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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 (이상희, 동아시아,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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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 (이상희, 동아시아, 2023.)

Dog君 2023. 9. 10. 20:49

 

  중고등학교 역사 선생님들은 늘,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죠. (물론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우리의 공부방식은 전형적인 암기과목의 그것이 됩니다만은...) 사실 암기가 중요한게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고 통찰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뭐, 그런 이야기들 말입니다. 역사 선생님들만 그런가요, 저를 포함한 거개의 역사학 연구자들도 허구헌날 저 이야기만 합니다 ㅎㅎㅎ

  그런데 역사를 공부해서 얻는 통찰이라는 것이 꼭 역사를 공부해야만 얻을 수 있는 통찰인가 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 복잡한 세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도 그만큼 섬세해져야 한다는 것, 뭐 그런 통찰은 역사 아닌 다른 학문에서도 비슷하게 이야기되는 것들이잖습니까. 심지어 얼핏 보기에는 인간세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자연과학이나 공학 분야에서 대가를 이룬 분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통찰도 어느 순간에는 인문학자의 그것과 맞닿습니다.

  고古인류학을 연구한 이상희가 『인류의 진화』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도 비슷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미 한참 전에 죽고 없어진 어떤 생명들입니다만, 종국에 도착하는 곳은 지금의 우리에 대한 통찰입니다. 호모 플로렌시스와 호모 날레디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눈에 띌 정도로 작은 뇌 용량을 가진 이들의 존재는 일차적으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로 뇌 용량이 계속 커지는 방향으로 인류가 진화했으리라는 통념에 대한 강력한 반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호모 플로렌시스와 호모 날레디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류의 진화라는 것이 단 하나의 갈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지향할 것 역시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무한히 갈래를 뻗어나가기만 하는 것인줄 알았던 종種이, 실은 서로 다시 합쳐지기도 한다는 점은 인류의 기원 역시 다양할 수 있다는 '다기원설'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어떤 사람은 종과 종이 서로 교잡하는 혼종의 양상에서 인류의 여러 문화가 (심지어 지배-피지배 관계에서조차) 서로 교차하고 횡단하며 교잡하는 양상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인류의 선사先史시대에서 시작한 이 책이 막바지에 이르러 역사歷史시대 '민족'의 작위성을 말하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아주 어색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선사시대에서 얻은 통찰이 역사시대라고 다르게 통용되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런데 사실 '민족'의 작위성을 말하는 책의 후반부가, 탕수육에게는 아주 흡족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전에 『상상의 공동체』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근대적 현상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최근의 담론은 이 책의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에 소개된 '민족' 혹은 '민족주의' 이해는 약간 낡은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저자의 책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근 연구를 좀 더 널리 알리지 못한 역사학자의 책임이고, 역사학자가 더 낯부끄러워할 일입니다. (저도 포함해서요.)

 

  여기까지 쓰고보니 문득, 선사시대를 연구한 저자와 역사시대를 연구한 역사학자가 마주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 그것도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찬찬히 따져볼 문제지만 서로 다른 분과에 속한 두 연구자가 서로의 공감대와 차이점을 호의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리가 만들어진다면, 독자에게 그보다 더한 지적 호사가 또 없겠지요.

 

  20세기 전반 우리의 생각을 지배했던 계단식 진화, 20세기 후반 우리의 생각을 지배했던 나무식 진화, 이 둘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을 표현하기에는 모자라는 은유였습니다. 인류의 진화는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앞으로 행진하는 모습도, 곁가지와 본가지로 갈라져서 울창한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뻗어가는 모습도 아닙니다. 차라리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고 다시 갈라지는 강줄기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많은 물줄기를 이루었던 인류 계통의 다양성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작은 물줄기에서 큰 물줄기로 모여 지구 전체를 덮고 있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기원이 만들어 낸 모습입니다. (10쪽.)

