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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견문록 (스튜어트 리 앨런, 이마고, 2005.)

Dog君 2021. 5. 22. 23:28

 

  커피의 초기 역사에 대해 의외로 아주 좋은 레퍼런스다.

 

  '케파(Kefa)’가 '커피(coffee)’의 어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커피는 '불쾌하다’는 뜻을 가진 아랍어 'q-h-w-y’에서 파생한 '카와(qahwa)’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더 일반적이다. 카와는 원래 음식을 시큼하게 만드는 포도주를 의미했으며, 나아가 잠을 쫓는 커피에도 이 말이 쓰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에티오피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커피를 지칭할 때 '커피’와 비슷한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커피를 원두, 즉 '빈(bean)’을 뜻하는 부나라고 부른다. (...) (29쪽.)

 

  도시에서 자란 나는 아베라에게 염소가 그런 열매를 먹는 게 이상하다고 말했다. 염소라면 보통 풀 종류를 더 좋아하지 않던가?
  "맞아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시골 사람들은 지금도 그걸로 만들어요."
  "잎으로 커피를 만들어요?"
  "그럼요. '카티(Kati)’라고 부르는 커피예요."
  "그래요? 한번 먹어보고 싶은데요. 어쩌면 카페에 있을지도......"
  "아, 아니에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집에서만 마셔요. (...)" (37~38쪽.)

 

  커피 잎으로 만든 음료는 정확히 말해 두 종류였다. 그 가운데 좀더 흔한 음료가 카티 또는 '코테아(Kotea)’이며, 커피 잎을 볶아 만든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 먼저 생긴 '아메르타사(amertassa)’라 불리는 음료인데, 갓 딴 녹색 잎을 그늘에서 며칠 말린 뒤에 볶지 않고 그대로 끓여 만든다. (...)
  카티와 아메르타사는 최초의 '마시는 커피’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에티오피아 사람은 아득한 옛날부터 원두를 먹었는데, 커피 음료가 처음 언급된 부분에 커피 잎을 끓였다는 기록이 있다. '카프타(Kafta)’가 이 음료의 아랍식 이름이다. 일부 학자는 마약 성분이 있는 '카트(qat)’의 잎을 따서 끓였다고 주장하지만, 1400년대 초 아랍 신비주의자였던 알답하니(al-Dhab-hani)는 에티오피아 사람이 '카와’를 "이용하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액체 커피를 강하게 암시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마신 것은 무엇일까? 커피 잎을 끓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소 신화적 이미지를 지닌 '아비시니아 차’가 그것이다. 여기에 훗날 예멘 남부에 있는 모카의 수피교도인 알샤드힐리(al-Shadhili)나 그의 제자가 원두를 날것으로 첨가했을 것이다. (44~45쪽.)

 

  어느 것이 진실이든 간에, 샤드힐리는 실제로 수피교도의 한 분파이며, 1,200명에서 1,500명에 이르는 소수의 샤드힐리 데르비시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돌면서 커피향을 풍기며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마침내 에스파냐까지 퍼져갔고, 그 결과 에스파냐에는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혼합된 알샤드힐랴라고 불리는 집단이 존재한다. (...)
  커피왕국은 이처럼 보잘것없이 시작되었다. 터키가 예멘을 정복한 1400년대에 이르러서는 모카에서 나온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졌다. 유럽에서 카페가 처음 문을 열기 약 반세기 전인 1606년에 처음 모카를 찾아온 한 영국 무역업자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멀게는 인도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35척이 넘는 상선이 모여들어 항구를 가득 메운 채 커피자루를 기다렸다고 한다. (...) (91~92쪽.)

 

 

  커피에 대한 탄압은 1511년 6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메카의 종교 경찰 우두머리이자 맘루크(노예 출신의 군인-옮긴이) 이슬람교도인 카이르 베그가 밤중에 신성한 모스크 옆에서 남자 여럿이 모여 '취한 듯'뭔가 마시는 장면을 목격했다. (...)
  다음날 베그는 이 새로운 음료를 이슬람법으로 합법화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종교 학자들을 불러모아 공청회를 열었다. 커피를 반대하는 공식적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사람을 흥분시키기 때문에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금지해야 한다는 이유이고, 둘째는 예배 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커피잔을 돌리는 수피교도의 행위는 술 마시는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였다. 셋째로 커피를 '탄화’될 때까지 볶는데, 이는 코란에서 금지하는 행위였다. (...) 그러나 커피가 발효 음료가 아닌 건 너무나 뻔했던 탓에, 공청회에 참석한 열성적인 이슬람교도들은 커피가 '정신을 흥분시킨다’는 이유로 이를 불법이라 주장했다. (...)
   (...) 결국 두 의사는 커피를 마시면 정신 이상 증세가 나타나는 까닭에 커피 역시 '포도주’의 일종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다. (...)
  (...) 베그와 의사는 지부건 보수 연합인 맘루크 소속이었으며, 이들은 신과 일대일로 소통한다는 종교적 황홀경, 즉 '도취’에 대한 수피교도의 믿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게다가 '마르콰하(marqaha)’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며 종교적 흥분상태와 커피를 연관시켰다. 이 용어는 종교 지도자인 이맘이나 모스크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당국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118~121쪽.)

