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좋은 불평등 (최병천, 메디치미디어, 2022.) 본문

잡冊나부랭이

좋은 불평등 (최병천, 메디치미디어, 2022.)

Dog君 2023. 3. 28. 09:45

 

  이 책의 주장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불평등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질서에서 모든 이가 같은 소득을 누릴 수는 없으니 소득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격차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그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됩니다.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지 않으면 일단 노동의 재생산부터 불가능해집니다. 또한 소득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진 사회는 역동성을 잃고 정체(停滯)합니다. 다양한 정책적 수단을 통해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불평등이 증가/감소한다는 것은 소득의 편차가 증가/감소한다는 뜻일 뿐 그 자체로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불평등이 증가/감소한다고 해서 사회정의가 바로세워지거나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불평등이 증가하더라도 소득은 증가할 수 있고, 불평등이 완화되더라도 소득은 감소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자를 '좋은 불평등'으로, 후자는 '나쁜 평등'이라고 각각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는 한국의 불평등은 내생적인 원인이 아니라 외생적인 원인에서 비롯한다는 겁니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이 격화된 것은 1997년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보수 정권의 친기업·감세 정책은 불평등을 키웠고, '진보' 정권의 정책은 불평등을 완화시킨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실제는 그와 다릅니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 정도는 1997년 이전, 더 정확히는 1994년 이후부터 이미 심화되고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보수 정권 때는 지니계수(불평등 정도)가 오히려 감소했고, '진보' 정권 때는 지니계수가 오히려 커졌습니다.

 

  이는 한국 불평등이 정권의 성격이나 정책의 방향 같은 내생적인 원인에 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한국경제 불평등의 3대 변곡점으로 ①1994년, ②2008년, ③2015년을 꼽습니다. 1980년대 이후 임금 지니계수의 추이를 보면 1980~1994년까지 지니계수는 꾸준히 감소하다가 1994년을 기점으로 상승했고, 다시 2008년에 잠시 감소한 후 U자형으로 다시 상승했고, 2015년에 정점을 찍은 후 다시 감소하는 중이라는 거죠.

 

  이 책에 따르면 이들 3개 변곡점은 공히 세계 경제, 특히 중국과 관련있습니다. ①의 경우,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임금이 인상되고, 1992년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택했으며, 같은 해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면서, 저기술·제조업 일자리가 대거 중국으로 이전된 것이 중요합니다. 중간소득 일자리의 규모가 감소했고, 이에 따라 소득의 편차가 늘면서 1994년을 기점으로 불평등이 강화되었다는 것이죠. ②의 경우, 세계금융위기 때문에 수출량이 줄면서 상층소득자의 소득이 감소했고, 이에 따라 소득격차가 줄었다는 겁니다. ③은 2014년 중국이 신창타이(新常態) 경제를 선언하면서 기술의 고도화와 중간재의 국산화를 추진하고 이에 따라 무역의존도가 하락하면서 한국의 제조업이 위기를 맞으며 소득 격차가 줄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 분석에 따른 저자의 정책적 대안은 '규모의 경제'입니다. 한국경제의 위기와 불평등의 원인이 세계경제에 대한 높은 의존도 때문이라면, 그에 대한 대책 역시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기업규모와 부가가치와 임금 수준을 높이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점을 애써 무시해고 대기업을 적대시하고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만 찬양한다면, 그리고 소상공인 보호의 미명하에 '규모의 영세성'을 장려한다면, 결국 그것은 '저임금노동자 활성화' 정책으로 귀결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재벌은 점진적으로 개혁하되) 대기업과 미래 산업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대학 교육 역시 기업과 학생의 요구에 부응하는 쪽으로 변화해야 한다고도 덧붙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사회 내부의 재분배 정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은 공동체의 통합과 지속가능성을 위해 재분배 정책은 꼭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세력의, 계급성에 기초한 경제인식은 재분배 정책에 있어서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은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성장론은 실제정책에서 자본-노동 관계만을 본 나머지 임금소득과 가구소득을 구분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불평등을 오히려 악화시켰다고 비판합니다. (이 책은 불평등 해소를 위해 진짜 주목해야 할 계층으로 노년층을 꼽습니다.)

