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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민주주의 (티머시 미첼, 생각비행,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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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민주주의 (티머시 미첼, 생각비행, 2017.)

Dog君 2024. 11. 4. 04:23

 

  마르크스주의는 한 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기본 틀거리로 생산양식modes of production에 주목했습니다. 생산수단의 소유 및 통제 여부를 중심으로 생산관계가 결정되고, 이에 따라 사회의 하부구조가 조직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문화 같은 상부구조도 결정되는 거구요. 그런데 티머시 미첼의 『탄소 민주주의』를 읽으면서, 어쩌면 탄소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에게도 생산양식과 비슷한 지위를 부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대의 전환점 중 하나가 탄소에너지의 사용(즉 산업혁명)이니까 말이죠.

 

  티머시 미첼의 『탄소 민주주의』는 탄소에너지의 사용을 중심으로 서구의 근대사를 되짚습니다. 이에 따르면 근대의 서구에서 노동계급이 조직화되고 정치적 권리를 신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석탄 중심의 에너지 구조 덕분이었습니다. 석탄은 채굴(생산)부터 가공, 수송에 이르는 거의 모든 과정에서 전통적인 노동계급이 개입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체제는 1차 대전을 전후하여 주요 연료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변합니다. 석탄과 달리 석유는 노동계급이 개입할 여지가 매우 좁습니다. 노동계급의 영향력을 대신한 것은, 노동자의 통제력이 작용하기 어려운 송유관과 고도의 설비와 지식이 요구되는 대규모 정제시설 같은 것들이죠. 이에 따라 서구 노동계급의 영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에 기초한 민주적 정치질서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지적은 일전에 읽었던 빅터 샤우의 『탄소 기술관료주의』와는 상당히 다른데요, 저는 그게 참 흥미롭습니다. 중국 동북 지역의 사회구조를 석탄을 중심으로 살핀 『탄소 기술관료주의』는 푸순 탄광을 중심으로 짜여진 '탄소 기술관료주의'적 체제가 수직적으로 위계화된 식민지배구조와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하지요. 똑같이 석탄에 기반했지만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당장 저로서는 이러한 차이가 빚어진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서구와 동아시아에서 노동계급의 지위가 상이했던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해보긴 합니다.

 

  (참고로, 이에 관한 제 지인의 질문에 대해 번역자께서는 '물질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두 저술은 공통점이 있고, 티머시 미첼의 책을 국가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본다면 양자의 논지는 비슷해질 수 있다'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자리에서 빅터 샤우와 티머시 미첼이 비슷한 결론을 도출한 적도 있다고 하구요. 여기서 "국가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본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아직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두 책을 서로 견줘가며 읽으면 재미가 훨씬 더 배가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어쨌거나 상황이 이러하니 애초부터 석유에너지에 기반하여 근대로 진입한 아랍 지역에서 하나 같이 반민주적·권위주의적인 정권이 들어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안정적인 석유 생산에만 몰두한 서구의 개입(책에서는 "위임 통치, 신탁 관리, 개발 프로그램"(217쪽.) 등을 지목합니다) 역시 민주적일리가 만무합니다.

 

  자, 그렇다면 탄소에너지 이후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새로운 민주적 질서를 가져올까요.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조심스럽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석유 매장량의 고갈에 대한 우려나 핵에너지의 부상만 해도 유가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자 한 석유 기업의 의도에 의해 촉발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당장 새로운 정치질서가 도래하리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재생에너지도 사정은 딱히 다르지 않습니다. 지역분산형 발전체계 같은 것들이 대안으로 거론되곤 합니다만, 이 역시도 에너지를 둘러싼 사회적·기술적 요소들이 연결되는 양상에 따라 전혀 의외의 결과를 빚어낼 수 있지요.

 

  정리하자면, 탄소에너지를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새로워지지는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탄소에너지 이후를 상상한다는 것은 단지 탄소가 아닌 다른 에너지를 대체하여 사용하는 정도의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에너지를 둘러싼 '민주주의' 자체를 재설계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고보면 탄소에너지 덕분에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가 누렸던 어떤 상태(아마도 '물질적 풍요')는 그저 잠시동안의 남가일몽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기준을 상상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성공적인 민주화는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민주적 정치 문화의 요소를 갖춘 시민을 필요로 한다"라는 것이 프로젝트의 전제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시민 문화(신뢰, 관용, 상호 존중과 여타 자유주의적 덕목들)의 존재가 민주주의의 출현을 촉진한다는 주장에는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실제로 그 반대를 암시하는 역사적 증거가 훨씬 많다. 서구의 민주주의 투쟁사에서 그 사례를 반복해서 찾아볼 수 있는데, 관용적이고 교육받은 자유주의적 정치 계급은 무산자, 종교적·인종적 소수집단, 여성, 피식민지인의 정치적 권리 확대를 가로막은 민주화의 적이었다. 많은 경우 지배적 정치 계급이 갖춘 자신들이 스스로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곤 했다. 일단 민주적 권리가 성취되고 나면, 그들의 행위는 적어도 확장된 정치 계급의 일원들 사이에서는 시민적 덕목의 계발을 장려할 수 도 있는데, 그 덕목의 주입과 실천은 사람들을 민주적 권위에 종속시킨다. 반면에 민주화는 그러한 태도에 맞선 전투이곤 했다. 여기에는 보다 비타협적인 참여와 실천이 요구되었다.
  이 책은 그러한 보다 비타협적인 태도에 관한 것으로, 탄소 에너지가 비타협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주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됐던 방식들을 다루려 한다. (15~16쪽.)

