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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영어는 없었다 (김동섭, 책미래,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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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영어는 없었다 (김동섭, 책미래, 2016.)

Dog君 2021. 5. 21. 00:38

 

  윌리엄의 영국 정복 이후 영국의 사회는 뿌리째 바뀌었다. 색슨족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어 노르만 기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으며, 성직도 모두 노르만 귀족들이 차지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아니라, 영국의 언어 지도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윌리엄은 바이킹 계통의 후손이지만, 프랑스 문화에 이미 동화되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즉, 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프랑스어가 영국의 기득권층의 언어로 들어간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후 영어는 지위어(prestige language)의 자리를 잃고, 수백 년간 민중의 구어로 전락한다. 그리고 14세기 말에 위대한 시인 초서Chaucer가 등장할 때까지 변변한 문학 작품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1세기 이후 영어는 암흑기에 들어간 것이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의 영향을 받더라도 신체, 동식물명 등과 같은 어휘들은 대개 고유어를 간직한다. 그만큼 고유어는 외국어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얼굴을 뜻하는 face는 고유어가 아니고, 프랑스어 face에서 들어온 말이다. 마찬가지로 '공기'를 의미하는 영어의 고유어 lyft는 프랑스어의 air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사라졌다. 이렇듯 윌리엄의 정복은 영어 발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
  정복 이전의 영국에는 행정과 사법 분야에서 공식 언어로 사용되던 라틴어와, 구어로서 사용되던 영어가 공존했다. 마치 조선 시대에 모든 문서에 한자가 사용되고, 국어는 구어로서만 사용되던 모습과 흡사했다. 그러던 중에 프랑스어가 정복자들의 언어로 새롭게 영국에 들어온 것이다.
  라틴어가 확고한 문어로 사용되고 있던 영국에 들어온 프랑스어의 위상은 애매했다. 법조문에 사용되기에는 라틴어라는 걸림돌이 있었고, 다수의 색슨족은 전혀 프랑스어를 배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어는 영국 왕의 언어였다. 1066년 윌리엄 정복 이후 1399년 리처드 2세가 왕위에서 내려올 때까지 프랑스어는 333년 동안 왕의 모국어였고, 헨리 2세(1152년)부터 헨리 6세(1445년)까지 300년 동안 모든 영국의 왕은 프랑스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다. 프랑스어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깊고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복 이후 영국은 흔히 프랑스어와 영어의 이중 언어의 사회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라틴어를 포함하여 삼중 언어의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공공 문서의 라틴어, 귀족층의 교양어인 프랑스어 그리고 일반 민중들의 구어인 영어가 공존했던 복잡한 사회였다. 이후 프랑스어는 라틴어의 영역을 조금씩 파고들어가 자리를 잡지만, 영어는 15세기에 들어와서야 왕실과 교양층의 언어로 대접을 받는다. (54~58쪽.)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망 방언을 통해 영어에 들어온 새로운 철자는 〈x〉, 〈q〉, 〈z〉였는데, 이 철자들은 고대 프랑스어에서 사용되던 철자였다. 이 철자들이 영어 철자법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자. 먼저, 철자 〈q〉는 영어의 〈cw〉를 대체하기 시작했는데 '여왕'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cwene은 프랑스식 철자법인 queen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밖에도 [k]와 [tʃ]의 음가를 가지고 있었던 철자 〈c〉가 [tʃ]의 음가를 가진 단어에서는 고대 프랑스어의 철자인 〈ch〉로 바뀐 것도 같은 예이다. 예를 들어 영어에 들어간 고대 프랑스어 chance의 발음은 지금의 영어처럼 [tʃans]로 발음되었다. 이 발음은 중세 말기에 지금처럼 '샹스'로 바뀌었지만, 영어에서는 지금도 고대 프랑스어의 발음인 [tʃans]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76쪽.)

