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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아르테, 20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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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아르테, 2013.)

Dog君 2023. 4. 27. 06:31

 

  미국 대통령 중에서 에이브러햄 링컨보다 유명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매일같이 뉴스에 현직 미국 대통령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의 생애 전체를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링컨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릴 적 위인전을 통해 그의 생애는 한번쯤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순전히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고 마침내 미국 대통령이 되어 흑인노예를 해방시키고 남북전쟁으로 갈라진 미국을 통합시켰다는 이야기 말이죠.

 

  당연하게도, 당시의 미국 정치를 링컨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역시도 당대에는 결국 한 사람의 정치인에 불과했을테니 내각을 구성하고 상대편을 설득하는 등등의 복잡한 정치활동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 '권력의 조건'입니다. 그러니 이 책은 어릴 적에 읽었던 위인전의 (대폭!) 업그레이드 판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제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독서 블로거 중 한 사람인 ㅋ) 빌 게이츠의 블로그에서 보아두었던 것인데요, 셀럽의 책 추천에 대해 시큰둥한 저는 사실 좀 냉소적인 마음으로 이 책을 골라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이 두꺼운 책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했던 링컨 시기의 미국 정치사에 대해 알게 되는 즐거움에 더해서, 책의 구성도 무척이나 흥미로웠죠.

 

  물론 마음 한켠으로 의심도 듭니다.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링컨은, 현대 미국인이 이상화시킨 링컨의 이미지가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죠. 방송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책의 링컨은 가히 '부처님 가운데토막'입니다. 자기 개인의 안위와 지위보다는 정치적 대의와 이상에 맞춰 행동하는 링컨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에이 설마 이렇게까지 했겠나' 싶은 의구심이 들지요. 이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 영화 '링컨'만 해도 링컨을 마냥 성자聖者로만 그리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뭐, 제가 미국 정치사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링컨에 대해 소상히 아는 것도 아닌지라 이 책의 서술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 검증할 능력은 없습니다. 혹시 또 모르죠, 정말로 링컨이 부처님 같은 사람이었을지도요.

 

  하지만 이 책의 묘사가 '미국인이 희구하는, 링컨의 전형적인 이미지'라 하더라도, 왜 사람들이 링컨에게 그런 이미지를 덧씌우고 그의 정치를 칭송하는지는 한번쯤 생각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예컨대 영화 '명량'의 대흥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 뿐만 아니라 그 영화에서 당대의 한국인이 희구했던 정치적 리더십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세간의 평처럼 말이죠.

 

  '명량'과 마찬가지로 '링컨' 역시 사람들이 실제의 현실에서 보고픈 희망사항의 반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이나 우리나 정치적 지형과 이념이 날로 양극화되고 있기는 마찬가지잖습니까. 그런 세태를 안타까이 여기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양 극단을 배제하면서 협상과 타협으로서의 정치를 구현하는 정치가를 희구하기 마련입니다. 사실 그것은 정치가 뿐 아니라 '지지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고 타협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그런 지지자가 그런 정치가를 만드는 것이겠죠.

 

  비극적인 상실감을 여러 차례 겪은 후 링컨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이 같은 고통과 절망을 겪으며, 슈어드처럼 쾌활한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침울했던 체이스와 달리, 링컨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유머감각, 절망감을 달래고 의지를 다잡는 유연한 사고를 통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 (55쪽.)

 