 

  이상과 같은 논거와 주장에 대해 세부적으로 논평할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이 책이 논거로 든 도표와 숫자들을 제가 어떻게 하나하나 반박하겠습니까. 오히려 주장과 논거가 이렇게 쫀쫀하게 들어찬 책이 참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밑줄 긋고 고개 끄덕여가며 즐겁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 속 어딘가에 찝찝한 느낌이 남습니다. 특히 정책 대안 부분에서 그런데요, 대기업의 경쟁력 강화나 대학 교육에서의 기업 요구 반영 등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 한켠에 자꾸 뭔가가 씻겨내려가지 않고 남아있는 느낌입니다.

 

  대기업에 대한 '사회적 대타협론'은 이미 한참 전에 제기된 적이 있었고(장하준!), 대학 교육에의 기업 영향력 강화 역시 이미 대학 교육에서 어느 정도 관철되고 있습니다. 제 마음 어딘가에 찝찝함이 남는 것은, 이들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자꾸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주장은 박근혜·최순실의 정경유착이 드러난 이후 더 이상 꺼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후자 역시 비슷해서, '교육의 시장 적응력 강화'라는 목표가 결국에는 '시장논리에 따른 교육(과 학문)의 획일화'로 귀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지켜보아왔기에 이 책의 주장에 일견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게 생각처럼 그렇게 쉽겠나 싶은, 마음 한켠에 말끔히 씻기지 않는 걱정이 계속 남습니다.

 

  다른 질문도 떠오릅니다. 무엇보다 불평등 그 자체를 좋고 나쁨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이 책의 대전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불평등'의 정도가 커질 때 우리는 그것을 '양극화'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양극화를 경계하는 것은, 그 양극화가 사회적 역동성을 없애고 그 사회를 정체(停滯)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꼭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양극화가 이미 사회적 불안을 키우고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지요. 이 때문에 불평등을 마냥 가치중립적으로만, 숫자로만 표현되는 현상으로만 보아도 괜찮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책은 계층 이동의 역동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에 관해 아주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독자로서는 불평등의 정도가 커지면서도 사회적 역동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책의 주장은 지속적인 성장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경제와 소득이 성장하는 것에 따른 불평등의 증가가 '좋은 불평등'일 수 있는 것은, 상층소득자의 소득이 증가한 결과로 사회 전체의 소득이 증가하는 낙수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성장률이 점진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상층소득자의 소득 증가가 낙숫물처럼 아래로 흘러내려가기를 미래에도 계속 낙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 소득이 상층소득자에게만 멈춰있게 된다면, 소득은 성장하지만 낙수효과가 없는 상태로 불평등만 증가하는 또다른 형태의 '나쁜 불평등'이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합니다. 물론 이에 관해서 '사회적 대타협론'을 참고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전히 정경유착의 고리가 여전히 끈끈한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대타협론'이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겠죠. 낙수효과를 유도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재분배를 위한 정책적 수단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시장만능주의로 귀결되는 것 아닐까요.

 

  거 참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께서 이 책의 주장을 좀 더 밀어붙여서 더 많은 화두와 정책 대안을 던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제 마음 속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즐거움을, 아직 남아있는 걱정과 질문에 대해서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보니 좀 더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다루는 후속작을 준비 중이시라고 하네요. 저자의 다음 책을 기다립니다.

 