 

  정복왕 윌리엄에게는 세 명의 왕자가 있었다. 장남 로베르는 노르망디를 물려받고, 붉은 얼굴의 윌리엄 루푸스는 영국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막내 헨리는 은화 5,000마르크를 유산으로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윌리엄 루푸스가 사냥에 나섰다가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자 함께 동행을 했던 막내 헨리는 형의 시신을 내버려둔 채 왕실 금고의 열쇠를 손에 넣기 위해 윈체스터로 뛰었다. 왕위 계승권의 적자인 형이 노르망디에서 귀국하기 전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구하듯이, 결국 헨리가 왕관을 차지하고 헨리 1세로 등극한다.
  헨리 1세 사후 19년간 지속되었던 무정부 상태의 내란은 헨리 1세의 딸 마틸다가 낳은 헨리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종식되었다. 신성로마제국으로 시집갔던 마틸다는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보다 열한 살 연하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Geoffroy V와 재혼을 했는데,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바로 헨리 2세이다. 그는 외가로부터는 영국과 노르망디, 친가로부터는 프랑스의 앙주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이제 노르만 왕조의 시대가 끝나고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가 1154년이니까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지 89년째 되는 해였다.
  89년이면 세대가 세 번 정도 바뀐 기간이다. 이 정도 시간이면 노르만 귀족들도 영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1154년 영국의 새로운 국왕이 된 헨리 2세는 완전한 프랑스인이었다. 역사의 바퀴는 다시 처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70쪽.)

 

  결지왕 존의 손자인 에드워드 1세는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최초의 왕이었다. 비록 모국어는 프랑스어였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같은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 왕이었다. 그런 까닭에 노르만 왕들과 플랜태저넷 왕들의 이름이 순수한 프랑스식 이름이었던 것에 반하여, 그는 영어식 이름인 에드워드를 택했다. 참회왕 에드워드 이후 다시 영국식 이름이 왕명에 등장한 것이다. (105쪽.)

 

  결론적으로 백년전쟁은 프랑스어와 영어의 위상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언어가 함께 보낸 수백 년 동안의 동거는 끝이 나고, 백년전쟁을 계기로 각자는 자신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영국 입장에서 보면 이제는 자신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해야 할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자국 내의 영국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리고 싶었을 것이고, 실제로 전쟁이 끝나자 영국과 영어의 흔적은 프랑스어에서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영국 입장에서도 이제는 자신들의 모국어인 영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이러한 관심은 초서Chaucer 같은 국민 시인의 등장과, 신흥 부르주와 계층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26쪽.)

 

  그렇다면 칼레 시민들의 항복을 받은 에드워드 3세는 어떤 말로 시민들에게 연설을 했을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 전쟁 초기에 영국의 신민에게 프랑스어의 습득을 장려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칼레 시에 입성한 에드워드 3세가 시민들로 가득한 광장에 나타났다. 칼레 시민들은 영국 국왕이 자신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칼레의 시민들 앞에 나타난 에드워드 3세에 대해 연대기 작가 프루아사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은 칼레의 시민들을 매우 이상한 표정으로 내려 보았다. 왜냐하면 (칼레시민이 저항했기 때문에) 왕의 마음이 매우 언짢았기 때문이다. 왕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즉흥적으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에드워드 3세는, 비록 자신의 모국어가 프랑스어였지만, 적국인 프랑스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쟁 전에는 프랑스어의 습득을 강조하던 사람이, 자신에게 반기를 든 프랑스인들과 그들의 언어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31쪽.)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윌리엄의 영국 정복 이후 영어에 차용된 프랑스어 어휘는 대략 1만 개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어휘들의 사용 범주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어휘들보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된다. 마치 우리가 일상 회화에서 순수한 국어를 사용하다가도, 문화와 학술과 관련된 담화를 할 때 한자어나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11쪽.)

 

교정.

63쪽 : 받치고 -> 바치고

71쪽 : 꼽고 -> 꽂고

199쪽 : 모기기론 -> 모기지론

206쪽 : 장모임 -> 장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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