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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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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2018.)

Dog君 2018. 10. 22. 15:25


  유모차 할머니라면 나도 얼굴을 알고 있었다. 새벽, 신문이 올 시간이면 어김없이 유모차에 의지해 공장단지로 폐지를 주우러 가는 할머니. 눈썹 끝에서부터 귓불 근처까지 검버섯이 피어 있는 할머니 유모차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뚱뚱한 할머니.

  아니, 그러면 그 할머니 통해서 연락하면 되잖아? 아무리 사채업자라도 돈이 두 번 들어간 거까지 나 몰라라 하진 않을 거 아니야?

  ‘란 헤어센스’ 여사장 말에 ‘참좋은 마트’ 사장이 담배를 꺼내물면서 대답했다.

  관리소장 말이 할머니도 아들 연락처를 모른대요. 한 사 년 전인가, 설날에 잠깐 얼굴을 비친 이후론 코빼기도 안 보였대요. 뭐 교도소에 갔다는 말도 있고, 경찰에 쫓기는 중이라는 말도 있고...... 아이고, 그러니까 더 안타깝다는 거 아니에요. 저 남자도 안됐고, 유모차 할머니도 불쌍하고...... 이 할머니가 저 남자 저러고 있는 뒤부터는 밖으로 나오지도 않아요. 폐지 안 주우면 제대로 살 수도 없는 할머니가......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pp. 82~83.)


  나는 어정쩡하게 테이블 앞에 선 채 제가 무슨...... 하면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 순간 짧게 그 남자, 권순찬이라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두 눈을 끔벅거리면서 관리소장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정말 할말이 없었다. 내 말보다 입주민 대표나 관리소장, 경비 용역업체 사장의 말이 그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 또한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파트의 작은방을 내주거나 일자리를 알아봐줄 만큼 성의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안타깝지만 성가신 것, 그것이 그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곤 호프집을 빠져나왔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pp. 87~88.)


  나는 아내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보면서 잠깐 말을 아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물리적이고 체력적인 일이었다.

  “나는 괜찮은데 당신이 문제지, 뭐...... 나야 늘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아내는 엄지손톱으로 득득, 소리나게 식탁 모소리를 긁으며 침묵했다. 그녀는 지쳐 보였고, 또 시무룩해 보였다.

  “재경 오빠만 생각하면 나 몰라라 하고 싶지만...... 마석 엄마 아빠가 너무 안쓰러워서......” (「한정희와 나」, pp,. 250~251.)


  작가로 십오 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또 써왔다. 어수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때도 있었고, 이 세상에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썼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많이 쓰고자 했던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걸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또 무엇을 쓴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런 소설들을 되풀이해서 읽었으며, 주변에 널려 있는 제각각의 고통에 대해서, 그 무게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하고자 노력했다. 그걸 쓰는 과정은 단 한 번도 즐겁지 않았다. 고통에 대해서 쓰는 시간들이었으니까...... 어느 땐 나도 모르는 감각이 나도 모르게 찾아와, 쓰고 있던 문장 앞에서 쩔쩔맸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일부러 책상 옆에서 팔굽혀펴기 같은 것을 하기도 했다. 작가는 숙력된 배우와도 같아서 고통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그릴 때도 다음 장면을 먼저 계산해야 하고, 또 목소리 톤도 조절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게 잘 되지 않는 고통...... 어느 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이란 오직 그것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쩐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다 거짓말 같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해서 쓰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쓰는 글. 나는 그런 글들을 여러 편 써왔다.

  내겐 환대,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나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한정희와 나」, pp. 264~266.)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이기호의 말」, pp. 31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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