 

  그런데 이와 같은 정설에 또다시 정면으로 도전하는 연구가 점차 쌓이고 있습니다. 가령 사람과 가까운 침팬지를 비롯한 유인원은 사람처럼 행위를 배워서 다음 세대로 전승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흰개미를 잡아먹기 위한 도구인 나뭇가지를 다듬는 방법이 집단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관찰되었습니다. 나뭇가지를 다듬는 방법이 집단 내에서 대대로 전승되기 때문입니다. (...) 문화 전통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두뇌 용량이 450cc 남짓한 침팬지가 돌을 깨서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알고 그 방법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서 전승한다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또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사람만이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틀렸음이 밝혀졌습니다. 사람만이 도구 제작 및 사용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고 다음 세대로 전승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 역시 틀렸음이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다른 동물과 양적,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류의 진화 역사 속에서도 사람이 속한 호모속은 그 이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과 양적,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류와 다른 동물 사이에 놓인 벽, 호모속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 사이에 놓인 벽은 의외로 두껍지 않았습니다. (49~50쪽.)

 

  그런데 따뜻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몸의 털입니다. 털이 없는 것 또한 땀을 증발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200만 년 전의 호모속 고인류는 더운 지역에서도 태양이 작열하는 낮 시간대에 활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과연 털이 없었는지는 화석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간접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louse입니다.
  이는 짐승의 털에 빌붙어 사는 곤충입니다.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이 역시 털에서 알을 낳고 살다가 죽습니다. 사람에게 빌붙어 사는 이는 세 종류인데 머리털, 몸, 사타구니 털 등 사는 곳에 따라 서로 다른 종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발견되는 이는 머리털에 살면서 두피에 쌓인 먹거리를 먹습니다. 머리털에 사는 이(머릿니)아 몸에 사는 이(몸니)는 같은 종(페디쿨러스 휴마너스Pediculus humanus)이면서 다른 아종이지만 사타구니 털에 사는 이(사면발니)는 아예 다른 속(티루스 푸비스Phthirus pubis)입니다.
  한 몸에 살고 있는 머릿니와 사면발니와 서로 다른 속에 속할 정도로 다르다는 점에서 고인류가 털이 없는 맨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온몸에 털이 있었다면 머리털과 사타구니 털 사이에도 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머리털에 있는 이와 사타구니 털에 있는 이가 다른 종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사는 생태계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온몸에 털이 있는 인류의 사촌 침팬지와 고릴라에게는 온몸에 서식하는 이가 한 종입니다. 침팬지에게서 발견되는 이(페이쿨러스 스캐피Pediculus schaeffi)는 페디쿨러스속에 속하는 종이고, 고릴라에게 발견되는 이(티루스 고릴라이Phthirus gorillae)는 티루스속에 속하는 종입니다.
  머리털과 사타구니 털 사이에 털이 없다면 이의 입장에서 머리와 사타구니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대륙과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서식지가 되어버린 머리와 사타구니에는 서로 다른 종이 살 수 있습니다. 머릿니는 500~600만 년 전부터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침팬지와 인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기한 시점입니다. 그렇다면 머릿니는 인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동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머릿니와는 달리 사면발니는 330만 년 전부터 인류에게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면발니는 고릴라에게서 보이는 이와 가까운 종입니다. 인류와 고릴라는 800만 년 이전에 갈라졌는데 고릴라의 이와 가까운 사면발니가 330만 년 전부터 인류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인류와 고릴라가 가까웠음을 시사합니다. 아마도 고릴라를 잡아먹었거너 고릴라가 자고 난 숙소를 사용한 인류에게 옮겨 가서 사면발니라는 새로운 계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53~55쪽.)

 

  죽은 자에 대한 특별한 행위인 매장은 호모 사피엔스 크기의 두뇌를 가지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가능한, 호모 사핑네스에게 독특한 행위로 여겨져 왔습니다. 겨우 500cc 용량의 머리를 가지고 있던 호모 날레디가 호모 에렉투스의 2분의 1가량, 호모 사피엔스의 3분의 1가량 크기의 두뇌로 깊은 동굴까지 주검을 가지고 가서 매장했다는 주장을 학계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작은 몸집과 작은 머리의 고인류는 우리가 여태껏 생각해 왔던 인류의 다양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작은 머리로 석기를 만들어 쓰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벽화를 그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20세기의 답은 결단코 '아니요'었습니다. 고인류학계 대부분이 받아들인 정설에 따르면 벽화와 같이 고도의 인지 능력이 있어야 하는 행위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유하고 독특한 행위였기 때문에 당연히 '호모 사피엔스급의 몸과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137쪽.)

