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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왕 (이케이도 준, 비채,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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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왕 (이케이도 준, 비채, 2023.)

Dog君 2023. 9. 10. 21:08

 

  달리기에 관한 책이라면 뭐든 사서 보는 저, 이번 책은 기업 소설입니다. 일본의 전통 버선인 다비를 만들던 회사가 새롭게 러닝슈즈 제작에 뛰어든다는 이야기죠. 아니, 버선을 만들던 회사가 어떻게 러닝슈즈를 만든단 말인가, 싶습니다만, 다비의 밑창에 생고무를 덧댄 '지카타비'는 지금도 노동현장에서 신발로 많이 활용되고, 별도의 러닝슈즈가 없던 시절에 일본의 마라토너들은 지카타비를 신고 달렸다고 합니다. (손기정 선수도 지카타비를 신고 뛰셨다고 하네요.)

 

  책은 두툼하고 분량도 상당하지만 사실 내용이 아주 막 드라마틱하거나 예측불가하게 전개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약간 비열한 경쟁업체의 책략을 딛고 일어선다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로 경영난에 빠진다거나, 슬럼프에 빠졌던 후원선수가 극적으로 역전극에 성공한다거나, 뭐 그런 클리셰로 넘쳐납니다. 하지만 달리기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드라마틱함과는 거리가 멀죠.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진짜 이유는 드라마틱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달리기가 꼭 그러하듯이 경영도, 인생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묵묵하고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단거리 달리기의 역동성보다는 장거리 달리기의 지루함과 꾸준함이 더 돋보였기에 읽는 내내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무라카미 하루키, 가쿠타 미쓰요), 육상 선수를 다룬 소설(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에 이어 이제는 기업 소설까지. 확실히 일본은 달리기의 저변이 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부쩍 달리기가 유행이라고 하지요. (늘 가던 달리기 코스에도 달리는 사람 숫자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달리기를 소재로 한 예능이나 소설, 드라마, 영화가 본격적으로 나올 때가 된 거 같은디... (이미 몇 편 나왔다는 걸 알지만 글쎄요, 아주 흡족한 수준은 아니더라구요.)

 

 

  "지금까지 달려보신 적은 있습니까?"
  "아뇨."
  미야자와가 변명 같은 말을 이었다. "특별히 운동을 하고 있진 않아서요. 바쁘기도 하고."
  "그럼 우선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시죠."
  기운 빠지는 조언이었다. "시간을 내서 밖으로 나가면 자연히 걷게 되니까요."
  "신발은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가죽 구두든 뭐든요. 갑자기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시작하는 것. 그게 부상당하지 않고 오래 지속하는 비결입니다."
  어쩐지 그것은 회사의 경영 방침과 일맥상통한 것 같았다. (53쪽.)

 

  아리무라에게 조언받은 걸 계기로, 미야자와도 조깅을 일과로 삼았기에 달리는 일에 예전만큼 저항은 없었다. 4킬로미터는 평소 달리는 거리보다 다소 길지만, 1킬로미터 정도 차이였다. 홍보가 목적이라면 기록은 둘째 문제다. 그렇다면 간단하다고 우습게 봤는데, 이것이 엄청난 잘못이었다.
  레이스는 역시 레이스다. 혼자 멋대로 달리는 조깅과 달리 레이스에는 상대가 있다. 앞서 달리거나 앞질러 나아가는 러너들을 따라가려고 원래 페이스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오버페이스를 했으니 미야자와에게 마지막 2킬로미터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11월치고는 지나치게 높은 기온이 가차 없이 체력을 빼앗아갔다.
  조금 전부터는 달리지 말고 걸어갈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3킬로미터 이상 달렸을 텐데 결승선이 보이지 않는다. 사전 조사를 해뒀으면 좋을 거라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다.
  무슨 일이든 그렇다. 종점을 알면 열심히 할 수 있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난을 계속 해나가기는 아주 어렵다.
  "사장님, 힘내세요! 500미터 남았어요!"
  그때 연도에서 격려가 날아들었다. 피로로 굳어진 얼굴을 돌리자 봉제과의 아케미 일행이 보였다.
  앞으로 500미터.
  그 500미터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로 느껴진다. (234~235쪽.)

 

  "그렇군. 그거참 좋군그래. 계속하는 편이 좋을 거네. 관련해서 말하자면 조깅이나 러닝을 시작한 초보자가 '아아, 즐겁다' 하고 생각하는 스피드는 대체로 1킬로미터를 6분대에 달리는 정도라고 하지.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즐거움을 순순히 체감할 수 있는 스피드일세. 그 스피드로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면 4시간 중반대 기록이 나온다네. 일본 전체에서 러닝을 하는 사람은 대략 2000만 명이라고 보는데, 그중 마라톤 풀코스를 4시간대에 달리는 사람이 마라톤 인구 중에서 제일 많지. 일설에 따르면 약 150만 명이라고 하네."
  미야자와는 150만이라는 숫자를 들어도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잘 와닿지 않았다. 무라노가 말을 이었다.
  "그 가운데 당연히 좀 더 위를 지향하려는 사람이 있지. 4시간 벽을 깨려는 상승 지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면 되려나. 그 결과 실제로 3시간대에 주파하는 사람은 약 120만 명이지. 그렇다면 그중에서 2시간대에 도달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10만 명 정도밖에 안 된다네. 숫자가 단숨에 감소하지." (319~320쪽.)

 

  (...) 사실 러닝슈즈의 차이를 판별하는 것이 그다지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훈련 때는 미세하게만 느껴지던 위화감이 마라톤 풀코스 중 35킬로미터 지점을 지나면 확실한 감각으로 전해진다. 진정한 의미에서 러닝슈즈의 성능이 발휘되는 것은 바로 그때부터다. 당연히 맞지 않는 러닝슈즈는 부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448~449쪽.)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교에서 사회인으로. 히라세가 걸어온 육상 인생의 집대성을 위해, 거기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한 말 한 발에 몸과 마음을 다 걸고, 그동안 기울여온 정열, 애정, 그리고 미련을 잘라버리려 하고 있다. 소중히 해온 것과 스스로 결별하기 위해.
  (...)
  두 번 다시 히라세를 응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이 뚜렷한 무게를 갖고 가슴을 덮쳐왔기 때문이다.
  (...)
  결승선 앞 마지막 100미터. 사력을 다한, 마지막 혼신의 달리기였다. 그대로 동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쓰러지듯 골인한다. 히라세는 복받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기도와 부둥켜안고, 모기와 동료들과도 부둥켜안았다. 그러고는 오른팔로 눈물을 닦더니 방금 달려온 코스를 향해 직립부동 자세를 취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히라세는 허리를 깊숙이 굽힌 채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498~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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