 

  우리는 산업화를 (그리고 뒤따라 출현한 민주주의를) 화석연료에 기초한 도시의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산업화는 에너지의 유기적 형태에 기초한 농업의 (그리고 식민지의) 변화에 달려 있었다. 과거 연료 공급을 위해 남겨뒀던 삼림 지역을 방목과 경작에 사용함으로써 북유럽의 석탄 사용은 농지 확대에 기여했다. 하지만 화석 에너지의 발전은 태양 에너지에 기초한 생산을 위해 필요한 토지와 노도역을 유럽 외부에서 훨씬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수단을 필요로 했다.
  유럽이 필요로 했던 산업 원자재는 두 가지 이유에서 무역 관계만으로 확보할 수 없었다. 첫째, 농업 인구는 대개 자신의 땅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주로 자신의 필요를 위해 농사를 지으려 했고, 소량의 잉여분만 수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유럽은 화석연료로 생겨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사람들이 태양 에너지에 기초한 생산에 이례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강제할 방법이 필요했다. 둘째, 한 지역이 기술적으로 유리한 새 공정을 개발하면 보통 다른 지역들도 최대한 빨리 그 혁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석탄 기반의 에너지 시스템은 모방하기 훨씬 어려웠고, 또한 모방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대규모 석탄, 철광 매장지는 몇몇 장소에 집중돼 있었고, 유럽은 석탄으로 인해 급증하게 된 에너지 덕분에 순식간에 여타 지역보다 상당히 유리한 출발을 할 수 있었기에 이 에너지 시스템을 모방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제 유럽은 면화나 설탕 같은 태양 에너지 기반 생산물을 얻기 위해 해외의 넓은 땅이 필요해졌는데, 만일 이들 지역이 화석연료 기반의 제조업을 도입한다면 자신의 유기적 에너지 시스템을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활용하게 될 것이기에 유럽으로서는 석탄 기반의 에너지 시스템이 모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무역 관계에 의존할 수 없었기에 유럽은 해외에서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한 대안이 필요했다. 즉 무엇을 경작할지 결정하는 통제권을 빼앗고 현지의 산업화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신대륙에서 설탕과 면화를 생산할 토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유럽인은 현지인의 땅을 수탈하고 노예나 계약 노동력을 들여왔다. 농업 인구를 일제히 내쫓을 수 없는 곳(대표적인 예로 인도와 이집트)에서 유럽인과 현지의 부역자는 토지 사유권으로 알려진 국지적 탈취localised dispossession라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은 농업 수익에서 일정 몫을 요구하는 과거 방식을 '토지 소유자'로 지정된 청구자가 재배할 작물을 정하고 그 생산물에 대하여 배타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체계로 대체한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 질서를 구축한 유럽은 태양 에너지 기반의 대규모 생산 기지를 확보하여 막대한 농산물을 유럽에 공급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 도시들은 집약적인, 석탄 기반의 대량 생산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
  187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전환기는 민주화의 시대이자 제국의 시대로 불려왔다. 민주화되고 있는 이 새로운 정치적 힘을 집결하는 것은 도시와 제조업에서의 인구 집중에 달려 있었는데, 이는 전례 없이 많은 양의 재생 불가능한 탄소 저장물의 흐름을 조직함으로써 가능해진 집합적 생활 방식과 관련되었다. 이와 동시에 10년마다 공급이 50퍼센트씩 증가하는 화석연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식민 통치를 빠르게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식민지 영토들은 석탄과 증기력에 기반을 둔 동일한 에너지 흐름의 조합에 연결되었지만, 유효한 정치적 요구를 만들어내는 데는 쉽게 활용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었다. 석탄의 등장이 왜 어떤 곳에서는 민주주의를 낳고 다른 곳에서는 식민 지배를 낳았는지 이해하려면, 성공적인 집합적 요구를 조직하는 데 화석 에너지의 흐름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더욱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35~38쪽.)

