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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강한 과학 (강양구, 문학과지성사, 2021.)

Dog君 2021. 5. 22. 23:32

 

  독서 좋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SNS와 유튜브에는 이걸로 유명세를 떨치는 사람도 종종 있고, 독서토론모임을 상품화한 스타트업도 있다. 그러다보니 수준 이하의 역량을 가진 사람도 덩달아 셀럽이 되기도 하는데, 몇 년 전에 ㅇㅈㅅ이라는 이가 청소년용 추천도서목록이랍시고 돌리는 것을 보고 기가 찼다. 초5부터 고3까지의 추천도서목록에 장자니 칸트니 하는 것들로 떡칠되어 있었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초등학교 5학년에게 추천도서랍시고 격몽요결과 퇴계 이황을 들이미는 게 제정신 박힌 인간이 할 짓인가. (책으로 이름 파는 사람 중에 '고전'부터 들이미는 사람은 일단 걸러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한국에서 고전이 받는 취급이 대체로 다 이렇다. 그저 남들이 좋다고 하니 덮어놓고 좋은 줄로만 하는 그런 취급 말이다.

 

  그래서 고전으로 장사하는 것치고 멀쩡한 것이 드물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1/6만 읽고 썰을 푼 ㅇㅅㅁ이라거나, 신채호의 책 중 하나만 읽고 한국 근현대사학사를 죄다 정리하는 듯이 썰을 푼 ㅇㅅㅁ이라거나, 뇌피셜로 역사학 연구방법론 썰을 푼 ㅇㅅㅁ이라거나...) 고전으로 되도 않는 장사를 하는 이들이 범람하기에 오히려 지금의 관점에서 고전의 가치를 재해석하고 이후의 지적 성취까지 반영하여 고전의 의미를 다시 묻는 작업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에, 마침 딱 좋은 책이 나왔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물고 빨고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이 책의 기준에 따르면 누구나 고전으로 들곤 하는 책들, 예컨대 과학혁명의 구조나 이기적 유전자, 두 문화 같은 책은 되려 신중을 기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저자의 자기변명이나 지금 관점에서 볼 때 낡은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추천하는 고전은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과학과 사회공동체의 관계를 돌이켜보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침묵의 봄이나 셀링 사이언스, 골렘 같은 책들이다. 몇 권을 제외하면 그간 들어보지 못했던 책들이고 (물론 내가 과린이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 고전으로는 좀체 꼽히지 않았던 것들이다.

 

  이러한 추천도서는 아마도 과학과 사회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각각의 사회구성원들이 과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단지 원소기호나 수식 몇 개 정도로 술자리에서 잘난 척 하기 위함이 아니라 과학과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각각의 사회구성원이 궁극적인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고전의 가치도 (굳이 찾자면) 아마 그런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널리 알려진 책이니 많은 사람들이 공통의 텍스트로 삼을 수 있을테고, 그를 통해 더 넓은 공론장을 확보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책 제목은 '강한 과학'으로 달려 있지만 저자가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건강한 과학'일지도 모르겠다. 고전에 대한 주석 붙이기란 무릇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런 작업은 각각의 분과에서 모두 이뤄져야 마땅하다는 생각도 든다.

 

  가끔 『이중나선』을 읽고서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는 친구들의 독후감을 인터넷에서 읽곤 합니다. 하지만 왓슨처럼 '성공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요? 여기서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죠.

  한 과학자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과학을 빼놓았을 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에 달려 있다. (「이런 과학자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마라! - 제임스 왓슨, 『이중나선』」, 60~61쪽.)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된 시점인 1976년만 하더라도 생물학자를 포함한 많은 이가 세대를 이어 불멸하는 실체로 유전자를 가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전자 안에 심신의 특징을 규정하는 온갖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총망라되어 있으리라고 기대했죠. (...)
  하지만 2003년에 마무리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그 이후의 연구 성과 탓에 이런 기대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세포를 구성하는 약 10만 가지의 서로 다른 단백질을 합성하는 암호를 갖고 있는 유전자가 약 2만 5,000개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이는 초파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이에 당장 30억 개에 달하는 (유전 정보가 담긴) DNA 서열 가운데 나머지 98퍼센트 이상의 DNA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
  도킨스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요구를 따르는) 로봇에 불과하지만, 다른 종과는 달리 그것의 독재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
  그런데 이런 주장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분명히 앞에서 도킨스는 인간과 같은 생물을 복제자(유전자)의 번식 전략을 그대로 따르는 '생존 기계', 즉 로봇에 불과한 존재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로봇(인간)에게 주인(유전자)의 말에 반항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항변합니다.
  (...)
  인간의 문화가 과연 진화와 무관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 이렇게 오랫동안 인류의 삶을 좌지우지한 문화가 과연 진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까요?
  (...) 이런 문화 활동은 인류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게 많은 과학자의 주장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진화와 문화는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끼쳤다고 이해하는 게 합리적이죠. (「이제는 '이기적 유전자'를 버릴 때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93~96쪽.)