  시골인 켄터키와 인디애나 주에는 학부모들이 수업료를 내야 하는 사립학교 밖에 없었다. 게다가 변경 지역 사람들은 수업료를 낼 능력이 있어도 자녀에게 많은 교육을 받게 하지 않았다. "읽기, 쓰기, 산수 외에 교사에게 필요한 자격증은 없었다. 라틴어를 아는 듯한 떠돌이가 이웃 마을에 머물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우러러보았다."고 링컨은 회상했다.
  농장 일을 하면서 "짬짬이" 학교에 다녀도 된다고 허락받은 그의 학력은 다해봐야 1년도 안 되었다. 이후 링컨은 변호사 자격증을 얻을 때까지 "대학이나 학원 건물 안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지식을 독학으로 얻어야 했다. 책이 그의 학원이자 대학이었다. 인쇄된 말은 그에게 위대한 지성들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친지와 이웃들은 그가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책을 찾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책을 갖는다는 것이 "중산층이 안 되는 미국인에게는 사치"였던 시절이라, 읽을거리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킹 제임스 판 성경과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이솝우화》, 윌리엄 스콧의 《웅변술 교습서》를 갖게 되었을 때 링컨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천로역정》을 손에 든 "그의 눈은 반짝거렸고, 그날 낮에는 먹지 못하고 밤에는 잠들지 못했다."
  "인쇄술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 혹은 정신이 크게 나아질 수 있음을 전혀 몰랐다"라고 훗날 링컨은 기록했다. 물론 이 말은 자기 자신, 즉 불가사의한 언어의 신비를 벗기며 훗날 "지상에서 가장 범속한 곳"이라 여겼던 변경의 작은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가능성의 세계를 발견했던 어린 소년의 해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책만큼 우리를 수많은 대륙에 데려다주는 쾌속선은 없다."고 말했다. 어린 링컨은 변경 지역도, 아메리카 대륙도 떠난 적이 없었지만 바이런의 《차일드 해롤드의 편력》을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중동, 이태리를 여행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와 함께 에든버러에 갔고, 셰익스피어를 따라 영국 왕들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청년 링컨은 문학과 역사를 탐험하면서 주위 사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만큼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링컨은 성경과 이솝우화를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모든 구절과 이야기를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스콧의 《웅변술 교습서》에서 셰익스피어의 명문장을 처음 접한 그는, 실제 연극을 보기 전이었음에도 이 위대한 극작가의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지역 경찰관에게서 《인디애나의 개정 법령집》을 빌렸는데 독립선언서와 헌법, 1787년 북서부 조례가 담긴 이 책은 훗날 그의 철학과 정치사상의 초석이 되었다.
  링컨은 어딜 가나 책을 가지고 다녔다. 그가 가진 책은 몇 권 안 됐지만, 영어권에서는 중요한 책이었다.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여러 번 읽는 과정에서 링컨은 운율을 익히고 시심을 길렀으며,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시인 대통령'이 되었다. 링컨은 끈기를 잃지 않고 훌륭한 생각과 사상을 찾아냈다. 새어머니에 따르면, 링컨은 좋은 문장이 생각났는데 종이가 없으면 판자에 적었고, 판자가 새까매지면 칼로 긁어냈다고 한다. 그러다 종이가 생기면 그 글들을 옮겨 적고, 암기할 수 있도록 스크랩북에 보관했다.
  (...)
  링컨은 명석했으며 호기심 많고 집요한 성품을 가졌다. 게다가 언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감각 또한 탁월했다. 곧잘 큰 소리로 책을 읽던 그는 언어의 의미뿐 아니라 소리에도 매력을 느꼈다. 시의 아름다운 운율을 사랑했던 그는 종종 긴 시를 암송했다. 그는 특히, 죽음을 안고 사는 인간의 불행한 운명과 세속적인 성공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시들에 이끌렸다. 분명 링컨은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지만 낭만적인 면도 있었다. (57~59쪽.)

 

  슈어드는 클리블랜드 청중 앞에 서서 오하이오 흑인의 투표와 배심, 공직 진출을 금지하는 흑인법을 폐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한때 모든 주가 노예제라는 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뉴욕의 우리는 해방된 인종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음으로써 지금도 노예제와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흑인의 투표권과 배심 자격, 공직 진출권에 관한 당시 슈어드의 주장은 주류 정치인으로서는 놀라울 만큼 급진적인 것이었다. 반면 꼬박 10년 동안이나 스티븐 더글러스와 논쟁 중이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흑인에게 유권자나 배심원, 공직자로서의 자격을 주거나 백인과 흑인의 결혼을 찬성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입장 차이는 대개 훨씬 진보적인 뉴욕과 보수적이고 남부에 우호적인 일리노이라는 상반된 정치 환경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슈어드는 링컨보다 더 거침없는 언어로 군중을 흥분시켰다. (...) (135쪽.)