 

  (...) 에너지의 흐름과 집중은 광부들의 요구를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연결시키고, 그들의 주장에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기술적 힘을 부여했다. 파업이 효과적이었던 것은 탄광이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땅속의 탄광을 공장과 사무실, 가정 또는 증기나 전력에 의존하는 운송 수단 등 모든 곳으로 연결시키는 탄소의 흐름 때문이었다.
  (...) 석탄과 국가의 산업 중심지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없었다면, 광부들은 투쟁을 통해 지역 에너지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없었을 것이고 북유럽과 미국에서 누렸던 정치적 힘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41쪽.)

 

  총파업의 시작을 알렸던 웨일스 남부의 석탄 파업은 특히 해군에게 위협이 되었다. 웨일스의 석탄 지역은 증기 기관용 석탄을 생산했는데, 열량이 높은 무연탄이면서 신속하게 열을 생산하는 성질이 결합된 혼합 품질의 원료로 석탄 연소 전함의 유일한 연료원이었다. 해군성에서 처칠은 해군 함정을 석탄 연소 증기 기관과 석유 연소 증기 기관에서 석유를 쓰는 내연 기관으로 전환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즉시 연료와 엔진에 관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 on Fuel and Engines를 꾸렸다. 웨일스 석탄 지역의 정치적 불안은 해군성의 입장에 영향을 미쳤다. 석탄을 포기하고 석유로 대체한다는 결정에 또 다른 유인을 제공했고, 결과적으로 해군의 정책을 앵글로-페르시안 오일에 유리하게 바꾸었다. 해군이 새로운 에너지원에 집중하게 되면서 정부는 스스로 석유 기업들의 독점적 힘에 취약해져갔다. 동시에 석탄 광부들의 정치적 요구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 큰 봉기가 일어난 멕시코 유전과 웨일스 남부의 탄광과 비교해 페르시아 남부와 메소포타미아 인근의 유전 지대에는 민주적 요구에 훨씬 덜 양보하고 에너지를 확보하는 방법들이 있었다.
  처칠이 말한 요정 나라의 선물은 (곧 이란과 이라크가 되는)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석유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에너지원이었다. 전쟁의 위협과 발발로 영국은 자국 내에서 총파업을 끝낼 기회를 얻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메소포타미아의 유전을 지배하는 것은 조직화된 노동의 새로운 힘을 약화시키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는 조직화된 노동의 힘이 약화되었지만, 에너지 공급을 통해 구축된 정치적 요구에는 해외 석유 노동자들의 요구도 포함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국 정부가 치안을 유지하는 특별한 힘이라고 주장했던, 제한적이지만 필수적인 경제적 '구조', 즉 에너지 흐름의 네트워크는 이제 영국의 철도와 탄광에서 확장되어 중동의 유전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101~104쪽.)

 

  전후 이라크에서 영국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고자 고심했던 이들에게 문제는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라기보다는 아널드 윌슨 같은 제국주의자들의 '윌슨주의적' 시각이었다. 인도에서 훈련받은 해외 식민지 관료든 아니면 국내의 강경 내각 인사든, 이 제국주의자들은 영국이 이라크에 대한 직접 통치 체제를 수립하길 원했다. (...) 이들은 또한 인도와 이집트 같은 나라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기를 원했다. 일반적으로 영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토착 국가들을 직접 합병함으로써 제국의 통제력을 획득하지 않았다. 비록 제국 권력이 무장 폭력에 빈번하게 의존했고, 무역항과 여타 전략적 거점을 강제로 장악하곤 했지만, 제국의 팽창은 주로 침투 방식과 점진적인 통제력 탈취에 의해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토착적 형태의 권력과 법질서의 보존이 필요했다. 비록 그런 형태들이 그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1858년의 인도 봉기 이후에, 그리고 1882년 이후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 지배의 확대와 함께 영국은 원주민 통치를 위한 보다 정교한 독트린과 책략을 발전시켰다. (140쪽.)

 

  통화 체제는 물질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기술적 과정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계산 장치이기도 하다. 이전의 메커니즘인 금본위제는 원래 석탄과 증기의 힘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금 보유고는 더 이상 국제 금융 거래를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없었는데, 유럽의 동맹국들이 석탄, 석유 및 다른 전쟁 물자의 수입 대금으로 미국에 자신들의 금괴를 모두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금 보유고의 80퍼센트를 축적했다. 브레턴우즈에서 미국은 이 금을 기반으로 달러의 가치를 고정하는 데 동의해 금 1온스당 34달러로 정했다. 다른 참가국들은 달러가 고정된 비율로 금과 태환될 수 있는 유일한 준비 통화reserve currency이며, 자기 나라의 통화 가치는 달러에, 결국 미국의 금 독점에 간접적으로 연동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하지만 달러의 유통은 곧 미국의 금 보유고를 넘어서게 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이는 석탄보다 이동이 쉬운 석유의 흐름에 따라 가속화되기 시작한 세계 교역의 성장 속도를 따라갈 만큼 남아프리카의 금광들이 금 생산을 늘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달러의 가치를 유지시킨 것은 각국이 국제 교역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필수 자재, 무엇보다 석유를 구매하는 데 미국의 통화를 이용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172~173쪽.)