  1994년은 한국경제 불평등의 최저점이었다.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는데 이후 2년간 한국경제 불평등은 오히려 줄었다. 2015년은 한국경제 불평등의 최고점이었다. 1994년, 2008년, 2015년, 나는 3개 연도를 책 내용 전체에 걸쳐 '3대 변곡점'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우리가 한국경제 불평등의 작동 메커니즘과 변동 요인을 알고자 한다면, 3대 변곡점을 발생시켰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있었고, 어떤 영향을 미쳤기에 불평등은 증가 혹은 축소된 것일까? (54쪽.)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대규모 임금인상과 잦은 노사분규는 기업 입장에서 '경쟁력 위기'를 의미했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던 그 시점에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에 의한 남순강화가 있었다. 1992년 중국공산당은 제14차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채택했다. 마침 그 시기에 노태우 정부는 취약한 지지율을 돌파하기 위해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드디어 수교를 맺는다. 3가지 사건이 드디어 만나게 됐다. (...)
  한·중 수교가 체결되자, 인건비 인상으로 수익성 압박을 받던 저숙련·저임금 기반의 한국 자본가들에게 중국 공산주의는 '자본의 해방구'가 된다. 저임금·저숙련 기반의 한국 자본가들은 일당 독재의 나라 중국 공산주의로 피난을 간다. 더 낮은 임금을 찾아서.
  (...) 한국은 OECD 국가를 통틀어서도 가장 빠른 속도로 저기술·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저기술·제조업 고용 비중이 줄어드는 기울기가 가장 가파르다. (...)
  1987~1998년 저기술·제조업 고용이 급격하게 줄어든 이유는 3가지 사건이 결합됐기 때문이다. 첫째, 1987년 6월 항쟁과 결합된 노동운동 때문이다. 둘째, 중국의 개혁개방 2단계 국면이 본격화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와 1992년 10월 제14차 중국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공식 노선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셋째, 1992년 8월 한·중 수교 이후 저기술·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은 중국에게 가성비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
  1987~1992년 즈음 한국 제조업의 총 고용 비중은 전체 취업자의 30% 수준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거치며 한국 제조업의 고용 비중은 약 17%로 줄어들었다. 이는 동시에 저숙련·노동집약적·수출·제조업에 종사하는 일자리가 사라지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제조업에서는 하단에 위치했지만 전체 노동시장에서는 '중간소득' 일자리에 해당했다. 중간소득 일자리의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바로 이것이 1994년부터 한국경제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한 진짜 이유다. (70~74쪽.)

 

  (...)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무역거래 총량이 줄었고, 한국 역시 수출 총량이 줄었다. 수출 총량이 줄면 수출·제조업·대기업에 종사하는 고임금노동자들의 성과금, 장려금, 보너스 소득도 대폭 줄어든다. 2008~2010년 기간 동안 불평등이 줄었던 이유다. (116쪽.)

 

  경제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에는 불평등, 수출, 성장, 투자, 고용이 있다. 이 중에서 한국의 진보세력은 불평등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 '진보의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수출, 성장, 투자의 경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보수의 아젠다'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현실은 이차방정식이 아니다. 중국경제의 부상 이후, 한국경제에서 불평등과 수출, 성장, 투자, 고용은 서로 연동되어 작동했다. 만일 불평등은 나쁜 것이고 수출, 성장, 투자, 고용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쁜 일과 좋은 일이 공존했다. (...)
  노무현 정부 때 불평등이 확대됐던 이유는 중국에 대한 급격한 수출 증가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의 수출 대박 때문이었다. (...) 한국경제는 비교적 빠른 기간에 3만 달러를 달성했다. 200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중국 특수'에 올라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36~137쪽.)

 