 

  어쩌면 기원이라는 개념을 다시 살펴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기원이라는 단어는 피라미드의 꼭지처럼 하나로 수렴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런데 현생인류가 복수의 기원점과 복수의 조상 집단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을 의외로 많은 자료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20만 년 전 남아프리카 오카방보게 살던 고인류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조상입니다. 30만 년 전 서아프리카에 살던 고인류도 그리고 10만 년 전 북아프리카에 살던 고인류도 우리의 조상입니다. 40만 년 전 유럽에서 살던 네안데르탈인 역시 우리의 조상입니다. 우리의 기원은 하나가 아닙니다. (172~173쪽.)

 

  그런데 2010년 이후 새로운 개념이 화두로 등장했스비다. 혼종의 개념입니다. 서로 다른 종끼리 유전자를 교환할 뿐 아니라 그 사이에서 나온 후손은 생식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혼종이 처음 대두되었을 때만 해도 고인류학계에서는 혼종이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식물에서는 흔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양서류에서는 흔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고등동물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구가 거듭되면서 점차 혼종이 '가축화 과정에서 흔한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급기야는 야생 영장류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임이 밝혀졌습니다.
  혼종의 개념이 부각되면서 이제 종 단위의 연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왔습니다. 두 집단 사이에서 유전자를 교환했다면 서로 같은 종이기 때문인지, 서로 다른 종이지만 혼종에 의해서인지 그 둘을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
  (...) 우리는 지난 17세기부터 동의한 종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다양한 종이 섞여 하나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는 관점은 하나의 종에서 두 종으로 분화해야만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에 전면적으로 도전합니다. 20세기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이 21세기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176~177쪽.)

 

  검은모루에서 발견된 동물 뼈는 수십만 년 전, 100만 년 전에 살았던 동물이 남겼을 가능성이 분명 높습니다. 그러나 그 뼈의 존재만으로 그곳에 고인류가 살았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신뢰할 만한 연대를 알기 어려운 데다 인류의 흔적 또한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검은모루를 한반도 최초의 인류 흔적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 북한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적대적이기까지 한 남한에서도 검은모루가 100만 년 전 인류 유적이라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과서에 수록하였습니다. (...)
  남북한 모두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큰 몫을 합니다. 20세기 초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 제국은 한반도의 인류 역사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이를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의 하나로 삼았습니다. (...)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한 반발로 한반도의 역사가 깊었고 주목할 만한 역사가 있었음을 강조해 온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 나름의 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첫 사반세기를 지낸 지금, 한반도에서 인류가 살았던 역사가 그렇게 깊지 않았다는 가설에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될만큼 우리나라 또한 성숙하고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검은모루에 대해서도 학계가 차분하게 되짚어 보기를 기대합니다. (205~206쪽.)

 

  그렇다면 한민족이 '순수한 한 핏줄'이라는 표현은 생물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담론은 한 민족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가장 필요했을 때 때마침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단일민족이라는 믿음, '민족'이라는 개념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였습니다. 그 전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 민족이라는 개념은 1920년대 당시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던 사람들이 갈구하여 탄생했습니다.
  국가가 건설될 때 정치 지도 계층에서는 자민족의 유구성, 독자성, 우수성을 내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민족의 우수성 담론을 통해 민족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근대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한국이 근대적인 국민 국가로 건설되던 당시 불행히도 한국은 식민제국주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제국주의의 대안은 민족 논리였습니다. 민족 논리는 사회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전개되었으며, 제국주의 치하에서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되었습니다. (...) (223~224쪽.)

 

교정. 초판 2쇄

205쪽 7줄 : 가능성은 -> 가능성이 (주격조사 '는'과 '은'이 한 문장 안에서 반복되니 약간 어색하게 느껴진다. 한쪽을 '이/가'로 바꾸면 더 좋을 것 같다.)

231쪽 11줄 : 스반테 패보는 -> 스반테 페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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