 

  (...) 벡위드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여러분은 동의하시나요? (...)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이 점에서 과학이 뭔가 줄 것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의 힘에 대해서는 덜 오만한 태도를 선호한다. 우리는 과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좀더 겸손해야 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과학을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언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나의 과학 영웅인 프랑수아 자코브의 현명하게 절제된 표현을 명심해야 한다. "과학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이 어느 정도의 지침을 제공하고 특정한 가설을 제외시킬 수는 있다. 과학의 추구에 관여하는 것은 우리가 실수를 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이 정도면 나를 만족시키기엔 충분하다. (「"나는 과학과 싸우는 과학자입니다!" - 존 벡위드,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109쪽.)

 

  카슨과 콜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의미심장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여성 과학자는 모두 대학의 실험실보다는 야생의 현장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카슨은 평소 야생 동물이 어떻게 사는지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콜본 역시 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새를 관찰하는 것을 즐겼죠.
  두 사람이 과학뿐만 아니라 다른 데 관심을 가진 것에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카슨은 어렸을 때부터 문학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교감에 눈을 떴습니다. 콜본은 농사를 짓고 환경 운동을 하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교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바로 이런 경험이야말로 두 사람을 통상의 과학자와는 '다른' 과학자로 만들었던 게 아닐까요? (「노래하는 봄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 레이철 카슨, 『침묵의 봄』」, 122쪽.)

 

  (...) 『코스모스』는 과학 지식을 담은 책이라기보다는 과학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경이驚異, wonder'로 가득한 책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볼까요? 과학자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과학연구에 뛰어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탐구에 몰두하게 하는 힘으로 경이를 꼽는 것을 자주 봅니다.
  (...) 과학자 상당수는 이런 감정이야말로 과학자로서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합니다. 광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천문학자),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비한 몸속의 세포를 관찰하면서(생물학자), 수많은 원소가 상호작용해 세상의 온갖 물질을 구성하는 모습을 확인하면서(화학자) 느끼는 놀랍고 신기한 감정이 그것이죠.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이런 경이의 감정을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 치여서 잠시 잊고 있었던 "위대한 신비의 세계로 다가갈 때" 느낄 수밖에 없는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와 같은 그런 기분"을 다시 일깨우도록 노력합니다. (...) (「『코스모스』를 읽을 시간 - 칼 세이건, 『코스모스』」, 139~140쪽.)

 

  안타깝게도 지금은 스노도 리비스도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지식인, 정치인, 관료를 포함한 오늘날 많은 사람은 열역학 제2법칙 같은 과학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같은 문학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문과나 이과를 막론하고 많은 학생이 의사나 변호나, 혹은 금융인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 단적인 증거죠.
  그렇다면 스노의 『두 문화』는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스노가 말한 대로 두 문화의 벽은 허물어져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과학이냐, 문학이냐 이렇게 둘 중 하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는 두 문화의 벽을 허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과학도 문학도, 심지어 인간마저도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 오늘날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인간을, 그리고 너와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역학 제2법칙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둘 다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는 『두 문화』를 비판적으로 다시 읽어야 합니다. (「과학기술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 C. P. 스노, 『두 문화』」, 155~156쪽.)

 

ps. 249쪽의 내용은, 음... 평소의 저자를 생각하면 다소 의외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질문할 기회가 과연 있을 것인가.

 

  이반 일리치의 책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의학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건강에 대한 모든 것을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와 그들이 일하는 병원에 맡김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이 파괴되고 있음을 고발한 이 책은 지금도 논란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한 일리치는 실제로 병이 났을 때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는 50대 중반부터 2002년 76세로 죽을 때까지 얼굴 한쪽에 자라는 혹(종양)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 진단을 받지도, 치료를 받지도 않았죠. 그는 혹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모르핀이 들어 있는 아편을 피우거나 명상 등을 하며 한순도 쉬지 않고 찾아오는 고통을 다스렸습니다.
  (...) 그는 혹이 생기고 나서도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하긴 했지만) 20년간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삶을 마감했습니다. 현대 의학을 거부한 그의 행동은 여전히 논란거리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인 그의 태도는 그 자체로 감동적입니다. (「기술이라는 이름의 괴물을 고발한다 - 이반 일리치, 『공생을 위한 도구』」,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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