 

  (...)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마셜 원조 프로그램을 중동으로 확대하길 거부하고, 대신에 포인트 포 프로그램Poiunt IV Programme을 제공하기로 했다. 트루먼은 미국이 세계의 "저발전 지역들"과 자본이나 물질적 부를 함께 나눌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왜냐하면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워싱턴이 주게 될 것은 아이디어였다. 미국 기업들에게 "끊임없이 확장"되고, 물질적 부와는 대조적으로 "소모되어 사라지지 않는" 자신들의 "기술적 지식 등 헤아리기 어려운 자원들"을 공유하도록 장려했다. 기술적 노하우는 각국이 자신의 현존 물질 자원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식량과 의복, 기계동력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었다. 개발이라는 아이디어는 미국의 비서구와의 관계에서 보조적이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역할은 일부의 예외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수준과 대다수 사람들의 평범한 생활수준 사이의 차이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한다기보다는 그 차이를 관리하는 것에 불과했다. (185쪽.)

 

  경제라는 새로운 대상의 핵심적 특징이 화폐 유통 과정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경제는 물리적으로 더 커지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부에 대한 과거의 사고방식은 성장의 한계가 있는 물리적 과정, 즉 도시와 공장의 확대, 식민주의적 영토 확장, 금 보유고의 축적, 인구 성장과 이민자 흡수, 새로운 광물자원의 채굴, 상품 교역량 증대 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물리적 한계를 내포한 공간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이었다. 1930년대에는 이러한 한계에 도달한듯 보였다. 서구의 인구 증가는 정체했고, 미국과 유럽 제국의 식민지 팽창은 종결되었고 반란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탄광은 고갈되는 중이었고, 농업과 공업은 과잉 생산에 직면했다. 하지만 국민 소득 계정이라는 새로운 계산 도구로 측정되는 경제에는 분명한 한계가 없었다. 이후 국민 총생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국민 소득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화폐가 돌고 도는 속도와 빈도를 측정했다. 그것은 물리적 또는 영토적 한계의 문제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석유는 경제를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새로운 구상에 몇 가지 기여를 했다. 첫째, 유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할 경우 1970년의 석유 1배럴당 가격은 1920년 판매가의 3분의 1이었다. 결국 점점 더 많은 양의 에너지가 사용되었음에도 에너지의 가격은 경제 성장의 한계를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경제학자들은 계속 증가하는 물리적 에너지 소비량을 고려하지 않고 자본과 노동의 투입만을 측정하여 경제 성장을 설명했다. 이는 설명되지 않은 '잔여' 성장을 남겼는데, 경제학자들은 오래도록 이것이 그들이 '기술'이라 부르는 경제학 모델 외부의 요인 탓으로 돌리려 했다.)
  둘째, 석유는 비교적 풍부했고 해상 운송이 용이했기 때문에 고갈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될 수 있었다. 유가에는 자원의 고갈에 대한 계산이 포함되지 않았다. 국민 총생산 기준으로 측정된 경제 성장은 에너지 자원의 소모에 대한 계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의 학술적 공식화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 작업들―케인스의 《일반 이론》, 힉스John Richard Hicks의 《가치와 자본Value and Capital》, 새뮤얼슨Paul Anthony Samuelson의 《경제 분석의 기초Foundations of Economic Analysis》, 그리고 애로우-드브뢰Arrow-Debreu 모델―은 에너지의 소모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950~1960년대 성장의 경제학은 장기 성장을 에너지의 이용 가능성에 제한되지 않는 무언가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대기 오염, 환경 재앙, 기후 변화 등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부정적 결과의 비용은 국민 총생산에서 공제되지 않았다. 경제의 계측은 유리한 비용과 해로운 비용 사이의 구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석연료가 야기하는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출의 증가는 성장에 대한 장애물이라기보다는 부가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여러 방식으로 석유의 이용 가능성과 공급은 경제와 경제 성장이 20세기 중반 정치의 새로운 핵심 목표가 되는 데 기여했다. (211~213쪽.)

