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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리뷰오브북스 9호 (서울리뷰, 2023.) 본문

잡冊나부랭이

서울리뷰오브북스 9호 (서울리뷰, 2023.)

Dog君 2023. 3. 28. 09:42

 

  이번 서리북은 판형이 작아진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손에 들고 보기에 딱 좋을 정도로 작아져서 여기저기 들고다니며 읽기가 많이 편해졌습니다. 물론 그전의 판형에 대해서도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편하긴 편하네요 ㅎㅎㅎ.

 

  서평을 읽는 것은 보통의 독서와는 다른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서평의 목적이 저자의 적극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겠죠. 아직 읽지 않은 책을 구입하거나 구입하지 않게 한다거나, 이미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을 서평자와 견줘보게끔 하는 것 말이죠. 그런 점에서 이번 서리북도 즐거운 독서경험이었습니다. 한 때는 서리북에 대해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졌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느낌도 많이 줄었습니다.

 

  모든 서평을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읽은 서평에서는 꽤 많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예컨대 박훈의 『하얼빈』 서평 같은 경우에는 몰랐던 정보를 많이 알게 되었는데요, 김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 서평 때문에 새삼 『하얼빈』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조은 선생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서평은, 이건 조은이 아니면 절대로 못 쓰는 평이겠구나, 싶어서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물론 동의하기 어려운 서평도 있습니다. ㅎㅎㅎ)

 

  그런데 서평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이번 서리북에서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평은 권보드래의 것이었습니다. 권보드래의 서평에서는, 텍스트에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고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보아내기 위한 독자(평자)의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어설픈 선지식 때문에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까지 흔들리는 일이 잦은 저로서는 옆구리가 쿡쿡 찔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좋은 역사책을 더 많이 소개하려고 팟캐스트도 하고 SNS도 운영합니다만, 그런 애초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저에게는 아직도 더 많은 겸손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이 책 전반에 깔려 있는 '한국에서 박사하기'에 대한 대담자들의 인식은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일국적 한계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문제이다.
  저자들은 박사 과정을 밟고자 할 때 유학과 국내 박사 과정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결국 후자를 선택한 것은 "영미권 대학원의 연구 환경이 한국 대학원보다 훨씬 체계적"(135쪽)일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대학원이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더 잘 이해하고 더 좋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진정으로 공헌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20-30년 전이라면 이런 식의 고민이 나름 의미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들이 대학원 진학을 선택하고 '박사하기'를 하던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변화를 볼 때, 이런 접근 혹은 문제의식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 나가기는커녕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2023년 대학민국의 대학원생들은 '한국 대 외국'이라는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에서 박사를 하는 이유는 그저 한국에 있으니까 한국을 더 잘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학을 가는 것보다 세계적인 슈퍼스타 학자가 되는 더 좋은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자들이 제시한 한국 학계나 한국 대학원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은 오진과 잘못된 처방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 국내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좋은 연구 성과를 내서 세계 유수 대학에 자리를 잡고 강의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생각하는 대신, 해외 박사들과 국내 박사들이 한국의 교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문제만 언급한다.
  (...)
  이들이 담대한 꿈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일차적으로는 이것이 지도교수와 학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즉 많은 교수들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유학을 권유한 뒤, 국내 대학원에 들어온 학생들은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레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이러한 생각에 저항하거나 이겨내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나는 이런 패배주의 균형이 깨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자들이 이 책에서 그런 균형을 깨고자 하는 의지와 전망을 보여 주길 기대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 (김두얼,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기를 - 『한국에서 박사하기』」, 124~127쪽.)

 

  계급 간에 또는 처지나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 간에 "서로 말을 알아듣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사당동 철거 재개발 현장에서 만난 가족을 30여 년 이상 따라다닌 뒤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사례 가족과 나는 서로 말뜻을 놓치고 헤맬 때가 많았는데 처음에는 교육 수준의 차이인가 생각했었다. 다큐를 만들어 극장 상영을 앞두고 그들의 대화를 자막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때, 교육받은 청중이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막 처리하는 것이 당연한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된 경험을 『난쏘공』의 어떤 문단들을 읽으면서 소환했다. 텍스트 안 같은 공간에서 딴 소리하는 '그들'과 '그들', 그리고 그들을 읽는 '우리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묻고 읽는 포지션을 고민하면서 『난쏘공』이 '소통할 수 없음'/'말할 수 없음'의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소설로 다가왔다. (...) 조세희는 『난쏘공』을 낸 지 22년 만에야 「작가의 말」을 쓴다. 그는 "어느 날 나는 경제적 핍박자들이 몰려 사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철거반―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내가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고 쓰고 있다.(9쪽) '핍박자', 서발턴이 처한 '말로 할 수 없는 기막힌 공간/말'을 누가 해야 하는가에 스스로에게 답한 듯하다. (조은, 「소통 불가능한 세계에 던지는 질문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36~138쪽.)

 

  나로서는 『파친코』를 좋아하긴 어려웠다. 역사적 세부나 사건 사이 불균형이 걸렸고(한국전쟁은 없네?), 뒤늦은 가족주의가 생경했으며(유행에 역행하는 배짱일까), 한결같이 착하고 부지런한 주인공들이 피로했다(순응의 안간힘이란 역시). 평생 선자 주위를 맴도는 한수가 못마땅했고(보디가드 콤플렉스는 그만), 하루키·에쓰코·하나 등 일본 내 소수자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배치한 후반부는 지나치게 전략적으로 보였다(변형된 소수자 연대 실험인가?). 선량한 한국인, 수난의 한국사라는 기조음도 불편했다. 끝까지, 끝까지, 내 의식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대신 처음부터 타인의 시선에 강박된 글쓰기를 보는 듯했다. (...)
  『파친코』는 첫인상에 비해 복잡한 소설이다. 작가로서 이민진의 출발점이 동화에의 열망과 그에 반발하려는 의지의 교차점이었다면, 『파친코』의 경우 전반부는 전자가 지배적인, 후반부는 후자가 지배적인 전개를 보여 주는가 싶기도 하다. (...)
  탈향(脫鄕)의 성공 서사에는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이 어지럽게 얽혀 있다. 『파친코』는 오직 가족만을 문제 삼음으로써 이 분열을 억누르려 하지만, 솔로몬이 한국인이자 일본인으로서 이중의 정체성을 포용하는 대목에 이르러 분열은 제 얼굴을 활짝 드러낸다. 그것도 의외로운 긍정적 색채로써. 내 기준으로서는 의심을 다 거둘 수는 없었다(이것은 진심일까 전략일까?). 그러나 『파친코』를 읽는 내내 불만스러웠던 마음이 솔로몬이 '나도 일본인'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뭉클해졌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바라건대 작가가 이 분열을 더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기를. 그럼으로써 더 자유로워지기를. 독자 또한 달콤쌉싸름한 한 조각 자유를 맛볼 수 있기를. (권보드래, 「좀 더, 달콤한 혼란과 쌉쌀한 자유를 - 『파친코』」, 146~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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