한 것인가? 또 노조 활동의 범위는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적어도 탄로의 사례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모든 사양산업에서 노조 활동이 일방적인 후퇴와 조락을 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1980년대의 철강산업 불황하에 고용 문제와 지역사회의 쇠퇴가 문제가 되고 있던 무로란(室蘭市)의 경우, 신닛테쓰 무로란 노조(新日鉄室蘭労組)가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무로란시의 시직로(市職労)와 함께 지역 활성화 운동을 전개한 사례도 있다. (154~156쪽.)

 

  석탄산업의 경우, 그중에서 특히 고정자산, 퇴출 시의 고정비용, 정부 및 사회적 장벽이 높았다. 석탄산업은 지하에 매정되어 있는 자원을 채취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다른 지상 산업에 비해 고정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특징이 있다. 1960년의 경우, 석탄산업의 고정자산 비율은 64.12%로 이것은 제조업의 45.09%보다 약 20%포인트나 높은 수치였다. 더욱이 석탄산업의 고정자산은 다른 부문으로의 전용이 극히 곤란했기 때문에 그 청산가치는 낮았으며, 이것은 퇴출장벽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했다.
  탄광 기업이 퇴출 시에 지불해야 하는 고정비용, 예를 들면 광부 퇴직금, 광해(鑛害) 배상금 등은 방대한 금액이었다. 1962, 1963년의 폐광비용은 톤당 약 7,000엔, 1968년에는 톤당 1만 엔에 달했다. 즉, 1968년의 경우 연산 50만 톤 규모의 탄광을 폐광하기 위해서는 50억 엔이라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된다. (160쪽.)

 

  첫째, 석탄산업의 사양화에 따른 지역 사회의 피폐는 시장 원리에 의해서만은 극복되기 어려운 일이며, 정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일본 정부는 산탄 지역 대책에 거액의 자금을 투입했으며, 산탄 지역 문제에 무관심했던 한국 정부도 지역 주민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해서 두터운 지역 대책을 실시했다. 여기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영국과 같은 서유럽의 석탄 생산 국가들도 산탄 지역의 지원을 위해 광범위한 공적 자원을 제공했다.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지원은 사양화 과정에서 근로자나 지역 주민이 받는 고통을 완화하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두울 수 있었다. 반면, 미국과 같이 정부가 사양화에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은 곳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인 개입을 한 곳에 비해 사양화 과정은 광부와 지역 주민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
  둘째, 정부의 산탄 지역 대책의 효과는 지역의 자치 능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 주민의 자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면, 정부의 지원은 비효율적으로 사용되기 쉬우며 나아가서는 중앙정부 의존도를 심화하여 주민들의 자조적 노력을 도리어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
  셋째, 석탄자본의 성격은 기업의 지역에 대한 전략에 영향을 주었다. 펜실베이니아의 석탄산업을 지배하고 있던 뉴욕을 근거로 하는 금융자본은 무연탄 지역의 경제적 피폐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일본의 석탄 기업 중에는 지역의 토착자본에 의해 경영된 곳이 많았으며, 그들은 다각화를 통해 자신들의 탄광 소재 지역의 경제부흥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 한국의 경우, 석탄 기업의 지역 경제에 대한 기여는 거의 없었다. 탄광자본 성격에 대한 분석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가를 내리기에는 성급한 감이 있지만, 본래 지대 수취적 존재에서 출발하여 정부 보조에 의존하면서 성장한 탄광 대기업들은 산탄 지역에 대한 기업으로서의 책임감도 결여되어 있었고, 다각화 등을 통해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넷째, 노동조합은 미국, 일본, 한국 어느 국가에서도 지역 대책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것은 노동조합이 강력한 역할을 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이다. (217~220쪽.)

 

교정. 초판 1쇄

79쪽 밑에서3줄 : 스크립 -> 스크랩

217쪽 밑에서4줄 : 직면해서 역지 두터운 -> 직면해서 두터운

228쪽 9줄 : 차머슨 존슨(Chalmerson Johnson) -> 차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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