 

  중동의 유전과 송유관, 그리고 이와 함께 구축된 정치 질서는 케인스주의 경제와 그것이 중심 역할을 한 민주주의의 형태가 조합될 수 있도록 도왔다. 민주 정치는 석유 덕분에 미래를 향한 특유의 정향과 더불어 발전했다. 미래는 곧 무한한 성장의 지평이었다. 이 지평은 풍요로운 시절의 어떤 자연적 반영이 아니라 '경제'라 불리는 새로운 세계라는 견지에서 전문 지식과 그 대상을 조직하는 특정 방식의 결과였다. 계산 방법, 화폐 활용, 거래 측정과 국가 통계의 취합에서 일어난 혁신들은 정책의 중심 목표를 어떤 궁극적인 물질적 제약도 없이 크기를 키울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 '탄소 민주주의'라는 용어의 의미는 확장되었다. 우선 그것은 대중 민주주의의 발흥에서 석탄의 역할을, 그리고 그다음에는 석유의 역할을 지칭한다. 석유는 상이한 장소와 특성 그리고 통제의 양식을 갖고서 석탄에 대한 의존으로 가능했던 민주적 형태의 기구들을 약화시킨다. 이제 석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보다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전후 시대에 민주 정치는 석유로의 전환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두 가지 새로운 방식의 발전에 의해 변화했는데, 그 둘 모두 석유로부터의 에너지 사용이 증가하면서 가능해졌다. 하나는 화폐 가치를 관리하고 금융 투기 세력을 제한하는 질서로서, 이는 전간기의 민주주의―송유관, 석유 협정, 석유의 공급과 가격 책정을 조직했던 과두제로 만들어진 체제―를 파괴했다. 이는 위임 통치, 신탁 관리, 개발 프로그램 등 제국주의 권력의 버팀목들을 대체한 전후 중동 통치의 틀을 제공한 냉전의 구축을 수반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지배 양식은 '경제'―그 전문가들이 민주적 토론을 대체하기 시작하고, 그 메커니즘이 평등주의적 요구들에 제한을 가하는 대상―의 형성이었다. (...) (216~217쪽.)

 

  (...) 이라크의 자본가들은 대토지를 유지하면서 제조업을 통해 부를 쌓는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없었고, 이후에는 석유로 부유해진 정부가 필요로 하는 교역, 계약과 여타 서비스에서 기회를 누리게 될 것이었다. 제조업은 사보타주에 취약한 인간-기계의 복잡한 과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대규모 산업 노동자들이 효과적인 정치적 요구를 할 수 있지만, 석유를 국가가 통제하면 수익이 국가에 집중되어 정부의 권력이 점차 강화하는 동시에 대중 세력에 대한 의존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222~223쪽.)

 

  7대 거대 석유 기업들의 관할권 밖에서 석유 산업을 개발해온 아랍 국가들은 이미 국가적 통제력을 확보했다. 시리아는 1964년 소규모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고, 알제리는 1971년 2월 프랑스가 건설한 산업의 소유권을 대부분 획득했으며, 리비아는 1971년 12월 외국인 소유 석유 생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이라크는 지배적인 영국-미국 카르텔과 석유 통제력을 다투는 최초의 중동 산유국이 되었다. 4월 루마일라 유전의 생산이 시작되자 이라크석유회사는 북부에서의 생산량을 절반으로 줄였다. 긴축 조치를 준비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두 명의 공산당 지도자를 내각에 포함시킨 뒤 바트당 정부는 1972년 6월 1일 이라크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산유국에서 석유 노동자나 석유 기업들이 사보타주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은 점차 정부에 의해 장악되었다. 근위병과 정보국으로 무장한 정부는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외국이나 국내에서 조직되는 군사 쿠데타에 저항력을 갖게 되었다. 산업국에서 "억제력"은 다른 변화를 겪었다. 석유의 발흥은 광부, 철도원, 항만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그들에게 전례 없는 힘을 부여했던 석탄의 낡은 동맹을 약화시켰다. 1948년이 되자 석탄에서 석유로 지원 대상을 바꾼 마셜 플랜의 역할에 힘입어 대규모 파업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산업 공정을 교란시키는 새로운 전술에 기초하여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했다. (229~230쪽.)

 