 

  (...) 기존에 존재하는 주의 노예제를 보호했던 헌법적 타협은 새로 편입된 준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때문에 국토가 확장될 때마다 문제가 계속 불거졌다. 멕시코 전쟁으로 획득한 새 준주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이 국가적 논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
  노예제 문제는 의회의 주요 쟁점 사안이 되었다. 논쟁은 격렬했다. 같은 당 내에서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 파벌이 나뉘어졌다. 노예제 문제가 정치계 전체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물론 분열이 일어난 것이 노예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부는 북부의 제조업 육성을 위한 보호 관세에 반대하며, 북부에 운송수단을 건설하기 위한 국내 개선을 위해 국가 예산이 사용되는 것을 막으려했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는 정치적 조정과 거래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예제는 그렇지 않았다. (...) 그 '독특한 제도'는 이제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남부 사회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많은 북부인들에게 준주로의 노예제 확대는 자유 노동 운동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1850년대는 이 같은 '반목적인 요소들'의 극한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다.
  (...)
  연방의 정신적 끈, 즉 훌륭한 종파들은 이미 파벌적인 노선에 따라 찢어졌다. 그 다음으로 전국적 정당이 노예제 확산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대립하면서 연방의 정치적 끈이 끊어졌다. 50년대 초, 노예제로 인해 절망적으로 분열된 휘그당은 점점 그 세력을 잃다가 끝내 사라졌다. 탈당 사태로 골머리를 앓던 민주당도 서서히 세력을 잃었고, 1850년대 말 무렵에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었다.
  연방을 묶는 끈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애국심, 즉 혁명 세대의 성취에 대한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공통의 꿈을 말하는 것이었다. 1850년대의 역사는 이러한 끈이 팽팽하게 긴장하다가 점차 약해지고 마침내 끊어져버리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한다는 링컨의 말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142~144쪽.)

 

  링컨은 노예소유주들을 비난하는 대신, 감정이입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 했다. 10여 년 전에 그는 금주 지지자들에게 음주가들을 "저주와 협박조로"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협박은 협박을, 비난은 비난을, 저주는 저주를" 낳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에게 "이 땅의 모든 해악과 고통을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받는다면, 누구나 자기 속으로 숨어들어 머리와 가슴으로 통하는 길을 모두 막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독실한 체하는 개혁가는, 밀짚으로 거북이의 단단한 등을 뚫을 수 없는 것처럼 음주가나 노예소유주의 심장에 파고들 수 없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여러분의 대의에 사람들을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이성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인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이 승리, 즉 "이 땅에 노예나 음주가가 존재하지 않는" 영광의 날을 향한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168쪽.)

 

  이 중대한 시기에 스티븐 더글러스는 동료 민주당원들과 결별하여 정계를 놀라게 했다. 뷰캐넌과의 회의에서 그는 르컴프턴 법안을 지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을 지지하는 민주당의 싸움을 주도했던 사람이, 이제는 공화당 편에 서서 자기가 세운 정부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내가 르컴프턴 법안을 반대한 이유는,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이후 그는 설명했다. 그는 주민들이 노예제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그 법안이 캔자스 시민의 행동이 아니고 그들의 의지를 나타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글러스에게 뷰캐넌 행정부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더글러스는 르컴프턴 법안을 지지하면, '주권재민'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게 되고 상원의원으로 재선될 가능성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쪽.)

 

