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앙코르 인문 기행 (쟝쉰, 펄북스, 2018.) 본문

잡冊나부랭이

앙코르 인문 기행 (쟝쉰, 펄북스, 2018.)

Dog君 2018. 10. 3. 14:03


1. 수원에서 열린 지역도서전에 갔다가, 펄북스 부스에서 강력한 추천을 받아서 구매. (‘강매’는 아니고...) 


2-1. 좋으나 싫으나 역사학 언저리에 엉덩이 걸치고 살아온 것이 얼추 10년쯤 됐다. 그러다보니 아래저래 답사 다닐 일이 많다. 여행 다니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답사 다니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음, 그런데, 답사와 여행의 차이는 뭘까. 


2-2. 이런 질문이 나오면 흔히 한자를 파자해서 ‘썰’을 풀곤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보겠다. 여행旅行이라는 글자에는 두인변(彳, 그냥 쓰면 ‘자축거릴 척’이 된다고 한다)이 있고, 모 방(方)이 들어있다. 두인변은 말 그대로 사람의 움직이는 모양이라고 하고, 모 방이면 귀퉁이 혹은 방향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여행이라는 글자에 이미 돌아다니는 것, 즉 이동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내가 평소에 있는 곳과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는 것, 그리고 그 때 느껴지는 낯섦이 여행의 목적 아닐까. 반대로 답사踏査라는 글자에는 다리 족(足)이 눈에 띈다. 아마도 발로 디디고 선 모양 내지는 발로 밟아가는 모양이라고 하겠다. 두 발로 천천히 꾹꾹 밟아가면서 공간을 음미하는 것, 그게 바로 답사의 본령일테지. (이런 식을 썰 푸시는 아재들 많이 보셨죠?) 


2-3. 혹자는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나는 꼭 아는 것이 많아야 많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를 공부한 이가 바라보는 공간이란, 그 공간에 누적된 시간축을 읽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그보다는 공감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답사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답사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이 보는 것보다, 적은 곳을 돌아다니더라도 깊이 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보다는 최대한 적은 사람이(혼자가 가장 좋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차분하게 공간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밍, 1월의 어느 날이네. 나는 앙코르와트 앞에서 여명을 기다리고 있어. 적도에 가까운 캄보디아에는 사실 겨울이 없네. 온도가 가장 낮다는 1월에도 한낮 기온은 섭씨 38도까지 올라가고,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지고 나서야 온도가 25도 정도로 떨어진다네.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는 쾌적해서 정말 좋군. 현지 사람ㄷ르이 이 계절에는 새벽 6시 15분 정도면 일출을 볼 수 있다고 알려주어 새벽 5시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5시 반에 앙코르와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은 온통 별로 가득했고,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은 마치 성대한 여명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 같았지. 

  앙코르와트로 통하는 길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어. 이렇게 많은 여행객들이 새벽에 일어나 찾을 만큼 앙코르와트의 일출은 매력적이라네. 앙코르와트 입구에 도착하니 사방에서 모인 사람들이 더 많아졌는데, 다행히 사원 앞 광장은 아주 컸어. 해자의 폭은 190미터에 달하고 참배로의 길이는 475미터, 입구인 5개 탑문의 폭은 350미터에 달했네. 이렇게 넓게 설계한 곳이라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들어와도 북적이지 않고 여유롭더군.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은 한 곳에 모여 있고,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간섭을 받지 않는 구석에서 혼자만의 고요함을 누린다네. (pp. 116~117.) 


3. 그래서 그런가, 앙코르와트를 꾹꾹 밟아가는 듯한 쟝쉰의 여행기에 공감가는 바가 크다. 조각상과 건물이 얼마나 거대하고 아름다운지를 찬탄하는 것을 넘어서, 수백년도 더 전에 그 공간을 거닐었을 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그 마음이 너무 좋다. 이 책은 앙코르와트를 주 무대로 삼고 있지만, 그게 꼭 앙코르와트에서만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제 집 앞의 골목길 하나도 범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내가 배우고 싶은 태도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제국’이란 무엇일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국가’, ‘왕실’, ‘제국’, ‘왕조’라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면 분명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하지만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라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이제는 황폐해져 무성한 잡초들이 자라는 곳을 천천히 걷다보니, 나도 모르게 ‘국가’, ‘제국’, ‘왕조’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확장되며 어떻게 공고해져서  어떻게 지속되는지 알고 싶더군.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물음은 ‘제국’이라는 존재는 과연 누구에게 의미 있는 것인가와 ‘국가’는 일반 국민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였던 것 같네. 

  만약 1,000년쯤 흐른 뒤 내가 지금 사는 도시, 지금 사는 공간에 관광객이 방문하는 날이 온다면, 그들은 폐허가 된 유적지에서 무엇을 찾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네. 그 사람들은 나의 이런 삶에 호기심을 느낄까? 지금 우리의 삶에 감탄할까? 아마도 현재 우리의 권력과 부의 수탈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야. 어쩌면 우리가 남겨놓은 건축물 사이를 배회하고 우리가 남겨놓은 물건을 조용히 바라보며 우리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그 물건은 과연 어떤 것일까? (p.  51.) 


  힌두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앙코르 왕조의 공간은 엄격한 정방형 속에서 위를 향해 계속 발전하는 형태를 추구하지. 보통 사원 건축은 5층 기단 형태로, 기단 중심으로 갈수록 단의 폭이 커져서 올라갈수록 기울기가 가팔라진다네. 마지막에는 경사도가 거의 90도에 달하지. 올라가려면 손과 발을 함께 사용해 오체투지는 물론 온 마음을 모아 집중해야 해. 신앙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 같은 정진과 집중은 물리적 공간인 건축을 영혼의 성지순례길로 변화시킨다네.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하면 아래로 떨어져 몸이 산산조각나고, 조금이라도 긴장하면 두려움에 눈앞이 아득해져 버틸 수 없게 되지. 기단의 가장 높은 곳에는 5개의 뾰족한 탑이 있어. 그 가운데 가장 높은 탑은 건축의 중심으로 모든 공간이 향하는 지점이며 신들이 사는 곳, 메루산을 상징하네. (p. 66.) 


4. 최근 몇 년간 역사책 읽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으니, 아마 앞으로 평생동안 이럴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기행문은 정말 오래간만에 읽은 것 같다. 논리와 인과 관계로 잘 다듬은 문장만 읽다 보니, 구체적인 공간을 묘사한 문장을 좀체 읽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다소간 타의에 의해서) 이 책을 읽으니, 뭐랄까, 몇 년 만에 헬스장에 가서 그동안 전혀 쓰지 않던 근육에 자극이 가는 느낌이랄까. 물론 처음에는 근육통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독서근육도 여러 근육을 균형있게 발달시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