 

  역대 술탄 가운데 가장 악독했던 술탄은 커피를 혐오했던 무라드 4세(Murad IV, 1612~1640)였다. (...)
  그는 곧잘 변장을 하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반역자를 수색했다. 1633년 어느 날 밤, 그는 (아마도) 고관 대신과 함께 평민 복장을 하고 어두워진 도시로 잠입했다. (...) 다음으로 들른 곳은 이스탄불에 흔한 카페였는데, 이곳에서 술탄은 "분별 있고 진지한 사람들이 모여 오스만제국의 시국을 이야기하며 다양한 문제에 대해 정부를 비난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존 엘리스는 기록했다. 무라드는 한동안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궁전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무라드는 커피를 금지했다. (...) 무라드는 커피점이 화재의 위험이 지닌다고 경고했지만, 그가 진짜 우려했던 것은 커피점이 백성들에게 만남의 장소를 제공해 진지한 토론을 이끌어낸다는 사실이었다. 커피에 반대한 그의 정책은 앞서 종교적 이유로 커피를 금지한 정책들과는 달리 커피에 대한 최초의 비종교적 압력이었으며, 어쩌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물질을 금지한 최초의 정치적 결정인지도 몰랐다. (...)
  무라드가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하자 이스탄불에는 커피점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여전했다. 쫓겨난 커피 상인들은 이미 돈벌이를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린 상황이었고, 그 결과 10년이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 커피점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207~208쪽.)

 

  이 사건은 눈에 보이는 결과 이외에도 역사적 전환점이 될 만한 요소가 더 있었다. 터키군은 낙타 2만 5,000마리를 놓고 달아났는데, 빈 사람들은 낙타에 실린 자루 10여 개에서 희한한 초록색 콩을 발견했다. 이들은 낙타의 먹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스파이 콜시츠키는 이 열매가 커피콩임을 알아보았고, 빈을 구한 그의 공로에 대해 어떤 대가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빈에 최초로 커피점을 열 생각으로, 그 커피 자루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누가 빈에서 최초로 커피점을 열었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인데, 커피 찌꺼기를 남기는 터키식 습관이 사라진 곳이 바로 이곳 카페였다. (...)
  디글라스는 커피에 우유나 크림을 넣어 먹는 형태가 가장 먼저 일반화된 곳도 바로 빈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다만 짐작일 따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우유나 크림을 넣는 식은 유럽 사람의 창작품이라는 사실뿐이다. 터키 사람들은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우유와 커피를 섞어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두 가지를 섞지 않았다. 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런던의 초기 커피문화에서는 보통 우유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탈리아 사람 아니면 빈 사람이 이런 습관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215~217쪽.)

 

  맥주는 단지 축배의 수단만이 아니라 빵 다음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수단이었다. (...)
  맥주에 달걀을 넣고 되직하게 만들어 빵 위에 부어먹는 식은 유럽 대륙의 전형적인 아침식사였고, 독일 사람들은 1700년대 중반까지도 이 음식을 즐겨 먹었다. (...)
  모든 것에 술이 들어갔고, 약도 예외가 아니었다. 뜨거운 여름에는 음식을 일부러 발효시키지 않으면 모조리 상했다. (230~231쪽.)

 

  1789년 7월 12일,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 1760~1794)이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 군중을 향해 귀족에 대항해 무장하라고 촉구한 곳도 바로 팔레루아얄에 있는 카페였다. (...)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혁명은 어떤 색을 띠어야 가장 바람직하겠는가를 놓고 토론을 벌인 끝에(부흥을 위한 녹색? 아니면 피를 부르는 붉은색?) 실제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프랑스 군주제를 뒤엎었고, 어쩌다 보니 정부를 끝장내는 결과까지 가져왔다. (271~272쪽.)

 

교정. 초판 5쇄

305쪽 7줄 : 냄비를 젖는 -> 냄비를 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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