  석유 매장량의 고갈에 대한 우려는 "성장의 한계"의 정치 그리고 '경제'에 대한 대안적 프로젝트로서 '환경' 보호의 등장과 때를 같이 했다. 묘하게도 석유 기업들 스스로가 환경을 정치의 경쟁 대상으로 만들도록 촉발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석유 기업들은 석유의 대량 유출을 초래한 석유 시추와 운송 방식을 택하여 이를 둘러싼 환경주의자들의 운동이 조직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에 일조했다. 또한 석유 기업들은 세계 석유 매장량에 대한 계산 방식을 바꿈으로써 환경이 정치적 관심사가 되는 데 공헌했다. 1971년 석유 기업들은 석유를 거의 무한한 자원으로 낙관적으로 보았던 계산 방식(경제의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전후 경제 이론들을 뒷받침했던 계산 방식)을 돌연 포기하고, 석유의 종말을 예측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지질학자들의 석유 매장량 고갈에 대한 논쟁은 더욱 광범위하게 회자되었다. (...) 로마클럽Club of Rome은 《성장의 한계》를 발간했는데, 이는 "인류의 위기"에 관한 로마클럽의 프로젝트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이 구축한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만약 에너지 소비, 자원 소모, 산업화, 오염, 식량 생산, 인구 증가가 지금 추세대로 계속된다면 "향후 100년 안에 이 행성은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탄화수소의 연소로 발생하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누적과 그 결과로 유발되는 지구 온난화의 위협과 더불어, 보고서의 경고는 석유 산업 그리고 에너지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 시장 모델을 이용해온 경제학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었고, 그들은 자원의 고갈과 성장의 한계에 대한 질문에 답할 길이 없어 보였다.
  (...) 지구의 벗을 비롯해 유사한 단체들이 석유 채굴, 핵발전, 석탄 화력 발전으로 인한 탄소 배출 등의 이슈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알래스카 송유관은 여러 연료·전력 산업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석유 산업과 백악관은 '에너지 위기'를 이용해 이 도전에 대응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더 높은 유가는 희소하고 고갈될 수 있는 에너지원인 화석연료를 보존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 운동이 핵발전 산업으로 대표되는 더 심각한 위협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핵발전 개발을 높은 에너지 비용과 화석연료 고갈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았다. 이는 또한 닉슨 행정부가 제시한 에너지 위기의 해결책이기도 했다. 1950년대에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핵융합의 발전으로 "몇 십 년 안에 에너지를 무한한 공기처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석탄과 석유는 그 특성에 가장 잘 맞게 유기 화학 합성을 위한 원자재로 주로 사용될 것이다"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1970년대까지 그 비용에 대한 예측은 덜 낙관적이었으나 정부가 새로운 고속증식로 개발을 위해 대규모 재원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당시 석유 산업이 향유하고 있는 높은 수익을 위협할 만한 가격으로 에너지가 생산될 위험이 있었다. 환경 운동은 석유에 대한 이러한 위협을 줄이는 데 일조할 수 있었다. 핵발전은 사고 위험과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비용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환경 운동은 핵에너지의 비용을 만만치 않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고, 핵발전이 화석연료의 저렴한 대체제가 되기 어렵게 했다.
  큰 폭의 유가 상승은 석유 기업들에게 위험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핵발전과 같은 경쟁 에너지원의 가격을 지불할 만한 수준으로 만들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 석유 기업들이 핵발전소들에 그 장기적 환경 영향을 복구하는 비용―을 에너지 가격에 포함해 판매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면, 핵발전은 석유보다 더 비싼 채로 남게 될 것이었다. 그러한 계산을 촉진하려고 석유 기업들은 환경을 정치의 새로운 대상으로 삼는 프레임을 짜는 노력에 동참했고,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을 정의하고 보정했다. (...) (284~289쪽.)

 

  환경 정치의 프레임을 만드는 데 있어서 석유 기업들의 역할은 우리가 지금껏 고려하지 못했던 석유와 민주주의의 관계의 또 다른 차원을 제시한다. 석탄 생산과 비교할 때 석유 생산은 전문 지식이 다른 방식으로 투입되고 배분되었다. 나는 앞서 석탄 광부들의 민주적 투쟁성은 (대규모로 기계화되기 이전에) 광부들이 탄광 막장에서 행사하는 자율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광석을 캐는 사람들의 자율성은 그들의 손에 상당량의 전문 기술을 가져다주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석유는 노동자들을 땅 위에 남겨두며 생산 관련 전문 지식 중 많은 양을 기술자와 관리자의 사무실에 넘겨준다.
  이러한 차이점은 광물 채굴 이전의 시점에서도, 그리고 채굴 이후의 상황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석탄 산업에서 접근 가능한 탄광은 지질학적으로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채굴은 경제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탐사를 위해 대규모 재원을 투자하지 않았다. 석유 산업에서 탐사는 규모가 크고 자본 집약적인 부분으로, 기업들은 여기에서 많은 수익을 얻는다. 대기업들은 신규 유전 발견을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 전문 지식을 갖춘 광범위한 조직에 의존한다.
  게다가 한번 캔 석탄은 바로 사용할 수 있다. 세정과 분류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화학적 변형은 필요치 않다. 한편 석유는 원유라 불리는 사용 불가능한 형태로 땅 밖으로 나온다. 원유는 반드시 가열로에서 달궈지고, 분별 증류를 통해 다른 성질의 탄화수소들로 분리되고, 사용 가능하고 균일한 생산품이 되기 위한 추가 공정을 거쳐야 한다. 1장에서 보았듯이 애초에 석유는 주로 조명용 등유로 사용되었고, 이보다 무거운 석유는 증기 보일러의 연료로, 그리고 나머지 광유mineral oil는 윤활유로 사용되었다.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휘발유와 더 가벼운 부산물은 폐기물로 간주되었다. 석유 기업들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 연구개발 부서를 꾸려서 이 사용되지 않는 부산물의 이용법을 찾아냈고, 유통·판매 부서는 그 사용을 촉진하도록 했으며, 정치·홍보 부서는 그것들이 필요한 사회를 건설하도록 도왔다. 주요 석유 기업들은 석탄 산업을 포함해 다른 산업들의 전문 지식을 가로막기 위해서도 협력했다. 주요 석유 기업들이 1928년에 형성한 카르텔은 단순히 석유 생산을 조절하는 것뿐 아니라 석탄 기업들이 합성 오일synthetic oil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허의 사용을 막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보다 광범위한 탄화수소 카르텔이었다.
  석탄 기업들에 비해 석유 기업들은 더 크고 확장된 전문 지식 생산 네트워크를 발전시켰고, 이 네트워크는 그들의 생산품이 더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에 더 깊숙이 관여했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 석유 산업은 1967~1974년 위기에 대응할 준비를 잘 갖추고 있었다. 석유 수익에서 더 많은 몫을 요구하는 산유국들과 탄소 민주주의에 대한 환경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주요 석유 기업들은 대중 홍보, 판매, 계획, 에너지 연구, 국제 금융, 대정부 관계 등 폭넓은 자원을 끌어올 수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은 위기의 성격을 규정하고 특정 해법을 도모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다. (289~290쪽.)

