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회고전 5. 올해의 시

1. 전국시대 말 항우와 유방의 다툼 이야기는 삼국지나 수호지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선명한 대결구도 덕분에 나름의 강렬한 맛이 있다. 뛰어난 무용을 자랑했던 천하장사 항우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통솔할 줄 알았던 유방의 대결은 삼척동자도 다 알다시피 결국 유방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2-1. 시황제의 죽음 이후 혼돈에 빠진 중국대륙은 결국 항우와 유방의 양강구도로 정립되고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초기에 승기를 잡은 것은 항우였지만 유방은 우여곡절 끝에 승세를 잡고 해하垓河에서 항우군을 완전포위하는데 성공한다.

2-2.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밤, 초나라 군사들을 회유하기 위한 초나라 민요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운데 항우는 우미인과 술잔을 나눈다. 그리고 짧게 노래한다.

3.
力拔山兮氣蓋世 역발산혜기개세
時不利兮騶不逝 시불리혜추불서
騶不逝兮可奈何 추불서혜가내하
虞兮虞兮奈若何 우혜우혜내약하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시세가 불리하니 오추도 나아가질 않는구나
오추가 나아가질 않으니 이를 어이할꼬
우야 우야 내 너를 어이할꼬

4. 초나라 출신 답게 항우의 노래 역시 초나라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초나라는 당시에는 많은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던 남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중원과는 약간 다른 문화가 발달했다. 초가楚歌는 독특하게 일곱자로 한 행을 짓고 중간에 兮(어조사 혜)를 삽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는 이 시처럼 가운데에 兮를 넣어 운율을 맞추는 경우이다. 물론 이 글자에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5-1. 항우는 첫 행에서 자신의 힘과 기개를 내보이며 큰 포부를 비추고 있지만 항우의 그런 기백은 두번째 행부터 급격히 무너진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자신의 애마조차 말을 안 듣는 것이다. 그렇다. 항우는 지금 좆됐다.

5-2.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시세는 이미 유방의 쪽으로 기울었다.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을까. 일찌기 범증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던 것도 아까울 것이고 홍문에서 유방을 없애지 못한 것도 한스럽다. 그 언젠가 그가 땅에 파묻어 죽여버렸던 적국의 병사들이 저주를 퍼붓는 것도 같다. 어쨌든 항우는 지금 좆됐다.

5-3. 드디어 세번째 행에서 항우는 완전히 무너진다. '奈何'라는 말은 '어떻게 하겠는가' 정도의 뜻인데 다른 해석들에서도 '어이하랴', '어찌 하느냐' 이런 식으로들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거의 손에 쥔 듯 했던 패권도 놓치고 대부분의 군사를 잃었으며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절망적 상황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지새는 마지막 밤에 지은 노래인데 그런 번역들은 어딘지 모르게 좀 어색해 보인다. 항우가 품었을 그 절망적인 마음을 생각한다면 '어이할꼬'라는 식이 좀 더 적절해 보이지 않는가. (물론 뭐 항우가 그런 순간에도 끝까지 후까시를 잡았을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만은... 근데 그러면 좀 재미가 없잖냐.)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던 사내가 지금이라도 당장 울먹일 듯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여자 앞에서. 이거 무슨 70년대 로맨쓰 영화 삘이 쫌 난다.

5-4. 사내의 울음은 네번째 행에서 드디어 절정에 도달한다. 연인의 이름을 크게 두 번 외치고 또 한번 좌절한다. '우야 우야 내 너를 어이할꼬' 이쯤 오면 뭐 없다. 아마도 항우는 질질 짰을거다. ㅅㅂ 술도 좀 오르지 가슴 속에 분통은 터지지 이 여자 어떻게 살려줄 방법은 없지. 말을 타고 창 휘두르면 내 몸 하나 지키는 것 어렵지 않은데 이 여자는 어쩌냔 말이다. 그런 통탄으로 노래는 끝난다. 절정에서 결말로 이어지고 뭐 그딴거 없다. 구성이 완전 발단-위기-절정-절정 이런 식이다.

5-5. 절벽 위를 달려가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버리는 것 마냥 이 노래는 끝난다. 노래가 아주 '싸나이 순정을 좀 알아주소!' 뭐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항우 이 사람, 여자친구 앞이라고 그 상황에서도 후까시 좆나 잡고 있다. 다음에는 '올해의 인물'로 돌아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