  (...) 링컨은 "흑인과 백인의 완전한 정치적, 사회적 평등을 도입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흑인을 투표자나 배심원으로 만들거나, 그들에게 공직에 오를 자격을 주거나,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찬성한 적은 없었다." 그는 "흑인과 백인의 신체적 차이" 때문에 "완벽하게 평등한 관계로 더불어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드레드 스콧 사건의 대법원 판결을 직접 겨냥하여 "그렇더라도 흑인에게 독립선언서에 열거된 모든 천부적 인권을 누릴 권리가 없다고 말할 근거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 더글러스는 많은 면에서 저와 다릅니다. 분명 피부색과 도덕성, 지성에서 그와 저는 다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자기 손으로 일해서 구한 빵을 먹을 권리에 있어서는 더글러스와 제가 평등하고,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라고 주장했다.
  (...)
  그렇긴 하지만 흑인법에 대한 링컨의 암묵적 지지는 슈어드와 체이스의 대담한 입장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체이스는 오래전부터 인종에 대해 일반 대중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고, 오하이오 주의 차별적인 흑인법을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없애는 데 기여했다. 슈어드 역시 흑인법을 격렬히 비난했고, 흑인 선거권을 찬성했다.
  하지만 슈어드나 체이스도 흑인의 완벽한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슈어드에 대해 연구했던 한 학자는 "슈어드는 미국의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다거나 아일랜드와 독일 이민자들처럼 백인 사회에 동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흑인은 인간이며, 따라서 백인이 누리는 모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체이스도 두 인종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프레더릭 더글러스에게 "분리가 모두에게 최선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흑인은 "다른 땅에 살 때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흑인이 이곳에 있는 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노예제 폐지 운동의 지도자였던 슈어드와 체이스의 이러한 견해는, 백인의 우월함을 믿는 인종차별이 당시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링컨과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견해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인종차별에 대해서 링컨이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꿰뚫어볼 방법은 없다. 하지만 링컨의 생애를 세심하게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했다는 흔적을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더욱이 링컨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당시 공개적으로 자주 그를 비판했던 프레더릭 더글러스조차 "링컨은 미국에서 내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최초의 거물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와 나의 차이, 즉 피부색의 차이를 떠올리게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212~216쪽.)

 

  (...) 공화당의 급진파와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연설의 회유적인 어조에 크게 실망했다. 흑인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처음 링컨의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이룰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노예였다가 지금은 훌륭한 연설가 겸 작가가 된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북부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잔인한 주인을 여럿 겪었지만, 두 번째 주인의 친절한 부인에게 읽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
  (...) 하지만 더글러스는 자신에겐 "여러 주의 노예제에 대해 간섭할 법적 권한이 없으며" 더욱이 그럴 "의도"도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된 링컨의 취임연설을 읽고, 낙천적으로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도망 노예를 붙잡을 것이고, "그들이 주인에 맞서 봉기할 경우 발포할 것이며, 연방정부가 그들의 해방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링컨의 의향이었다. 더글러스는 링컨이 "악취를 풍기며 사라져가는 노예제의 저주 앞에" 비굴하게 엎드렸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링컨 씨가 영국의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과 같은 용기와 결단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를 보니, 우리에겐 그저 피어스와 뷰캐넌 세력의 후계자가 있을 뿐이다." (353~354쪽.)

 

  이후 북부에 '불 런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7월 21일 일요일 이른 아침에 시작됐다. "대포의 함성이 백악관에 닿았을 때 흥분이 점점 높아졌다."라고 엘리자베스 크림슬리는 회상했다. 전쟁터의 병사들이 끔찍한 대학살을 저지르는 동안, 워싱턴 시민들은 황급히 빵과 와인이 가득한 소풍 바구니를 준비했다. 그들은 북부가 가볍게 승리하리라 여기며 전투를 구경하기 위해 센트레빌의 언덕과 들판으로 달려갔다. 상하 양원의원과 정부 직원, 그 가족들은 오페라글라스로 전쟁터를 지켜보았다. 영국 기자 윌리엄 러셀은 "엄청난 발포" 후 한 여자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정말 장관이네요. 세상에!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내일이면 우리가 리치먼드에 가 있을 것 같은데요." (395쪽.)

 

  슈어드는 내각과 나라 전반에 걸쳐 파벌 간의 균형을 잡는 링컨의 탁월한 능력을 그 어느 각료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직에 대한 야망을 접은 슈어드는 이 무렵 링컨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료가 되었다. 급진주의자들은 슈어드가 대통령에게 보수적인 입김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와 링컨은 두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찾아야 한다는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두 극단주의자들이란 노예해방이 전쟁의 주된 목적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급진적 공화당원들과, 노예제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연방의 회복을 위해서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 민주당원들이었다. 슈어드는 위드에게 "누군가는 달래고 진정시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게 대통령과 제 의무입니다."라고 말했다. (...) (455쪽.)