 

  위에서 논의한 세 가지 분쟁(이란, 아프가니스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옮겨쓴이) 중 어느 것도 미국에 의해 시작되지는 않았다. 각각의 사례에는 현지 당파들이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갈등 혹은 국제 분쟁이 이미 존재했다. (...) 미국은 중동의 전 지역에서 폭력 사용에 폭넓게 관여했고, 이러한 관여의 수단으로 막대한 재정 지원을 했으며, 정상적인 정치적 수단으로 분쟁의 장기화에 대한 의존을 증가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들의 개입과 차원을 달리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20세기의 마지막 25년을 중동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시기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감안한다면, 갈등의 영속화는 미국의 상대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였다. 중동 지역의 여러 곳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하고, 무력으로도 통제할 수 없게 된 탓에 미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현지 권력들을 약화시키는 차선책으로서 장기전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329~330쪽.)

 

  (...) 한 세기 전 석탄의 광범위한 사용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힘을 가져다주었다. 유례없는 양의 연료가 고정된 좁은 통로를 통해 탄광으로부터 나와 철도와 수로를 통해 공장과 발전소로 이동했는데, 이 좁은 통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모든 에너지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취약한 통과 지점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힘에 의해 약해진 서구의 정부들은 모든 시민에게 투표권 부여, 부자들에게 새로운 세금 부과, 의료 서비스 및 산업재해와 실업에 대한 보험 제공, 퇴직연금을 비롯한 기본적 복지 제공 등의 요구를 수용했다. 더 평등한 집합 생활을 위한 민주적 요구는 석탄 공급의 흐름과 중단을 통해 발전했다.
  20세기 후반 각국 정부는 노동자들이 획득한 이 이례적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은 석탄에서 석유나 가스 사용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1940년대 초 워싱턴의 마셜 플랜 입안자들은 석탄 노동자들을 약화시키고 좌파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중동에서 서유럽으로 들여오는 석유 수입 비용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주장했다. 몇 십 년 뒤 영국에서는 좌파의 힘을 강화시켰던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공격이 절정에 달했는데, 당시 수상이었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내부의 적"이라고 규정한 영국 내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을 제거하기 위해 보수당 정부는 영국에 남아 있는 탄광 대부분을 파괴했다. 전국광부노동조합National Union of Mineworkers은 석유 공급이 막힘으로써 발생한 파운드화의 붕괴로 초래된 1967년 금융 위기 상황에서 조직화된 노동자와 국가 사이의 투쟁을 이끌었고, 1974년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또다시 에너지 공급 위기 상황을 이용하려는 보수당 정부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10년 후 핵발전소의 발전과 북해의 유전 및 천연가스전의 발견은 국가가 석탄에 의존한 전력 생산을 끝낼 수 있는 방안을 정책 입안자들에게 제공했다. 1984년 보수당 정부는 광부들에 대항하는 전쟁을 재개할 수 있었고, 탄광 폐쇄의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이어진 파업은 1926년 총파업 이래 영국 역사상 가장 길고 격렬한 노동 쟁의였다. 정부는 전국광부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실패했지만, 6년 후 국가 안보 기관인 MI5는 미국 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아 전국광부노동조합 지도부가 리비아 지도자인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거짓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 리비아와 관련된 근거 없는 주장은 전국광부노동조합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무너뜨리고 약화시키는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정부는 1982~1983년에 2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던 영국의 탄광업을 끝장내려는 계획을 완수할 수 있었다. 2009년에는 겨우 다섯 곳의 장벽식 탄광만이 가동되었다.
  유럽이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면서 다란, 아바단, 키르쿠크의 석유 노동자들이나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해안의 정유소 노동자, 송유관 터미널 노동자들이 광부들이나 철도 노동자들이 보여주었던 초기의 성공을 따라 하기는 매우 어려워졌다. 철로가 아닌 송유관을 통해 이동하는 석유는 바다를 가로지르기에 충분히 가벼웠으며, 훨씬 유연한 네트워크를 따라 이동했고, 무엇보다 에너지가 생산되는 장소와 사용되는 장소 사이의 분리를 만들어냈다. 석유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는 국유화 계획으로 대체되었고, 생산 카르텔이 공급을 제한할 수 있는 상황에서 20세기 내내 발생한 석유의 과잉 공급은 석유를 지키기 위한 제국의 군대와 속국을 필요로 하는 취약한 '전략 자원'으로 변화했다. 이외에도 석유 산업의 여러 사회-기술적 특성들이 석유의 생산으로부터 더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만드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355~357쪽.)