  한국경제에서 불평등이 증가한 1994~2008년의 기간은 마침 '민주화 운동가' 출신이 대통령을 하던 시점이다. (...) 1994년부터 한국경제 불평등이 증가한 이유는 1992년 중국의 개혁개방 2단계가 본격화되고,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가 체결됐기 때문이다. 중국의 저기술·노동집약적·수출·제조업이 가성비 차원에서 한국 제품의 경쟁력을 월등하게 제압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에서 불평등이 감소하는 시점은 마침 보수성향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다. 2008년 변곡점은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기간과 겹친다. 2008~2010년 기간 동안 한국경제 불평등이 감소하는 이유는 이명박 정부가 반(反) 신자유주의적 진보 정책을 펼쳐서가 아니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선진국발 경제위기'였기에 한국 수출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한국 수출량이 급감해서 한국에서 수출·제조업·대기업에 다니는 소등상층 10% 노동자들의 연말 상여금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 2008~2009년 경제위기는 '불평등이 줄어드는' 경제위기였다.
  한국경제 불평등의 세 번째 변곡점은 2015년 변곡점이다. 이때는 박근혜 대통령의 재임 기간과 겹친다. 2015년을 최정점으로 한국경제 불평등은 2019년까지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2014년 중국의 신창타이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중국경제가 중간재를 국산화하고 무역의존도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창타이로 인해 한국경제는 3가지 변화를 동시에 겪게 된다. 수출 증가율의 급감, 제조업 위기, 불평등 축소다. 한국의 수출이 작살나거나 제조업이 위기에 빠지면 한국경제 불평등은 줄어들게 된다. (...) 최소한 임금 불평등, 임금 지니계수에 한해서, 한국경제 불평등은 중국발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 불평등은 '수출 대박과 연동된'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160~162쪽.)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박정희 경제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자신을 정립한 경향이 강하다. 박정희 경제학은 수출+대기업+외자 동원+낙수효과+임금 억제와 노동 3권 탄압을 특징으로 했다. 박정희 경제학에 대척점을 형성했던 한국의 진보세력은 내수+중소기업+내자 동원+분수효과+임금 인상과 노동 3권 존중 정책을 주장했다. 이러한 진보의 경제정책은 박정희 경제학에 대한 문제 제기로는 부분적 긍정성이 있었지만, 좋은 통치의 경제 노선으로는 많은 문제점을 갖는다. 경제 노선의 '근본적' 쇄신이 중요한 이유다.
  한국은 유독 저임금노동자가 많고, 근속연수가 짧은 나라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다. 한국 정치권이 1987년 민주화 이후, 소상공인 보호의 미명 아래 '규모의 비경제'를 장려했던 정책의 결과물이다.
  대안적 정책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소기업을 중기업으로, 저부가가치를 중부가가치로, 저임금 일자리를 중임금 일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경제학에서 생산성과 상관관계가 가장 높은 것은 '규모의 경제'다. 대기업을 적대시하고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를 찬양하는 입장은 규모의 경제와 상반되는 접근이다. 바람직하지 않다. 소상공인 보호의 미명하에 진행되는 '규모의 영세성'을 장려하는 정책은 축소 및 중단해야 한다. 규모의 영세성을 장려하는 정책은 결과적으로 '저임금노동자 활성화' 정책으로 귀결된다.
  한국 정치권, 한국의 진보세력은 한쪽에서는 저부가가치+영세+소규모 자본을 장려하고 있다. 이는 동전의 양면으로 저임금+불안정 고용+짧은 근속 기간 노동을 장려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재벌, 대기업, 산업의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해외 선진국의 경우 재벌은 없지만 대기업은 존재한다. 재벌은 점진적으로 개혁하되, 대기업과 미래 산업은 적극 장려해야 한다. (215~216쪽.)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재분배' 정책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재분배는 필요하다. 상층 소득자가 세금을 더 많이 부담하는 것 역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로빈후드적 세계관에 기초한 재분배 철학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과 사회연대에 기반한 재분배 철학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부자와 상층, 자본가 및 기업가가 약탈자 혹은 적폐이기 때문에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회경제적 성공이 어느 정도는 운에 의해서 결정되고, 공동체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공동체의 통합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우리 모두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310쪽.)

 

  현재 대학 교육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 공급자 집단은 현재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대학 교수의 경우, 과거에 배운 것을 현재 가르치는 존재다. 반면에 교육 수요자 집단은 '미래'에 대응하려는 욕구를 갖는다. 예를 들면 학생은 미래 적응 능력을 현재 배우고 싶은 존재다. 교육 공급자 집단은 학교재단, 교수, 교사 들이다. 교육 수요자 집단은 학생과 청년이다. 그런데 교육의 공급자이며 동시에 교육 수요자인 집단이 있다. 바로 기업이다. (...)
  교육부 공무원, 대학 교수, 재단 이사장, 기업, 학생 중 대학 교육에 한해서 환경 변화와 미래에 가장 관심 있는 행위자는 누구일까? 정답은 기업과 학생이다. 기업과 학생은 교육 수요자다. 반면에 교육 공급자인 교육부 공무원, 대학 교수, 재단 이사장은 상대적으로 환경 변화와 미래에 대해 둔감하다. 경우에 따라 환경 변화와 미래에 대한 저항 세력일 때도 있다.
  고급 인재 육성에 가장 절박한 이해 관계를 가진 집단은 글로벌 대기업과 기술기반 중기업들이다. 고급인재 육성의 핵심은 대학 경쟁력 강화 정책이다. 대학 경쟁력 강화의 핵심은 기업과 학생의 욕구, 발언권, 의사결정권을 교육 과정에서 대폭 강화하는 것이다. (344~345쪽.)

 

교정. 초판 3쇄
71쪽 4줄 : 저숙련·저임금
71쪽 5줄 : 저임금·저숙련 (같은 내용인데 순서가 다름)
222쪽 밑에서 9줄 : 《쌀, 재난, 국가》
273쪽 8줄 : 《쌀 재난 국가》 (같은 책인데 표기가 다름)
333쪽 밑에서 3줄 : 동원력이 -> 동력원이
359쪽 밑에서 2줄 : 교수님의 -> 교수의 (다른 부분에서는 '님' 없음)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