 

  링컨은 5월 7일 부대 시찰에서 돌아오자마자, 전 오하이오 주 하원의원인 클레멘트 밸런디검이 반역죄로 체포 및 구금되는 엄청난 정치적 사건에 직면했다.
  밸런디검의 체포를 명령한 사람은 번사이드 장군으로, 그는 후커의 후임으로 오하이오 군관구를 지휘하고 있었다. 번사이드는 연방군의 참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소란스러운 평화 시위가 벌어지자, "오하이오 군관구에서 적에게 조금이라도 동조하는 행동은 금지한다."는 내용의 군령(軍令) 38호를 공포했다.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반역을 저지르는 사람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체포하여 군사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이 군령의 골자였다. 밸런디검은 의도적으로 이 군령을 무시하고, 전쟁의 패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며 군중을 선동했다. 그는 병사들이 일제히 퇴역하고 국민이 "링컨 왕을 왕좌에서 몰아내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밸런디검의 연설 사본을 읽은 번사이드는 한밤중에 군인들을 보내 그를 체포했다. (...)
  조간신문에서 이 사건을 읽은 링컨은 무척 난감했다. 훗날 그는 신문기사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번사이드를 지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할 부정적인 정치 여파를 고려해야 했다. 코퍼헤드와 민주당뿐 아니라 충성스러운 공화당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다. (...) 그동안 거의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던 내각이 밸런디검의 체포를 반대하는 데에는 만장일치로 단결했다.
  절충안을 찾던 링컨은 공식적으로는 밸런디검의 체포를 지지했지만, 구금 대신 연맹 쪽으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이 조치 이후 남부에 동조하는 밸런디검의 몸이 "진작부터 마음이 가 있던 곳"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농담조의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
  이렇게 해서 링컨은 전쟁으로 인한 시민의 자유가 침해받는 것을 최소화하면서도 번사이드 장군을 계속 지지할 수 있었다. 수개월 후 한 급진주의자가 "악명 높은" 〈시카고 타임스〉를 폐간하자고 주장하자,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부인께서는 시민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시는 것 같군요. 아주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시민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민주 정부는 시민의 보편적 권리를 간섭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시민의 자유를 철저히 보호해야 합니다."
  밸런디검 문제를 해결한 후, 링컨의 다음 과제는 번사이드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다. 내각 전체가 자신의 조치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장군은 사임하겠다고 통보했다. 링컨은 사직을 거부하면서, "내각은 체포의 필요성에 유감을 표했지만, 일단 체포가 이루어진 후에는 모두 귀관이 그 상황을 잘 헤쳐나가길 기대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554~556쪽.)

 

  (...) 그는 대통령 자리에 대한 체이스의 지칠 줄 모르는 야망을 보면서 "켄터키 농장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게으른 말이 갑자기 속도를 높여 "고랑의 끝까지" 맹렬히 달려갔는데 농부가 쫓아가보니, 커다란 말파리가 말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
  링컨은 "만일 체이스 씨에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라는 말파리가 있어서 그를 물어뜯는다면, 난 굳이 그 말파리를 날려보내지 않을 생각이네. 그게 재무부를 움직이는 힘이라면 말이지."라고 말했다. 링컨은 친구들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체이스의 술책이 "대단히 치졸"하고, 유감스러운 행동이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링컨의 친구들은 어째서 대통령이, 그의 정책에 적대적인 것으로 유명한 체이스 지지자들의 임용을 계속 승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링컨은 체이스의 요구를 거절하여 그와 싸우느니, 차라리 비열한 책략을 부리게 그냥 두겠다고 말했다. 더욱이 연방군 지원에 필요한 막대한 물자를 모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체이스를 해고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체이스에 대한 링컨의 반응은 자연스럽거나 순수하지 않았다. 그의 오랜 친구 레너트 스웨트는 '링컨이 솔직하고, 순박하며, 술수를 모른다.'는 평가는 완전히 오판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는 우리가 체스의 말을 옮기듯, 멀리 떨어져서 사람을 다루고 움직였다." 또한 체이스에 대한 링컨의 태도가 재임에 대한 욕망이 없음을 암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링컨이 재임을 첫 번째 대통령 당선 때보다 훨씬 더 열망하고 있다는 스웨트의 생각은 정확했다. (...) 링컨은 체이스가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도록 하기보다는, 미심쩍은 동료로 내각에 두는 게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체이스가 내각에 남아 있는 동안, 링컨은 한결같이 예우를 갖춰 그를 대했다. (602~603쪽.)