 

  현대의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는 현대 과학의 발전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단계로 묘사되곤 한다. 과학적 이해 방식은 우리가 처음으로 자연과 사회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즉 한쪽에는 자연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열정, 믿음, 사회 세력과 정치권력이라는 인간의 세계가 있도록 집합 생활을 조직할 수 있게 했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만약 이것이 '근대성modernity'을 뜻한다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늘 기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복잡하게 얽힌 세상에서 살아왔다. 우리가 직면한 논쟁들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세상은 기술적, 자연적, 인간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어떠한 기술적 장치나 사회적 과정도 다른 종류의 물질, 힘과 결함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인지, 기계적인 힘, 기회, 저장된 기억, 자동 기계, 유기물질 등과의 다양한 결합이 포함된다. 기술적 혁신이나 새로운 방식의 에너지 사용, 또는 대체 동력 자원의 개발을 도입하면서, 우리는 '사회'를 어떤 새로운 외부 영향에 종속시키지 않으며, 반대로 사회적 힘을 '자연'이라고 부르는 외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기술적 세계를 재조직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사회적, 자연적, 기술적 과정이라고 일컫는 것이 모든 지점에서 나타난다. (359~360쪽.)

 

  20세기 중반 산업화된 주요 국가들에서 출현한 민주주의의 형태들은, 세계의 한정된 탄화수소 저장고로부터 획득한 엄청나게 농축된 에너지에 의해, 그리고 그 에너지를 채굴하고 분배하는 데 필요한 사회-기술적 질서에 의해 가능했으며, 그에 따라 형성되었다. 그러나 에너지의 생산이 중동의 석유로 이동했을 때 그러한 변화는 산업 민주주의의 출현을 좌우했던 탄소 기반의 정치적 동원의 형태들을 서구와 중동 모두에서 확대하기보다는 취약하게 만들었다. 석유의 특성, 석유가 흐르는 네트워크, 그리고 에너지와 금융, 다른 대상들의 흐름들 사이에 형성된 연결들에 대한 탐구는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과 힘들 사이의 관계들이 구성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관계들은 에너지와 정치, 물질과 관념, 인간과 비인간, 계산과 계산의 대상, 재현과 폭력의 형태,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었다. (380~381쪽.)

 

  석유가 형성한 사회-기술적 질서의 특성이 제한적인 민주주의만을 가능하게 했다면, 또 다른 에너지원으로 부상하고 있는 재생 에너지원이 만들어낼 사회-기술적 질서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재생 에너지 기술의 분산적 특성, 소형 발전의 가능성 덕에 일반 시민도 에너지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점, 에너지원이 분산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지정학적 지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생 에너지원은 민주적 에너지원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기술이나 에너지원의 특성이 곧 민주주의의 대중화를 가져다주었지만 중동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처럼 에너지원, 물질의 특성이 민주주의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재생 에너지원과 다른 여러 행위소가 어떤 연결망을 형성하는가에 따라 민주주의의 유형과 내용은 달라질 것이다. (...) (박진희, 「해제 - '탄소'라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민주주의 바라보기」, 406쪽.)

 

교정. 초판 1쇄

140쪽 12줄 : 빈빈하게 -> 빈번하게

173쪽 16줄 : 청설하는 -> 창설하는

180쪽 2줄 : 다음 장의 -> 앞 장의

211쪽 밑에서2줄 : 금보유고의 -> 금 보유고의

296쪽 15줄 : 케이즈주의적 -> 케인스주의적

302쪽 9줄 : 라덴를 -> 라덴을

340쪽 2줄 : 외각 -> 외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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