 

교정. 1판 6쇄
33쪽 6줄 : 서른 일곱 살의 아내 -> 37년을 함께 한 아내 (원문은 "his wife of thirty-seven years")
58쪽 7줄 : 스코트랜드 -> 스코틀랜드
126쪽 7줄 : (들여쓰기)
143쪽 3줄 : 나눠어졌다 -> 나뉘어졌다
143쪽 밑에서 6줄 : 끈 즉, 훌륭한 -> 끈, 즉 훌륭한
143쪽 밑에서 6줄 : 종파들은 교파는 이미 파벌적인 -> 종파들은 이미 파벌적인
171쪽 14줄 : 수백 명에 달하는 -> 백 명의 (원문은 "all hundred members")
175쪽 밑에서 8줄 : 대해서그리고 -> 대해서 그리고
218쪽 7줄 : 초초하게 -> 초조하게
325쪽 밑에서 1줄 : 워싱턴에 방문한 -> 워싱턴을 방문한
386쪽 밑에서 6줄 : 링컹은 -> 링컨은
412쪽 밑에서 12줄 : 연방군는 -> 연방군은
420쪽 밑에서 11줄 : 윌스크 -> 윌크스
420쪽 밑에서 3줄 : 슬라이델 의 -> 슬라이델의
513쪽 밑에서 4줄 : 맥클렌런에게 -> 맥클렐런에게
522쪽 8줄 : 배재하고 -> 배제하고
527쪽 밑에서 5줄 : "조심스레"자신의 -> "조심스레" 자신의
556쪽 5줄 : 말했다 "아무래도 -> 말했다. "아무래도
654쪽 6줄 : 《베니스의 상인》 중유대인 -> 《베니스의 상인》 중 유대인
659쪽 밑에서 7, 11, 12줄 : 배리나 (740쪽과 표기 다름. 원문은 "Varina")
674쪽 3줄 : 제3 재부무 차관으로 -> 재무부 제3차관보로 (원문은 "third assistant secretary of the treasury")
677쪽 밑에서 8줄 : 훌률하게 -> 훌륭하게
688쪽 11줄 : 피터스버그에서의 -> 피터즈버그에서의 (다른 곳의 표기와 통일)
689쪽 10줄 : 링컨는 -> 링컨은
698쪽 1줄 : 맥클렌런의 -> 맥클렐런의
706쪽 7줄 : 위태로 운 -> 위태로운
722쪽 밑에서 10줄 : 기록다. ->기록했다.
730쪽 밑에서 2줄 : 정서의계속되는 -> 정서의 계속되는
740쪽 5줄 : 베리나는 (659쪽과 표기 다름. 원문은 "Varina")

743쪽 밑에서 4줄 : 링컨은 "남부인들에게 그들의 노예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세금을 징수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북부에서도 이를 위해 4억 달러 상당의 예산을" 승인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 링컨은 "남부인들이 노예에 대해 보상을 할 수 있도록 세금을 징수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북부인들이 4억 달러 상당의 예산을 승인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원문은 "Lincoln let the commissioners know that "he would be willing to be taxed to remunerate the Southern people for their slaves." He was fairly confident "the people of the North" would sustain him with "an appropriation as high as Four Hundred Millions of Dollars for this purpose.")

749쪽 밑에서 3줄 : 고려했해왔고, -> 고려해왔고,
761쪽 밑에서 5줄 : 연방군을 -> 연방군은
762쪽 밑에서 4줄 : 지난여름에 -> 지난 여름에
781쪽 밑에서 6줄 : 지난여름부터, -> 지난 여름부터,
782쪽 3줄 : 파월를 -> 파월을
782쪽 밑에서 12줄 : 덥힌 -> 덮인

(이하는 띄어쓰기 2칸으로 의심되는 부분)
166쪽 밑에서 7줄 : 때문에,  오로지
336쪽 2줄 : 나와서는  슈어드가
386쪽 밑에서 11줄 : 이의를  제기하지
489쪽 7줄 : 장군이  활동하는
493쪽 밑에서 4줄 : 걱정입니다."  그는
653쪽 4줄 : 수많은  조롱을
682쪽 5줄 : 강요했는데,  링컨은
713쪽 1줄 : 반대했던  왕당파가
737쪽 1줄 : 사이에서  더
744쪽 밑에서 2줄 : 바쳤습니다.  제가
762쪽 13줄 : 함께  위험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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